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 연재] 민훈기의 필드노트 : 불같은 강속구의 불같은 승부사 밥 깁슨 EP.16

조회 239

연재

밥 깁슨(Bob Gibson)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은 무서운 강속구와 특히 몸쪽 위협구입니다.
요즘과는 다른 야구를 하던 시대에 가장 위협적인 투수로 군림하면서 동시에 동료들과 야구계에서 가장 존중을 받았던 투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깁슨의 17년 커리어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해는 MLB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를 일으킨 1968년 시즌이었습니다.
그 해에 깁슨은 34경기에 선발로 나서 22승 9패에 평균자책점 1.12를 기록했습니다.
304.2이닝을 던졌으니 경기당 평균 이닝이 거의 9회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완투 경기만 28번이었고, 10이닝 한 번, 11이닝 두 번, 12이닝 한 번 등 연장전도 5번이 나 완투했습니다. 5월 17일 필라델피아 원정에서는 10회 투아웃에 끝내기 안타를 맞고 0-1로 패하기도 했습니다.


어깨를 만들어가는 시즌 초반 2경기에서만 7이닝씩을 던졌을 뿐이고, 8이닝 경기가 6번 그리고 나머지 26경기는 모두 9이닝 이상을 던졌습니다.


그 엄청났던 시즌을 조금 더 살펴볼까요?
깁슨은 1968시즌에 268개의 탈삼진을 잡고, 62개의 볼넷을 내줬습니다. 9이닝당 피안타는 5.8개에 불과했고, WHIP는 0.85였습니다. 그 시즌 WAR이 11.2로 생애 최고였습니다.
그의 시대 이후에 투수 WAR 11 이상 시즌을 기록한 투수는 딱 한 명이 나왔는데 1985년 뉴욕 메츠의 드와이트 구든이 WAR 12.2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1968년은 1900년대 초반 데드볼 시대 이후에 투수가 가장 득세한 시즌이었습니다.
단연코 ‘투수의 해(The Year of the Pitcher)’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데, AL과 NL의 평균득점이 3.41점과 3.43점으로 역대 최저수준이었고, AL 평균타율은 2할3푼이었 습니다. AL 타격왕은 보스턴의 칼 야스트렘스키였는데, 역대 최저인 3할1리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결국 MLB는 이 시즌 후에 마운드의 높이를 15인치에서 현재의 10인치로 낮췄고, 스트라이크존도 원래 ‘무릎 위~겨드랑이’였던 것을 현재의 ‘무릎 위~가슴 아래’로 좁혔습니다.


그렇다해도 깁슨의 시즌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저런 규정 변화가 깁슨 때문이었다라는 진심 담긴 농담도 돌 정도였습니다.
그는 ERA, WAR, 13완봉승, 탈삼진, WHIP, 9이닝당 최소 안타 등에서 모두 리그 1 위였습니다.
NL 사이영상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리그 MVP에도 선정됐고, 올스타에 뽑히고 골드 글러브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팀을 이끌고 월드시리즈(WS)에도 진출했지만 디트로이트에 막혀 개인 세 번째 WS 반지를 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깁슨의 WS 초강세는 그해에도 이어졌습니다. 깁슨은 1차전에서 삼진 17개 를 뺏으며 완봉승을 거뒀고, 4차전에서는 9이닝 1실점으로 완투승을 거둡니다. 그라나 마지막 7차전에 다시 마운드에 오른 깁슨은 9이닝 4실점 완투패를 하며 패 전 투수가 됩니다. 그런데 1차전 17K와 시리즈 38K WS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1964년과 1967년 두 번의 WS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깁슨의 통산 WS 성적 을 보면 9경기에 나서 7승 2패 ERA가 1.89였습니다. 8경기가 완투였고, 완봉승은 2번했습니다.


