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 연재] 민훈기의 필드노트 : 루키 50홈런 포기한 거포 마크 맥과이어 EP.15

조회 248

연재

1987년 우타자 신인 거포 마크 맥과이어(Mark McGwire)는 어마어마한 루키 시즌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196㎝의 장신은 그는 나중에는 100kg을 훌쩍 넘는 엄청난 거구였지만 23세이던 당시만 해도 깡마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MLB의 변방팀 오클랜드 에이스에 1984년 드래프트 1라운드 10번에 뽑혔던 맥과이어는 USC 대학 시절부터 홈런 타자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2학년 때까지 투수로도 뛰는 등 그렇게 타격 두각을 보이지 못하다가 3, 4학년 때부터 장타력을 과시하며 대학 야구에서 32홈런을 쳤습니다. 

 

 

그런데 맥과이어 하면 제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깡마르고 훌쩍 큰 키의 맥과이어가 보여준 파워뿐이 아니었습니다. ‘루키 50홈런’이라는 대기록을 포기한 그의 결정은 실은 더욱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즌 마지막 게임을 남기고 맥과이어는 49홈런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1956년 프랭크 로빈슨이 세웠던 루키 39홈런 기록은 이미 훌쩍 넘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한 개의 홈런만 친다면 당시로서는 정말 보기 드문 50홈런을, 그것도 루키가 치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내셔널리그 시카고 컵스의 베테랑 안드레 도슨이 그 시즌 49홈런을 쳤기 때문에, 마지막 경기에서 대기록을 세웠다면 MLB 전체 홈런왕에 오를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맥과이어는 마지막 경기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부인 케이티가 첫 번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었는데 바로 시즌 마지막 날에 산통이 왔던 것입니다. 그날 맥과이어는 야구장 대신 병원에 가서 첫아들 매튜의 출산을 지켜봤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한국 일간지 사회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스포츠 섹션도 담당했었지만, 여전히 한국식 사고방식이던 저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 대기록을, 평생 유일한 기회일 뿐인데 포기하다니. 그러나 우리에게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한 스포츠에 앞선 가정에 대한 소중함이 거의 40년 전인 당시 미국에서는 이미 당연시되고 있었습니다.
 
1998년 새미 소사와 엄청난 홈런 레이스를 벌이던 당시 맥과이어가 홈런을 치고 들어오면 포옹을 하던 배트보이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바로 그 소년이 맥과이어가 루키 시즌 50홈런 도전을 포기하게 했던 첫째 아들입니다. 루키 50홈런이라는 기록도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였지만, 첫 아들의 출산을 지켜본다는 것 역시 다시는 올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었기에 맥과이어는 기꺼이 역사적인 기록 도전을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


맥과이어는 그러나 루키 최다 홈런 기록과 함께 신인왕을 차지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에 양키즈의 애런 저지가 52홈런으로 루키 홈런 신기록을 쓰더니 2년 후인 2019년 뉴욕 메츠의 피트 알론소가 53홈런으로 또 새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맥과이어는 홈런 빈도수로 따지면 사상 최고의 파괴력을 지닌 거포였습니다.
그는 10.61타수마다 한 개씩의 홈런을 뽑아내 홈런의 전설인 베이브 루스의 11.76타수보다 오히려 더 자주 홈런을 친 타자였습니다. 또한 엄청난 거리의 홈런을 쳐내기로도 유명했습니다. 맥과이어의 트레이드마크는 150m가 넘는 엄청난 비거리의 홈런이었습니다. 그의 별명 ‘빅맥(Big Mac)’은 그런 엄청난 파워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장거리 홈런 몇 개를 소개하면 
– 1998년 플로리다 말린스전, 리반 에르난데스를 상대로 중앙 펜스를 넘긴 거대한 홈런 비거리는 약 166m
– 1996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소속 시절, 랜디 존슨을 상대로 상단 데크까지 날려 보낸 장거리 홈런 약 164m
– 1997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 좌측 펜스를 넘어 23열을 뚫고 들어간 홈런 약 159m (MLB 공식 기록은 피트로 집계돼 약 m로 표시)

