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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연재] 민훈기의 필드노트 | 1930년대의 기인 투수 디지 딘 이야기 E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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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스펠링도 특이한 영어 단어 dizzy는 '어지러운, 머리가 빙빙 도는 느낌'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혼란스러운, 정신없는(너무 빨리 변화하거나 복잡할 때)' 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Dizzy 였을까 싶은데, 제가 만나보지 못한 역대 MLB 선수 중에 그냥 무한 애착이 가는 투수가 바로 디지 딘(Dizzy Dean)입니다. ^^
 
- 1910년 1월 16일 미국 아칸소 주 루카스 출생
- 본명 제이 해나 딘(Jay Hanna Dean)
- MLB 데뷔 1930년 9월 28일 vs. 피츠버그 9이닝 3안타 1실점 완투승 
- MLB 은퇴 1941년 1경기 출전 후 
- MLB 최종전 1947년 9월 28일 vs. 화이트삭스 4이닝 무실점 
- MLB 통산 317경기(230선발) 150승 83패 ERA 3.02 
- 1934년 월드시리즈 2승 1패(2완투), 팀 우승(형제 4승) 
- 1934년 세인트루이스 30승 7패, NL MVP 이자 NL 마지막 30승 투수
- 1953년 명예의 전당 입성
- 1974년 7월 17일 사망
- 별명 The Great Man 
디지 딘은 기인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당대는 물론 미국 야구 역사상 가장 특이하고 익살스러우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사고 체계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6세에는 학교에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자퇴했고, 나이를 속여 군대에 하사관으로 들어갔다가 나이가 들통나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그 후 뒤늦게 야구를 배운 딘은 2년간 마이너를 거쳐 1930년에 빅리그에 데뷔했습니다.
야구는 천재급이었고, 특히 당시는 찾기 힘든 90마일대 중,후반 그러니까 155Km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습니다.
 
디지의 기행은 참 다양했습니다.
기자들에게 두 가지 이름과 생년월일을 알려주는가 하면, 호언장담과 이루기 어려운 예상을 하고는 곧잘 그것들을 이뤄 또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1934년 시즌을 앞두고는 한 팀에서 뛰던 동생 폴(별명 대피) 딘과 함께 45승을 거두겠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동생 대피는 형과는 달리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투수로서의 능력은 상당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즌에 데뷔한 루키였습니다.
다 떠나서 형제가 한 팀에서 합작 45승이라니.......
 
그 해 9월 22일 브룩클린 다저스와 더블헤더가 벌어졌는데 1차전에 나선 디지는 8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끌고 가다가 결국 3안타 완봉승을 거뒀습니다. 
이어서 벌어진 2차전에서는 동생 대피가 진짜로 노히트노런을 해버렸습니다. 
그 더블헤더에서 형이 시즌 27승째, 동생은 18승째를 거두며 실제로 형제가 45승을 이뤄냈습니다. 딘 형제는 결국 49승(30승+19승)을 합작해 팀 승리의 절반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더블헤더가 끝난 후 디지 딘은 기자들에게 "대피가 노히트를 할줄 알았으면 나도 노히트를 해버릴 걸 그랬어요!"라며 특유의 익살을 부렸습니다.
 
그해 디지는 30승 7패 ERA 2.66으로 NL MVP를 수상했고, 311.2이닝과 24번의 완투 그리고 리그 최다 199K를 기록했습니다.
그 후로 NL에서 30승 투수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AL에서는 1968년에 데니 맥클레인이 31승 6패를 기록했습니다. + 디지가 사이영상을 못받은 건 당시 아직 그 상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NL 챔피언에 오른 카디널스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 격돌했고, 그야말로 '딘 형제의 힘'으로 우승을 차지합니다.
디지가 1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뒀고, 1승 1패 후 3차전에서는 동생 폴이 완투승으로 카디널스가 2승 1패로 앞섰습니다.
그런데 2승 2패 후 5차전에 등판한 디지가 완투패하면서 타이거즈가 3승 2패로 앞섰습니다. 디지는 전날 4차전에서 대주자로 출전했다가 송구에 머리를 맞아 졸도, 병원으로 급송되기도 했는데, 다음날 선발 등판하는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패전 투수가 됐습니다.
그날 신문의 헤드라인은 'X-레이 촬영 결과 디지는 이상 무!'였답니다.
 
그렇게 카디널스가 궁지에 몰린 가운데 동생 폴이 6차전 완투승으로 3승 3패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최종 7차전, 시리즈 3번째 선발 마운드에 오른 디지는 9이닝 무실점, 완봉승을 거두며 팀 역사상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됐습니다.
 
