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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18> 마운드 위의 전사, 밥 깁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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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밥 깁슨 © MLB.com

밥 깁슨은 가장 위협적인 투수였습니다. 그의 플레이를 본 적이 있다면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공을 오른쪽 엉덩이 뒤로 꽉 쥐고, 모든 타자를 향해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내는 투수였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지는 걸 싫어했습니다. 정말 고집스러운 승부욕을 지닌 남자였죠.
팀 맥카버(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포수)

밥 깁슨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전성기를 보낸 에이스 중 한 명입니다. 깁슨은 1959년 데뷔해 1975년 은퇴할 때까지 17시즌 동안 세인트루이스에서만 뛰면서 통산 251승 174패 3884.1이닝 3117탈삼진 ERA 2.91을 기록했고 올스타 9회, 사이영상 2회, MVP 1회, 골드글러브 9회, 월드시리즈 우승 2회, 월드시리즈 MVP 2회, 다승·탈삼진·ERA 부문 1위를 각각 1회씩 차지했는데요.

 

특히 1968년에는 22승 9패 304.2이닝 268탈삼진 ERA 1.12를 기록하며 라이브 볼 시대 기준 단일 시즌 평균자책점 1위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겼죠. 또한, 깁슨은 MLB 역사상 가장 뛰어난 '빅게임 피처' 중 한 명으로 꼽히는데요. 3번의 포스트시즌에서 9경기에 등판해 7승 2패 81이닝 92탈삼진 ERA 1.89을 기록하며 월드시리즈 MVP에 두 차례 선정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1981년 첫 번째 투표에서 84%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오하마의 운동천재

밥 깁슨 © MLB.com

 

깁슨의 본명은 '팩 로버트 깁슨(Pack Robert Gibson)'으로, 1935년 11월 9일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팩 깁슨과 빅토리아 깁슨 부부의 일곱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깁슨의 이름은 그가 태어나기 3개월 전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요. 그의 어머니 빅토리아는 생계를 위해 세탁소와 청소 업체에서 일했고, 깁슨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오마하 북쪽에 있는 로건-폰 테렐 주택 개발 단지에서 보냈습니다.

 

큰형인 조시는 깁슨보다 15살이 많았고 깁슨의 멘토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로서 그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요. 조시는 집 근처 클레이튼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레크리에이션 센터의 프로그램 책임자로서 평생 지역 사회의 어린 소년들을 위해 헌신했죠. 깁슨은 형이 코치를 맡았던 여러 청소년 농구팀 및 야구팀에서 뛰었고, 야구팀인 Y 모나크스에선 아메리칸 리전 시(City) 대회의 우승을 이끌며 ALL-CITY 팀에 선정됐습니다.

 

깁슨은 오마하 공고 시절 육상부, 농구부, 야구부에서 활약했고, 졸업 후 세인트루이스로부터 계약을 제안받았습니다. 하지만 큰형 조시는 동생이 대학에 가길 원했는데요. 깁슨은 농구 특기생으로 전액 장학금을 보장받고 큰형 조시의 모교인 클레이튼 대학에 입학해 경기당 득점(20.2)과 총 득점(1272)에서 역대 1위를 차지하며 영구결번(45)으로 지정됩니다. 그와 동시에 야구에서도 투타 겸업 선수로서 활약하며 MLB 팀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57년 깁슨은 농구팀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야구팀 세인트루이스와 계약을 맺으며 두 종목을 병행했지만 4개월 후 야구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합니다. 깁슨은 그해 6월 세인트루이스 산하 트리플 A 구단인 오마하 카디널스에 배치됐고, 감독 조니 킨의 요청에 따라 투수에 집중했는데요. 깁슨은 프로 첫해 오하마에서 10경기 ERA 4.29를 기록했고, 이후 콜럼버스 폭시즈(클래스A)로 재배치되어 8경기 ERA 3.77을 기록했습니다.

 

 

인생의 은인을 만나다

밥 깁슨 © MLB.com

 

이듬해인 1958년 깁슨은 세인트루이스 산하 트리플 A 구단 중 하나인 로체스터 레드윙스에 배정됐고 20경기에서 ERA 2.45로 눈에 띄게 발전한 모습을 보였는데요. 그러자 세인트루이스는 그를 오마하로 재배치했는데, 깁슨은 그곳에서도 11경기에서 ERA 3.31으로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킨 감독은 시즌 종료 후 그의 패스트볼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를 바탕으로 깁슨은 1959시즌을 앞두고 메이저리그에 부름을 받을 수 있었죠.

