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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17> 역대 최고의 포수, 요기 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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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요기 베라 Ⓒ MLB.com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
ㅡ 요기 베라

요기 베라는 양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입니다. '요기 베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우승'일 겁니다. 베라는 선수로서 14번 월드시리즈에 올라 10번의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는 MLB 역사상 그 누구보다 많은 기록입니다. 실제로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는 그가 안방을 지킨 시기와 정확히 겹치는데요. 감독이나 코치 시절을 포함할 경우 베라의 우승 횟수는 13번으로 늘어납니다.

 

한편, 베라는 우승 횟수를 떠나 개인 성적만 놓고 보더라도 최고의 포수였죠. 베라는 1946년 빅리그에 데뷔해 1965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19시즌 동안 2120경기 2150안타 358홈런 1430타점 타율 0.285 OPS 0.830을 기록했고 올스타에 18번, MVP에 3번 선정됐는데요. 메이저리그 역사상 MVP 3회 이상 수상한 선수는 12명뿐입니다. 또한, 베라는 '요기즘(Yogiism)'으로 불리는 화려한 언변으로도 많은 야구팬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인트루이스의 작고 땅딸막한 야구소년

요기 베라 Ⓒ MLB.com

 

베라의 본명은 '로렌조 피에트로 베라(Lorenzo Pietro Berra)'로 1925년 5월 12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더 힐이라는 지역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부부인 피에트로와 파울리나 사이의 다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베라의 부모님은 어린 시절 그를 '로디(Lawdie)'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요. 베라는 엘리자베스 애비뉴에서 자랐는데 길 건너편에는 어린 시절 친구이자 훗날 라이벌이 되는 조 가라지올라가 살았습니다.

 

두 소년은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동네 친구들과 함께 여러 놀이를 하면서 보냈는데요. 당연하게도 두 소년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야구였습니다. 하지만 스포츠 외에도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그들은 머리에 터번을 쓴 요기(요가 수행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 뱀을 부리는 영화를 봤습니다. 친구 중 한 명이 베라가 요기를 닮았다고 농담을 했고, 그때부터 베라의 별명은 로디가 아닌 '요기(Yogi)'가 됐죠.

 

베라는 세인트루이스 남부에 있는 사우트사이드 가톨릭(현 세인트메리 고교)에 다녔지만 가정에 경제적인 보탬이 되고자 8학년을 마치고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족들은 이를 반대했으나 그의 결심을 꺾을 순 없었고 결국 베라는 석탄 창고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과 야구를 하기 위해 일찍 조퇴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됐고 이는 다음 직장(음료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무렵 베라와 그의 친구인 가라지올라는 아메리칸 리전 베이스볼(American Legion Baseball, 미국과 캐나다의 50개 주에서 13~19세의 선수들이 참여하는 아마추어 리그)의 스타였는데요. 하지만 가라지올라는 6피트(183cm)의 건장한 체격에 뛰어난 운동신경과 잘생긴 외모를 갖춘 선수였던 반면, 베라는 5피트 7인치(170cm)의 작고 땅딸막한 체형에 홈 플레이트 근처로 오는 거의 모든 공에 스윙을 하는 선수였습니다.

 


인생의 은인을 만나다

빌 디키(왼쪽)와 요기 베라(오른쪽) Ⓒ MLB.com

 

1942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시범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가라지올라는 500달러의 계약금과 함께 영입을 제안받았는데요. 베라도 영입을 제안받았지만 계약금은 없었습니다. 그는 제안을 거절한 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봤지만 다시 한번 계약금 없는 영입 제안을 받습니다. 베라가 또 제안을 거절하자, 그의 은사였던 레오 브라운은 양키스에서 일하는 옛 친구인 조지 바이스에게 연락을 취합니다.

 

브라운은 바이스에게 "베라가 원하는 것은 계약금(500달러) 뿐이며 월급은 얼마를 주든 괜찮을 것"이라고 귀띔했는데요. 브라운의 도움으로 베라는 1942년 10월, 계약금 500달러와 월급 90달러에 양키스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3년 그는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양키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인 노포크 타스에서 데뷔 시즌 111경기에서 타율 0.253 7홈런 56타점을 기록하며 프로야구 선수로서 첫 발을 내디뎠죠.

