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⑮ 내셔널리그의 홈런왕, 멜 오트
연재

멜 오트 Ⓒ MLB.com
멜 오트는 20세기 초 미국의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와 같은 인생을 산 인물입니다.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순진한 시골 청년이 최대 도시인 뉴욕으로 와서 성공을 거둔 이야기는 많은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물론 오늘날 그와 같은 커리어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팀도 17세 선수를 마이너리그 대신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두고 육성하진 않기 때문이죠. 또한, 오트 정도의 슈퍼스타가 22년 동안 한 팀에서 뛰는 것도 매우 드물어졌습니다.
오트는 키 5피트 9인치(175cm), 체중 170파운드(77kg)로 거포치고는 매우 작은 체구였지만, 강한 손목힘을 바탕으로 6번이나 내셔널리그 홈런 1위를 차지했고 내셔널리그 타자로는 최초로 통산 500홈런을 돌파하기도 했습니다. 은퇴할 당시를 기준으로 오트는 홈런(511), 득점(1859), 볼넷(1708) 부문에서 내셔널리그 통산 1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는데요. 특히 홈런 511개는 당시 기준으로 2위 척 클라인(300홈런)보다 200개 이상 많은 기록이었습니다.
순진한 시골 청년, 프로야구에 발을 딛다

멜 오트 Ⓒ MLB.com
멜빈 토마스 오트(Melvin Thomas Ott)는 1909년 3월 2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근처의 작은 마을인 그레트나에서 태어났습니다. 네덜란드계 이민자인 아버지(찰리)는 면실유 공장에서 일했지만, 오트의 두 삼촌은 준프로 야구팀에서 뛰었는데요. 오트는 어린 시절부터 삼촌들에게 야구를 배웠습니다. 조기 교육을 받은 덕분이었을까요. 그는 야구 선수로 빠르게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오트는 고교 시절부터 일주일에 3~4일은 준프로 팀에서 뛰었는데, 작고 땅딸막한 체형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파워를 발휘했습니다. 이는 레그킥을 활용한 특유의 타격폼 덕분이었는데요. 하지만 그의 고향 마이너리그 팀인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는 '키가 너무 작다'라는 이유로 그의 입단을 거절했고, 16세의 오트는 뉴올리언스에서 약 90마일(145km) 떨어진 패터슨 시의 목재 회사에 취업하게 됩니다.
오트는 사내 야구팀에 합류함과 동시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그의 활약에 감명을 받은 사장 헨리 윌리엄스는 유럽으로 가는 길에 뉴욕에 들러 친구인 자이언츠의 감독 존 맥그로에게 오트의 영입을 강력하게 추천했습니다. 하지만 오트는 맥그로를 만나보라는 사장의 엽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요. 출장을 다녀온 후 이를 알게 된 윌리엄스는 화를 내면서 오트에게 뉴욕으로 가는 기차표를 건넸습니다.
1925년 9월, 뉴욕에 도착한 그는 자이언츠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오트는 처음 몇 개의 공을 상대로는 내야를 뚫는 강한 타구를 때려냈고, 다음에는 외야 깊숙이 타구를 보내더니, 이윽고 우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연거푸 터뜨렸습니다. 입단 테스트가 끝난 후 맥그로 감독은 한 기자에게 "그 녀석은 리그에서 가장 위대한 좌타자 중 한 명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이 예언은 현실이 됩니다.
조숙한 야구 천재

멜 오트 Ⓒ MLB.com
오트는 1926년 1월 자이언츠와 정식 계약을 맺습니다. 맥그로 감독은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낼 경우 해당 팀의 감독이 그만의 독특한 타격폼을 교정하려고 들 것을 우려해 오트를 처음부터 메이저리그에 두기로 결정했는데요. 또한, 원래는 포수였던 오트의 포지션을 외야수로 옮겼습니다. 포수치고는 그의 체격이 너무 작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이후 자신이 직접 오트에게 타격 기술과 외야 수비를 전수해줬습니다.
맥그로는 10대 청소년인 오트가 베테랑 선수들과 어울릴 경우 '나쁜 버릇'이 들 것이라고 생각해 팀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동료들은 처음부터 오트를 좋아했고, 그가 메이저리그 주전 선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확신했는데요. 자이언츠와 계약 후 첫 2년간 경기장보다 더그아웃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오트는 1928년 만 19세의 나이에 주전 우익수를 맡습니다.
그리고 1929년 만 20세의 오트는 타율 0.328 42홈런 151타점 OPS 1.084를 기록하며 마침내 잠재력을 만개하기 시작했죠. 이해 오트가 기록한 홈런(42)과 타점(151)은 만 20세 이하를 기준으로 지금까지도 메이저리그 1위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오트는 외야 수비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폴로 그라운드에서 한 시즌 동안 무려 26개의 보살을 기록하면서 당대 최고의 우익수로 인정받았는데요.
1929년 그의 활약은 자이언츠라는 팀 전체가 만든 성과기도 했습니다. 같은 나이대 선수들이 대두분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을 때, 오트가 리그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두 시즌 동안 맥그로 감독뿐만 아니라 타격코치 로저 브레스나한, 주루코치 버니 위퍼스, 베테랑 외야수인 펩 영스와 아이리시 뮤젤 등이 아낌없이 전수해준 노하우를 스펀지처럼 흡수했기 때문이었죠.
내셔널리그의 홈런왕