 

깁슨은 1959년 4월 15일, 다저스와 경기에서 빅리그에 데뷔했고 구원 투수로 2이닝 동안 2실점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깁슨은 1년간 세인트루이스, 로체스터, 오마하를 오가며 활약했는데요. 하지만 1960년 6월 세인트루이스에 재콜업된 후에는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깁슨이 빅리그에 자리 잡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원인 중 하나는 당시 세인트루이스의 선수 겸 감독 솔리 헤머스가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헤머스는 깁슨뿐만 아니라 흑인 중견수인 커트 플러드(골드글러브 7회 수상자)의 기용에도 차별적인 모습을 보였는데요. 실제로 그는 두 선수에게 "메이저리그 선수로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다른 일을 해라"라고 말했고, 피츠버그의 흑인 투수 베니 대니얼스와 싸운 후에는 더그아웃에서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쏟아부었습니다. 헤머스가 해고된 1961년 7월 6일은 깁슨을 비롯한 세인트루이스의 흑인 선수들에겐 독립기념일이나 다름없었죠.

 

그리고 헤머스의 후임으로 세인트루이스 산하 트리플 A 팀 오마하의 감독이었던 킨이 부임하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훗날 깁슨은 킨에 대해 "감독님은 뛰어난 감수성과 리더십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부색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야구계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존경할 만한 분이셨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킨이 부임한 후 깁슨은 11승 6패 ERA 3.24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칩니다.

 


첫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

밥 깁슨 © MLB.com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의 제구력 향상과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깁슨은 1962년 15승 13패 233.2이닝 208탈삼진 ERA 2.85를 기록하며 올스타에 선정됐습니다. 그러나 9월 타격 연습 중 발목이 부러지면서 조기에 시즌을 마감했는데요. 그 여파로 깁슨은 이듬해인 1963년 5월 19일까지 단 1승만을 기록하는 부진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 후 부상 여파에서 벗어난 깁슨은 18승 9패 254.2이닝 204탈삼진 ERA 3.39로 1963시즌을 마쳤습니다.

 

​깁슨은 1964년 19승 12패 287.1이닝 245탈삼진 ERA 3.01을 기록하며 세인트루이스의 돌풍을 이끌었는데요. 이해 세인트루이스는 정규 시즌 종료를 2주 앞두고 선두 필라델피아에 6.5경기 차로 뒤처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가 10연패를 기록하는 동안 세인트루이스는 9연승을 질주했고,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메츠를 꺾고 리그 1위를 차지했죠. 깁슨은 그날 메츠와 경기에서 구원 등판해 4이닝을 소화하면서 승리투수가 됐습니다.

 

세인트루이스의 월드시리즈 상대는 뉴욕 양키스였습니다. 깁슨은 2차전에서 8이닝 4실점으로 패했지만, 5차전에서 10이닝 0자책으로 승리했고, 이틀 휴식 후 등판한 7차전에서도 9이닝 5실점으로 승리하면서 세인트루이스에게 1946년 이후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깁니다. 깁슨은 3경기 2승 1패 27이닝 ERA 3.00을 기록했고, 31탈삼진으로 단일 월드시리즈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웠습니다. 당연하게도 월드시리즈 MVP는 깁슨의 몫이었죠.

 

깁슨은 1965년 20승 12패 299.0이닝 270탈삼진 ERA 3.07을 기록했고, 1966년에도 21승 12패 280.1이닝 225탈삼진 ERA 2.45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올스타와 골드글러브에 선정됩니다. 하지만 1964년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킨 감독이 경영진과의 불화로 월드시리즈 직후 사임했고, 레드 쇤디엔스트 신임 감독 체제의 세인트루이스는 1965년 80승 81패(.497)로 리그 7위, 1966년 83승 79패(.512)로 리그 6위에 그치며 어려움을 겪습니다.