 

프로야구 첫 시즌을 보낸 후 베라는 미국 해군에 입대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해안 바로 앞에 배치된 로켓 보트에서 독일군 방어선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그는 퍼플 하트 훈장을 받았습니다. 드라군 작전 이후 튀니지로 파견됐었던 베라는 1945년 1월 미국으로 돌아와 뉴런던 해군 잠수함 기지에 주둔했는데요. 그곳에서 베라는 기지 내의 준-프로야구 팀에서 뛰었고 1946년 5월 명예 제대합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베라는 양키스 산하 트리플 A 구단인 뉴어크 베어스에서 뛰었고,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으로 조지 셀커크 감독을 놀라게 만들었는데요. 이 시기 그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빌 디키에게 멘토링을 받으면서 기량이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베라는 디키를 따라 등번호를 8번으로 정했고, 훗날 인터뷰에서 "제가 야구에서 이룬 모든 업적은 디키 덕분입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투수들의 신뢰를 얻다

요기 베라 Ⓒ MLB.com

베라는 1946년 9월 22일 양키스에 콜업된 후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7경기에서 타율 0.364 2홈런 4타점 OPS 1.073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듬해인 1947년 스프링 캠프에서 베라는 주로 우익수로 기용됐지만, 불안한 외야 수비로 인해 시즌 중에는 포수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83경기에서 타율 0.280 11홈런 54타점 OPS 0.775를 기록했습니다. 이해 양키스는 브루클린 다저스를 꺾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1948년 베라는 타율 0.305 14홈런 98타점을 기록하며 주전으로 발돋움했지만, 정규 시즌 3위에 그친 양키스는 시즌 종료 후 그보다 더 수비가 뛰어난 포수를 찾기 위해 시장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전설적인 명장 케이시 스텡겔 감독이 부임하자 상황이 달라졌는데요. 케이시는 베라를 '나의 부감독(My assistant manager)'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꼈고, 그를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사람들로부터 지켜주는 방파제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또한, 뉴어크 베어스 시절 베라와 인연이 있었던 디키를 그의 개인 코치로 임명했죠. 디키는 매일 수 시간 동안 베라와 함께하면서 포수로서 홈 플레이트 뒤에서 움직임을 개선하고, 경기 중에 미리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는데요. 이 과정을 통해 베라는 수비에서 눈부신 향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베라는 빅 라스키와 앨리 레이놀즈 등 팀 선배인 투수들과 볼 배합을 놓고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투수들은 베라가 패스트볼 위주로 볼 배합을 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또한, 중요한 상황마다 스텡겔 감독이 더그아웃에서 그를 통해 볼 배합을 지시하는 것도 베테랑 투수들을 화나게 만들었죠. 하지만 어느 날 베라는 벌금을 물게 될 위험을 무릅쓰고 스텡겔 감독이 낸 사인을 무시하면서까지 투수들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이 사건은 투수들과의 관계에서 전환점이 됐는데요. 투수진이 베라를 신뢰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시작된 전성기

요기 베라 Ⓒ MLB.com

1949년 베라는 타율 0.277 20홈런 91타점 OPS 0.802를 기록하면서 양키스의 정규 시즌 1위에 기여했고,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063(16타수 1안타)으로 타격 성적은 부진했지만 투수진과 함께 다저스 타선을 경기당 2.8득점으로 틀어막으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0년 베라는 타율 0.322 28홈런 124타점 OPS 0.915로 MVP 투표 3위에 오르면서 아메리칸리그의 떠오르는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베라는 1951년 타율 0.294 27홈런 88타점 OPS 0.842로 생애 첫 MVP를 차지했고, 1952년 타율 0.273 30홈런 98타점 OPS 0.835로 커리어 첫 30홈런을 돌파했는데요. 그리고 이듬해에는 타율 0.296 27홈런 108타점 OPS 0.886으로 MVP 투표 2위에 이름을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베라의 전성기와 함께 양키스도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월드시리즈 5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죠.

 

​그러던 중, 1954년 양키스는 정규 시즌 103승 51패(0.669)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111승 43패(0.721)를 기록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현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에게 리그 1위를 내주면서 월드시리즈 연속 우승 기록이 마감됩니다. 하지만 베라의 개인 기량이 정점에 오른 것은 바로 이 무렵부터였는데요. 베라는 1954년 타율 0.307 22홈런 125타점 OPS 0.855를 기록하면서 1951시즌에 이어 커리어 두 번째 MVP를 차지했습니다.