제가 1990년대 중반부터 10년 넘게 MLB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많은 현지 기자와 팀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그 당시까지도 투수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 중에 하나는 깁슨이었습니다. 좌완 샌디 코팩스와 함께.
그만큼 그는 신화적인 투수로 추앙받았는데, 참 대단한 성적과 기록만큼이나 깁슨 이 자주 언급된 이유는 그의 무서운 승부욕과 과감한 몸쪽 승부 + 폭발적인 위협구 (빈볼)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승부욕은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 쌓였다고 그를 아는 이들은 말하곤 했답니다.
깁슨은 어려서 뛰어난 운동 신경에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몹시 힘들게 성장 했습니다. 1935년 11월 9일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난 깁슨은 태어나기 3개 월 전에 아버지가 사망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을 따 팩 깁슨이 그의 본명이었습니다.
특히 야구와 농구 등에 아주 뛰어난 능력을 타고나기는 했지만 깁슨은 어려서부터 비타민D 부족으로 인한 골연화증, 천식, 폐렴, 심장 박동이상 등 각종 질환에 시달 렸습니다. 그러나 불굴의 투지를 키우며 고난을 모두 이겨낸 그는 고교 시절 농구와 야구 스타로 각광을 받았고, 클레이턴 대학의 농구 장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깁슨은 18세 되던 1957년 팩이란 이름을 로버트(Bob은 Robert의 애칭)로 바꿨고, 대학 대신 4000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입단했습니다.


1962년 208개의 탈삼진을 시작으로 9시즌이나 200개 이상의 삼진을 잡았고, 통산 3117개의 탈삼진으로 역대 16위에 올랐습니다.(은퇴 당시는 3위) 20승 이상 시즌도 5번이나 됩니다.


1971년 8월14일 피츠버그 쓰리 리버스 스타디움에서 노히트 노런도 기록한 깁슨은 MLB 사상 월터 존슨에 이어 두 번째, NL 투수로는 최초로 3000 탈삼진을 돌파한 투수였습니다. 1974년 7월17일 신시내티의 세자르 헤로니모를 상대로 3000개째 삼진을 잡아냈습니다.(헤로니모는 1980년 놀란 라이언의 3000번째 탈삼진 기록의 희 생양으로 또 다른 기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깁슨은 또한 역사상 가장 뛰어난 타력을 과시한 투수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통산 타율이 2할6리에 홈런을 24개나 쳤습니다.(WS에서 2개를 추가) 타점도 144 개나 됩니다. 한마디로 운동 능력이 역대급이었지요.
2차 대전 이후에 2할이 넘는 타율에 20홈런 이상, 100타점을 넘긴 투수는 깁슨 외 에 딱 한 명, 봅 레몬이 있었을 뿐입니다.(이러니 오타니는.....)


수상 경력도 화려합니다.
1968년 리그 MVP에 뽑힌 것을 비롯해 WS MVP 두 번, 올스타 7번, 1965년부터 9 년 연속 골드글러브, 두 번의 사이영상을 수상했습니다.
1968년 기록한 1.12의 평균자책점은 ‘라이브 볼 시대(Live Ball Era:1920년대부터 현대 야구까지)’ 최고의 기록입니다. 그해 중반 깁슨은 92이닝 동안 단 2자책점만 기록하기도 했으니, 그 기간 ERA는 반올림해서 0.20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와 시카고 커브스 감독을 지낸 더스티 베이커가 초년병일 때 팀 선배 인 홈런왕 행크 애런이 상대 선발 깁슨에 대한 조언을 한 적이 있다지요, 애런은 베이커에게

“너무 타석에 바짝 들어서지 마라. 그랬다가는 땅바닥에 나뒹굴게 될 테니까. 그를 노려보지도 마, 아주 싫어하니까. 만약 깁슨을 상대로 홈런을 치게 되면 너무 느리게 뛰지도 말고, 너무 빠르게 뛰지도 마. 축하할 일이 있으면 덕아웃 뒤쪽의 복도에서나 하고. 그리고 만약 몸에 공을 맞으면 마운드로 뛰쳐나갈 생각은 아예 말게. 그는 골드글러브 복서니까.”

바로 그날 베이커의 17게임 연속 안타 행진이 중단됐습니다.