 


최고의 빅게임 피처, 그리고 불멸의 기록

밥 깁슨 © MLB.com

 

깁슨은 1967시즌 13승 7패 175.1이닝 147탈삼진 ERA 2.98로 풀타임 첫해였던 1961년 이후 최소 이닝을 소화했습니다. 1967년 7월 15일 피츠버그전에서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정강이에 맞아 다리가 골절되면서 두 달 가까이 결장했기 때문었는데요. 놀라운 점은 다리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교체되기 전까지 세 명의 타자를 더 상대했다는 겁니다. 이 사건으로 깁슨은 투쟁심이 강한 선수라는 인식이 굳어졌죠.

 

에이스 밥 깁슨이 부상으로 두 달가량 결장했음에도 세인트루이스는 강타자 올랜도 세페다의 합류와 스티브 칼튼을 비롯한 젊은 투수들의 성장에 힘입어 1967시즌 101승 60패(.627)로 리그 1위를 차지했습니다. 깁슨은 9월 7일에 복귀해 정규 시즌 마지막 5경기에서 3승 1패 ERA 0.96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는데요. 그리고 이해 월드시리즈에서 활약을 통해 깁슨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빅게임 피처'라는 명성을 얻게 됩니다.

깁슨은 1967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9이닝 1실점 완투승, 4차전에서 9이닝 무실점 완봉승, 7차전에서 9이닝 2실점 완투승으로 3경기 합계 3승 27이닝 26탈삼진 ERA 1.00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타자로서도 7차전에서 4회 3-0으로 앞서 나가는 솔로 홈런을 터뜨리기도 했는데요. 깁슨의 활약에 힘입어 세인트루이스는 창단 8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그는 통산 두 번째로 월드시리즈 MVP에 선정됐습니다.

 

그리고 1968년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불멸의 기록을 남깁니다. 이해 깁슨은 22승 9패 304.2이닝 268탈삼진 ERA 1.12를 기록했는데, 이는 라이브 볼 시대 기준 단일 시즌 최저 평균자책점 기록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깁슨은 커리어 첫 사이 영 상과 NL MVP를 동시에 석권합니다. 또한 월드시리즈에서도 1차전 9이닝 무실점 17탈삼진 완봉승, 4차전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기록했으나, 7차전에서 9이닝 4실점으로 패하며 2연속 우승에는 실패합니다.

 

 

규칙 변화에도 유지된 전성기
밥 깁슨 © MLB.com

 

1968년 깁슨의 압도적인 활약은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투구 관련 규칙을 변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메이저리그는 이듬해인 1969년부터 마운드의 높이를 15인치(38.1cm)에서 현행 10인치(25.4cm)로 낮췄고, 스트라이크 존의 상한선도 타자의 겨드랑이에서 유니폼 글자까지로 조정했습니다. 이러한 규칙 변경을 가리켜 일명 '깁슨 룰(Gibson rules)'이라고 하는데, 당연하게도 이는 공격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조치였죠.

 

투수에게 불리한 규칙 변화에도 불구하고 깁슨은 1969년 20승 13패 314이닝 269탈삼진 ERA 2.18을 기록하는 최고의 활약을 펼칩니다. 그리고 1970년 23승 7패 294이닝 274탈삼진 ERA 3.12로 다승왕을 차지하면서 커리어 두 번째 NL 사이 영 상을 수상합니다. 하지만 소속팀 세인트루이스의 성적은 1968년 이후 내리막길을 걷는데요. 세인트루이스는 1969년 87승 75패(.537), 1970년 76승 86패(.469)로 2년 연속 지구 4위에 그쳤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깁슨은 1971년 16승 13패 245.2이닝 185탈삼진 ERA 3.04를 기록하며 분전했고, 두 가지 이정표를 달성했습니다. 깁슨은 우선 8월 4일 샌프란시스코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통산 200승 고지를 밟았고, 열흘 후에는 피츠버그를 상대로 커리어 유일한 노히터를 작성했습니다. 깁슨은 1973년에도 19승 11패 278이닝 208탈삼진 ERA 2.46으로 커리어 9번째 200탈삼진 달성과 함께 올스타에 선정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웁니다. 

 

깁슨은 7월까지 11승 10패 187이닝 139탈삼진 ERA 2.84를 기록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8월 4일 메츠전에서 주루 중 무릎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는데요. 에이스가 두 달간 결장하는 악재 속에 세인트루이스는 1.5경기 차이로 메츠에게 지구 1위를 내줬습니다. 다행히 깁슨은 9월 29일 복귀해 6이닝 1실점을 기록하며 12승으로 시즌을 마칩니다. 그러나 37세 시즌에 입은 무릎 부상은 그 이후로도 그의 커리어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칩니다.