 

한편, 1955년에는 타율 0.272 27홈런 108타점 OPS 0.819로 2년 연속이자 세 번째 MVP를 수상했죠. 그의 활약에 힘입어 양키스도 97승 57패(0.630)로 리그 1위를 탈환했으나,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양키스가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되찾은 것은 이듬해였던 1956년. 이해 베라는 3연속 MVP 수상엔 실패했지만 자신의 커리어를 통틀어 최고의 시즌을 보냅니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월드시리즈에서 돈 라슨과 퍼펙트게임을 합작한 요기 베라 Ⓒ MLB.com

 

베라는 1956년 타율 0.298 30홈런 105타점 OPS 0.911을 기록했지만 MVP 투표에선 팀 동료인 미키 맨틀에게 밀려 2위에 그칩니다. 그러나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360 3홈런 10타점 OPS 1.248로 맹활약을 펼치며 양키스의 우승을 이끌었는데요. 특히 7차전에서 다저스의 에이스 돈 뉴컴을 상대로 친 홈런 2방은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5차전에서는 돈 라슨과 호흡을 맞추며 MLB 역사상 유일한 '월드시리즈 퍼펙트게임'을 달성했죠.

 

이듬해인 1957년, 32세의 베라는 타율 0.251 24홈런 82타점 OPS 0.767로 타격 성적이 소폭 하락했지만 여전히 높은 타격 생산성을 보였습니다. 1958년에도 타율 0.266 22홈런 90타점 OPS 0.790으로 비슷한 생산력을 유지했는데요. 이 두 시즌 동안 양키스(1958년)와 밀워키 브레이브스(1957년)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각각 한 차례씩 나눠 가졌습니다. 그리고 1959년 베라는 포수로서 통산 300홈런이라는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깁니다.

 

하지만 35세가 된 베라의 무릎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는데요. 베라는 1960년 타율 0.276 15홈런 62타점 OPS 0.792를 기록했지만 120경기 중 63경기에서만 포수로 나섰고, 외야수로 나서는 빈도가 늘어납니다. 실제로 1961년에 포수로 출장한 경기는 119경기 중 15경기에 불과했죠. 그럼에도 그는 정규시즌 타율 0.271 22홈런 61타점 OPS 0.795를 기록했고,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273 1홈런 3타점 OPS 1.045로 또 한번 양키스의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베라는 1962년 타율 0.224 10홈런 35타점 OPS 0.685로 데뷔 후 최악의 성적을 거뒀지만 커리어 18번째 올스타에 선정됐고, 양키스는 자이언츠를 꺾고 월드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이는 그의 선수 커리어 10번째이자 마지막 우승이었죠. 이때 베라는 월드시리즈 7경기 중 2경기에 출전해 2타수 무안타에 그쳤고, 1963년 선수 겸 코치로 타율 0.293 8홈런 28타점 OPS 0.856을 기록한 후 현역에서 은퇴했습니다.

 


플레이 스타일

랄프 하우크 감독(가운데), 조 디마지오(오른쪽)과 요기 베라(왼쪽) Ⓒ MLB.com

 

베라는 타자로서 스트라이크 존의 모든 영역뿐만 아니라 스트라이크 존 바깥의 공을 쳐서도 안타를 만들 만큼 넓은 영역의 공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났는데요. 여기에 삼진보다 홈런을 많이 친 시즌이 5번이나 있을 정도로 수준급의 배트 컨트롤을 자랑했습니다(일례로 1950년에는 597타석에서 28홈런을 치는 동안 삼진은 12개밖에 당하지 않았죠). 그리고 이러한 능력들 덕분에 베라는 손꼽히는 '클러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베라는 조 디마지오와 미키 맨틀 같은 슈퍼스타들이 즐비했던 양키스에서 1949년부터 1955년까지 팀 내 타점 1위를 기록했고, 월드시리즈에서도 통산 39타점을 기록했습니다. 라이벌 팀의 감독이었던 폴 리차즈는 이런 그를 "마지막 3이닝 동안 리그에서 가장 강한 선수"라고 회고했는데요. 한편, 포수로서 베라는 홈 플레이트 뒤편에서 기민한 움직임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투수들을 잘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베라는 풋아웃 1위를 8번, 어시스트 1위를 3번, 더블플레이 1위를 6번 기록했고 특히 1958년에는 550번의 기회에서 실책을 저지르지 않으며 수비율 100%를 달성하기도 했는데요. 그는 글러브 바깥으로 손가락 하나를 빼고 포구한 최초의 포수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수비에 대해 팀 동료 톰 스터디번트는 "베라와 호흡을 맞추는 것은 투수들에게 자신감을 준다. 그보다 타자를 더 잘 요리할 수 있는 포수는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한편, 베라는 해학적이면서도 촌철살인의 명언으로도 유명했는데 이를 가리켜 '요기즘(Yogi-isms)'이라고 불렀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 it's over)"라는 말이 대표적인데요. 메츠의 감독이었던 베라는 1973년 NL 동부지구 선두 컵스에 9.5경기 차이로 뒤처져 있을 때, 한 기자의 "사실상 시즌이 끝난 게 아니냐?"는 질문에 위와 같이 답했고 이해 메츠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감독 및 코치 커리어