100m를 날려도 홈런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빅맥의 비거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1997년 시즌 중반에 오클랜드에서 세인트루이스로 트레이드된 맥과이어는 1998년 9월 8일 시카고 컵스의 스티브 트랙슬에게 시즌 62호 홈런을 터뜨려 로저 매리스가 보유했던 한 시즌 61홈런 기록을 넘어섰습니다.
당시 관중석에서는 로저 매리스의 아들 맷 매리스가 지켜보고 있었는데, 신기록을 세운 직후 맥과이어와 매리스의 포옹 장면은 전 미국의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시즌 내내 새미 소사와 불꽃 튀는 홈런레이스 끝에 한 시즌 70홈런을 치는, 당시로서는 믿기 어려운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소사도 66홈런으로 역시 놀라운 기록을 세웠지만, 맥과이어의 그늘에 묻혔습니다. 
당시 MLB는 1994년 파업 후유증에 시달리며 몇 년째 흥행 침체에 빠졌었는데, 맥과이어-소사 홈런레이스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야구팬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MLB를 수렁에서 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맥과이어의 기록도 2001년 배리 본즈가 73개의 홈런을 치면서 또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됩니다.

583홈런으로 은퇴 당시 통산 5위(현재는 11위)에 오른 맥과이어는 5번 빅리그 홈런왕에 올랐습니다. 1996년부터 4년 연속 50개 이상의 홈런을 쳤고, 1999년에는 사상 최초로 안타수(145)보다 타점(147)이 많은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적은 5,487타수만에 500홈런을 친 타자였고, 새미 소사와 함께 2년 연속 60홈런 이상을 친 유이한 타자였고, 베이브 루스, 소사와 함께 4번의 50+홈런 시즌을 기록한 타자였습니다.

 

그러나 맥과이어의 이런 대기록들은 금지약물 파문에 묻혀 퇴색했습니다.


맥과이어의 억울하다는 주장도 일면 이해도 갑니다. 현역 시절 막판에 맥과이어의 파괴력이 오히려 증가하자 의혹의 눈길들이 나왔고, AP 통신에서 관련 기사까지 나오자 맥과이어는 자신이 안드로(Androstenedione)를 복용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당시 안드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미국프로풋볼리그(NFL)에서는 금지약물이었지만 MLB에서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던 근육강화제였습니다. 

맥과이어는 당시에는 금지 약물이 아니었던 안드로 외에는 아무런 약물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강변했습니다.

 

그러나 맥과이어는 은퇴 후에 두 번의 사건으로 신뢰도에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오클랜드 시절 ‘배시 브라더스’라는 별명으로 쌍포를 이뤘던 호세 컨세코가 자서전에서 맥과이어도 자신과 함께 스테로이드를 사용했다고 주장한 것이 첫 번째였고, 또 한번은 2005년 미의회공청회에 불려간 맥과이어가 증언을 거부한 것이 두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컨세코의 주장은 과장이 됐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회에서 진실 선서까지 하고나서 금지약물 사용 여부에 관한 질문을 받자 맥과이어는 “나는 과거에 대해 논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라면서 증언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미국 전역의 야구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여준 맥과이어의 이런 모습은 그가 야구 생애 동안 쌓아놓았던 좋은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결국 2007년 처음 후보 자격을 얻으면서 실시된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맥과이어는 545명의 투표인단 중에 128명에게만 표를 얻어 23.5%의 득표율에 그쳤습니다. 후보 자격 획득 후 10년 내로 75% 이상을 얻어야 명전 멤버가 되는데, 한 번도 25%를 넘지 못한 채 2016년을 끝으로 후보 자격을 잃었습니다.
금지약물에서 자유로웠다면 충분히 명예의 전당에 갈만한 커리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포팅뉴스는 1997년까지 성적을 토대로 발표한 빅리그 역대 100대 선수 랭킹에서 맥과이어를 91위에 올렸다가 2005년 랭킹에서는 84위로 조정했습니다. 그는 또한 메이저리그 20세기의 팀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금지 약물 스캔들과 함께 명예의 전당 꿈은 무산됐습니다.

2001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맥과이어는 마크맥과이어재단을 설립해 육체적으로, 성적으로 학대받은 어린이들을 위한 사회 활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조용한 은퇴 생활을 했습니다.
후배들이 조언을 구하면 타격 기술을 전수하는 정도였던 그는 2010년 토니 라루사 감독의 요청으로 세인트루이스 타격 코치로 다이아몬드에 복귀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타격 코치를 맡았던 3년간 카디널스는 타율과 출루율 1위, 득점 2위를 기록했습니다.

 

 

4년 차에 다시 카디널스 타격 코치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싶다며 고사하고 2013년 LA 다저스의 코치직을 수락했습니다. 2016년부터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벤치 코치도 맡았지만 2018시즌을 끝으로 MLB를 떠났습니다.

 

 

 

이 게시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