 


플레이 스타일

밥 깁슨 © MLB.com

 

깁슨은 전성기 시절 폭발적인 강속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앞세워 상대를 압도하는 투수였는데요. 깁슨은 파이어볼러치곤 로우-스리쿼터로 팔각도가 낮은 편이었고, 공을 던질 때마다 1루로 넘어질 것 같은 역동적인 투구폼을 구사했죠. 이러한 팔각도와 투구폼은 깁슨의 주무기인 슬라이더의 위력을 배가시켰습니다. 실제로 깁슨(우완)의 슬라이더는 스티브 칼튼(좌완)의 슬라이더와 함께 '역대 최고의 슬라이더'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또한, 마운드 위의 깁슨은 강력한 구위뿐만 아니라 불타는 승부욕으로 무장한 전사이기도 했는데요. 그는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기 위해 타자에게 위협구를 던지는 투수로도 악명을 떨쳤습니다. 악명과는 달리 깁슨은 한 시즌을 제외하면 사구 부문에서 3위 안에 든 적이 없는데요. 하지만 이러한 악명은 깁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죠. 위협구를 던지지 않아도, 그를 경계한 타자들이 알아서 타석에서 물러섰기 때문입니다.

 

한편, 깁슨은 역동적인 투구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제구력과 최고 수준의 수비력을 지닌 투수였습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9년 연속 NL 투수 부문 골드글러브에 선정됐는데, 그보다 더 많은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투수는 그렉 매덕스(18회)와 짐 카트(16회) 뿐입니다. 또한, 역사상 가장 타격을 잘하는 투수 중 한 명이기도 했죠. 깁슨은 통산 타율 0.206 24홈런 144타점 13도루를 기록했고, 월드시리즈에서도 2개의 홈런을 쏘아 올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역대 최고 수준의 운동 능력을 갖춘 선수였기 때문에 가능했죠. 하지만 1973시즌에 당한 무릎 부상의 여파로 운동 능력을 잃은 깁슨은 더 이상 압도적인 투구 스타일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깁슨은 1974년 무릎이 계속 부어오르는 증상을 겪으면서 11승 13패 240이닝 129탈삼진 ERA 3.83으로 풀타임 첫해였던 1961시즌 이후 가장 높은 평균자책점과 함께 처음으로 5할 미만의 승률에 머물렀습니다.

 


커리어 말년과 은퇴 후의 삶

밥 깁슨 © MLB.com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깁슨은 1974년 7월 17일 신시내티와 경기에서 4회 초 세자르 제로니모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월터 존슨에 이어 메이저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통산 3,000탈삼진을 달성한 투수가 됩니다. 그리고 1975년 1월 시즌 종료 후 은퇴를 하겠다고 밝힌 깁슨은 마지막 시즌 22경기에서 3승 10패 109이닝 60탈삼진 ERA 5.04를 기록했습니다. 세인트루이스는 9월 깁슨의 등번호 45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은퇴 후 고향인 오하마로 돌아온 깁슨은 지역 은행인 <커뮤니티 내셔널 뱅크>의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고, 모교인 클레이튼 대학 근처에 레스토랑을 여는 등 다양한 사업을 했지만, 1981년 과거 팀 동료였던 조 토레의 코치 제안을 수락하며 야구계에 복귀해 메츠와 애틀랜타의 투수 코치를 맡았습니다. 이후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세인트루이스의 라디오 해설가로 일했고, 1995년 잠시 세인트루이스에서 투수 코치를 맡기도 했습니다.

 

깁슨은 1981년 첫 번째 투표에서 84%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2020년 <디 애슬레틱>이 선정한 메이저리그 레전드 TOP 100에서 45위로 선정됐습니다. 깁슨은 2020년 10월 2일 향년 8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은 췌장암이었습니다. 세인트루이스는 이듬해인 8월 22일 '밥 깁슨 데이'를 개최하며 유니폼에 '45번' 기념 패치를 달고 깁슨을 기렸고, 경기 전 추모식에는 과거 팀 동료들과 그의 가족들이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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