딘 형제는 도합 5경기 선발로 나서 5번 완투에 각각 2승씩을 거두며 MLB 월드시리즈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형제 활약으로 기록됩니다.
최종 성적은 디지 3경기 2승 1패 ERA 1.73 - 대피 2경기 2승 ERA 1.00 = 딘 형제 5경기 4승 1패 ERA 1.43
디지의 기행을 조금 더 볼까요?
포수 사인을 보기 귀찮다며 상대 감독에게 오늘은 패스트볼만 계속 던지겠다고 통고한 경기에서 4안타 완봉승을 거둔 일도 있습니다.
셋포지션에서 일시 중지 규정을 무시하고 공을 던졌다며 심판이 보크 선언을 하자 8타자 연속 몸에 맞춘 일도 있고, 다음날은 셋 포지션에서 3,4분씩 멈췄다가 공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런걸 상대 팀에서 참아줬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낭만의 시절이었다고 보기에도 기행이 심했습니다.
 
한번은 딘이 조 디마지오의 형 빈스 디마지오를 그날 경기에서 4번 삼진으로 잡겠다고 큰소리친 적도 있습니다. 
첫 세 타석을 진짜 삼진으로 잡은 딘은 네 번째 타석에서 빈스가 포수 파울플라이를 치자 포수에게 '공 떨어뜨려!'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리고 결국 네 번째 삼진을 잡아냈습니다. 요즘 이런 일은 상상하기도 어렵죠? ^^
 
실은 그 당시에도 디지의 기행은 선뜻 납득되기 어려웠던 것도 같습니다.
완투승으로 빅리그에 데뷔한 이후 1931시즌에는 MLB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취재를 해보니 '기량뿐 아니라 겸손한 자세 등 인성에서도 성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구단의 판단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기량 부족은 핑계였을 가능성이 큰 게, 그해 휴스턴 버팔로스에서 디지는 26승, ERA 1.57에 303K를 기록했으니까요. 
 
그러나 1932시즌 18승을 거두는 루키 시즌을 보낸 후 디지는 20승-30승-28승-24승을 거두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닝도 286-293-311.2-325.1-315 이닝으로 엄청난 이닝 이터의 능력도 과시했습니다.
여러모로 괴물 투수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런데 1937년 그의 기록이 확 떨어집니다.
13승 10패에 197.1이닝, 현재의 기준으로는 훌륭하지만 당시 디지의 기준으로는 형편없는(?) 성적이었습니다. 나이도 만 27세였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해 워싱턴D.C.에서 열린 올스타전에 선발 등판한 디지는 강한 타구에 왼발을 맞았습니다. 엄지발가락이 골절되는 큰 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디지와 팀은 완치도 되기 전에 너무 급히 복귀를 결정했고, 그것이 화가 됐습니다. 디지는 발가락 통증을 줄이기 위해 저도 모르게 착지 각도를 바꿨고, 이로 인해 팔에 과부하가 생겨 결국 어깨와 팔의 부상으로 이어졌습니다.
더이상 불같은 강속구를 뿌릴 수 없게 됐고, 부상도 반복됐습니다. 결국 부상 후 4년간 33경기 선발로 16승 8패의 성적을 남기고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빅리그에서 풀타임으로는 딱 6년간 뛰고 150승을 거둔 후 은퇴한 건데, 역사상 두 번째로 적은 승수로 명예의 전당 투수가 됐을 정도로 임팩트는 컸습니다.
은퇴 후 디지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해설자로 역시 독특한 영역을 구가하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지극히 서민적인? 표준어가 아닌 남부 억양에 속어 등도 섞어 쓰면서 대중적이고 인간적인 해설로 인기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47년 은퇴 후 6년만에 다시 빅리그 마운드에?
 
디지는 1947년 시즌 내내 브라운스 투수들에게 '내가 지금 던져도 너희보단 잘 던지겠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분통이 터진 투수들이 어디 진짜 던져보라며 항의하자 딘은 시즌 마지막 경기에 실제로 등판해 4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37세의 나이에 햇수로 7년 만에 오른 마운드가 은퇴전이 됐습니다.
 
1950~60년대에는 광고 모델, TV 쇼 패널, 컬리지 풋볼 해설자로도 활동했고, 텍사스주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골프 토너먼트, 자선 행사 등을 열기도 했습니다. 동화적이고 익살스러운 이미지 덕에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었다고 합니다.
 
1952년에는 딘의 생애를 다룬 '프라이드 오브 세인트루이스'라는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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