깁슨의 이런 불같은 투지와 타자의 몸쪽에 대한 공략은 물론 당시 야구의 추세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당시는 야구의 불문율이 훨씬 강했고, 상대에 대한 예우를 지키는 건 엄격했습니다. 요즘 우리 같은 배트 플립, 소위 빠던을 비슷하게라도 했다가는 곧바로 다음 타석에 머리쪽으로 공이 날아들었을테니 타자들은 그런 꿈도 못꾸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위협구도 경기의 일부였고, 무엇보다 그런 문화가 용인되던 시절이기도 했 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타자가 몸에 맞으면, 조금이라도 고의성이 있으면 무조건 상대 중심 타자를 맞추는 것이 우리 선수와 팀의 자존심을 세우던 시절입니다. 그렇게 맞으면 타자도 맞나보다 하던 시절 ^^


그중에도 깁슨이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당대에 보기 드문 최고 158Km의 엄청난 강속구를 던졌고, 꼭 위협구가 아니더라도 타자와의 주도권싸 움을 위해 몸쪽 승부를 어떤 투수보다 자주 걸었습니다.
마운드에서는 완전 포커페이스에 미소를 본 사람이 없으며, 승부욕이 얼마나 강한 지 등판일에는 동료들도 그의 근처에 가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투사였습니다.



전 양키즈 감독이자 깁슨의 동료이던 조 토리는 - ‘타자의 눈에서 공포를 본 적이 있다면, 그건 깁슨이 마운드에 있을 때였다.’
660홈런 타자 윌리 메이스는 - ‘깁슨이 몸쪽으로 던질 건 누구나 알았지만, 얼마나 안쪽으로 던질지는 아무도 몰랐지.’
586홈런의 프랭크 로빈슨은 - ‘깁슨은 네가 누구든 신경 안 써. 명예의 전당급이든 신인이든 MVP든, 그냥 자신이 꺾어야 할 또 한 명의 타자일 뿐이야.’


1967년 깁슨은 통산 4256안타의 피트 로즈가 자신을 도발한 뒤 타석에서 홈런을 치고 천천히 베이스를 돌자, 다음 타석에서 로즈의 머리 뒤쪽으로 위협구를 던졌습 니다. 경기 후 깁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친구 사귀러 여기 온게 아니야. 오직 승리하려고 온 거지.’

그렇다고 깁슨이 무분별하게 타자를 많이 맞춘 것은 아닙니다.
그의 깊은 몸쪽 승부에 운동장에 나뒹군 타자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통산 몸에 맞 는 공은 102개로 시즌 평균 6개였습니다. 무시무시한 몸쪽 승부의 화신이었을 뿐입 니다. 물론 홈런을 맞고 심기기 불편했을 때는 조금 달랐지만 말입니다. ^^


얼마전 소개한 레지 잭슨과의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는 깁슨에 대해 ‘난 깁슨 상대로 타석에서 바짝 붙을 수가 없었지. 그는 곧 너를 바닥에 자빠뜨릴 테니까. 심지어 자기 할머니라도 티석에 사면 절대 사정 안 봐줬 을 투수였어.”


두 선수가 1992년 샌디에이고의 잭머피 스타디움에서는 올스타전 전야제 성격으로 ’올드 타이머 게임‘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레지 잭슨이 깁슨의 공을 때려 홈런을 쳤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 1993년 올드 타이머 경기에서 잭슨을 다시 만난 깁슨은 주저하지 않고 잭슨의 몸쪽으로 공을 뿌렸습 니다. 전년도 홈런 치고 느릿느릿 운동장을 돌은 것에 대한 보복이었답니다. 당시 깁슨이 57세, 잭슨은 47세였습니다.


1981년 깁슨은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됐고, 카디널스는 그의 배번 45번을 영구 은퇴 번호로 지정했습니다. 스포팅뉴스에서 뽑은 역대 100대 선수 중에 31위에 오른 깁 슨은 폭스스포츠에 뽑은 ‘가장 두려움을 주는 투수’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깁슨은 2020년 암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 고향 오마하에 묻혔습니다.

이 게시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