뉴욕 메츠 코치 시절 요기 베라 Ⓒ MLB.com

베라는 1963년 월드시리즈 이후 현역에서 은퇴하자마자 단장으로 보직을 옮긴 랄프 하우크 감독을 대체할 신임 감독으로 임명됐는데요. 그러나 당시 양키스의 클럽 하우스는 통제 불능에 가까운 수준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하모니카 사건'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 시기였죠. 1964년 8월 중순 화이트삭스에게 4연패를 당한 후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내야수 필 린츠가 하모니카를 연주하자 베라는 그에게 멈추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버스 반대편에 앉은 린츠는 베라가 한 말을 들을 수 없었고, 린츠의 옆에 앉은 맨틀은 그에게 "더 크게 연주하라고 하셨어"라고 말했는데요. 린츠가 그렇게 하자 화가 난 베라는 그가 손에 든 하모니카를 내리쳤습니다. 양키스가 9월 들어 반등에 성공하면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을 때 이 사건은 잊히는 듯했지만 팀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고, 그 후 베라는 감독에서 해고됐습니다.

 

양키스 감독에서 1년 만에 경질된 베라는 1965년 뉴욕 메츠와 코치로 계약했고, 시즌 초반에는 포수로 4경기에 깜짝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베라는 이후 7시즌 동안 메츠의 코치로 일하면서 1969년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는데요. 그리고 1972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길 호지스 감독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메츠의 감독이 됐고 1975년 8월 해고되기 전까지 298승 302패(0.497)를 기록했습니다.

 

1976년 코치로 양키스에 복귀한 베라는 팀의 1977-1978년 월드시리즈 2연패를 함께 했고 1984시즌 시작 전 2년 임기를 보장받고 양키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습니다. 하지만 참을성 없는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1985시즌 16번째 경기 만에 그를 경질했고 이로 인해 스타인브레너와 베라 사이에 갈등이 생겼는데요. 이후 베라는 3년간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벤치 코치를 맡았고 1989시즌 종료 후 공식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은퇴 이후의 삶

요기 베라 Ⓒ MLB 명예의전당

 

베라는 1972년 두 번째 투표에서 85.6%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는데요. 같은 해 그의 등번호 8번은 양키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됐습니다. 이는 베라와 그의 스승이자 등번호가 같았던 빌 디키를 공동으로 기리는 의미였죠. 그리고 1988년 8월 22일 양키스타디움의 모뉴먼트 파크에 베라의 기념패가 걸렸지만, 앞선 1985년 감독 경질 건으로 인해 스타인브레너 구단주와 갈등이 있었던 베라는 기념식에 참가하지 않았죠.

 

그러나 1999년 스타인브레너가 뉴저지에 있는 베라의 집을 방문해 약속을 어기고 감독에서 해고한 것에 대해 직접 사과하면서 베라는 15년간 이어졌던 양키스 구단과의 소원했던 관계를 풀었습니다. 같은 해 7월 18일, 베라는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요기 베라의 날'에 참여해 1956년 월드시리즈 퍼펙트게임을 함께한 돈 라슨의 시구를 받았는데요. 그날, 양키스의 선발 데이비드 콘은 MLB 역사상 16번째로 퍼펙트게임을 달성합니다.

 

베라는 2015년 9월 22일, 뉴저지주 웨스트콜드웰에 있는 자택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라를 기리기 위해 양키스는 유니폼에 등번호 8번 패치를 추가했고, 뉴욕시는 추모의 의미로 하루 동안 시내의 모든 국기를 반기로 내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조명을 양키스를 상징하는 핀 스트라이프(파란색과 흰색으로 된 수직 줄무늬)로 바꿨습니다.

 

요기 베라 Ⓒ MLB 명예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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