멜 오트 Ⓒ MLB.com
그 이후로도 오트는 1947년 은퇴할 때까지 홈런왕을 6번이나 차지합니다. 심지어 1928년부터 1945년까지 자이언츠 무려 18년간 팀 내 홈런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죠. 18년 연속 단일팀 홈런 1위는 MLB 역사에서도 오트밖에 세우지 못한 기록입니다. 뒤이어 그는 만 28세였던 1937년엔 로저스 혼스비(298홈런)를 제치고 NL 통산 홈런 1위에 올랐고, 이는 훗날 윌리 메이스가 넘어서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의 전성기인 1931년부터 1941년까지 아메리칸리그의 타자들이 내셔널리그의 타자들보다 평균 21% 더 많은 홈런을 쳤다는 건데요. 이는 당시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에서 사용하는 공인구의 차이에서 기인했는데, 반발력이 낮은 공인구를 사용하는 내셔널리그 타자들은 상대적으로 홈런을 치기 어려웠죠. 이를 고려했을 때 오트는 표면적인 성적보다 더 뛰어난 성과를 거둔 셈입니다.
한편, 오트는 선구안으로도 명성이 높았는데요. 그는 6번의 볼넷 1위를 포함해 무려 10번이나 100볼넷 시즌을 보냈습니다. 통산 볼넷은 1,708개로 은퇴 시점에서 내셔널리그 통산 1위였죠. 이는 본인의 뛰어난 선구안에 더해 상대 투수로부터 철저하게 견제를 받았기에 만들어진 기록입니다. 이러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오트는 1929년부터 1936년까지 8년 연속 100타점 이상을 기록하는 해결사이기도 했습니다.
1933년 내셔널리그가 반발력이 한층 더 낮은 공인구를 도입하면서 오트는 타율 0.283 23홈런 103타점으로 이례적인 부진을 겪습니다. 하지만 투수력이 강한 자이언츠는 리그 1위를 차지한 후 워싱턴을 4승1패로 꺾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오트도 월드시리즈 타율 0.389 2홈런으로 맹활약하며 우승의 주역이 됐는데요. 자이언츠는 이후 1936, 1937년에도 리그 1위에 올랐지만 2번 모두 양키스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습니다.
선수 겸 감독으로 지낸 말년

멜 오트 Ⓒ MLB.com
오트는 1939년부터 자이언츠의 주장을 맡았고, 1941년에는 오랜 팀 동료인 빌 테리가 감독에서 은퇴하면서 선수 겸 감독으로 임명됐습니다. 그는 감독을 겸하면서도 타석에서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는데요. 특히 1942년에는 타율 0.295 30홈런 93타점 OPS 0.912로 홈런왕에 올랐고 득점(118)과 볼넷(109)에서도 1위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력이 약화된 자이언츠는 계속해서 하위권을 전전했죠.
1946년 개막전에서 오트는 통산 511번째이자 마지막 홈런을 때려냅니다. 하지만 다음날 그는 뜬공을 처리하기 위해 다이빙을 하다가 무릎을 다칩니다. 이 부상으로 그의 선수 생활은 사실상 끝났는데요. 오트는 1946년 나머지 기간 29경기에만 출전했고, 1947년 4경기에 출전한 후 선수로서 은퇴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8년 7월 16일 감독직에서도 물러납니다. 오트의 후임으로는 레오 듀로서가 선임됐습니다.

듀로서는 브루클린 다저스 감독 시절 한 기자가 오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사람 좋으면 꼴찌(nice guys finish last)"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부드러운 성격에 구단 레전드 출신인 오트의 후임으로 직설적인 성격에 라이벌 구단 출신인 듀로서가 임명되자, 자이언츠 선수단과 팬들은 당혹감을 표출했죠. 하지만 오트는 그런 듀로서와도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죠.
이후 2년간 오트는 오랜 팀 동료였던 칼 허벨을 도와 자이언츠의 팜 시스템을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1951년 87.2%의 득표율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됩니다. 자이언츠는 그의 등번호 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오트는 1955년 <뮤추얼 네트워크>의 라디오에서 경기 리뷰를 맡았고, 1956년부터는 전설적인 스포츠 캐스터 반 패트릭과 함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중계를 맡으며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작은 남자이자, 좋은 사람

멜 오트 Ⓒ MLB.com
하지만 1958시즌 종료 후 가족들과 함께 미시시피주로 여행을 떠난 오트는 짙은 안갯속에서 조심스럽게 운전하던 중 중앙선을 침범한 차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뉴올리언스의 한 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일주일 후인 1958년 11월 21일 4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트는 많은 야구계 인사와 미디어 종사자, 그리고 팬들로부터 선수뿐만이 아닌 사람으로서도 깊은 존경을 받았는데요.
미국의 스포츠 기자 아놀드 하노는 "오트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내셔널리그 기록 14개를 가지고 있었고 수줍은 미소와 부드러운 스윙을 지닌 작은 남자이자, 야구계의 전설인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은 야구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었다"라고 평했습니다. 1999년 오트는 'MLB 올센추리 팀'에 선정됐고, 2020년 <디 애슬레틱>은 '메이저리그 레전드 100인' 목록에서 오트를 32위에 올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