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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연재] 민훈기의 필드노트 : 원조 ‘Mr. 옥토버’ 레지 잭슨(Reggie Jackson) E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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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MLB에서 배번 44번 하면 거포의 상징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타자라면 떠오르는 이름은 베이브 루스의 최다 홈런 기록을 최초로 넘어선 755홈런의 행크 애런이 있습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왼손 장타자로 521개의 홈런을 친 윌리 맥코비도 44번이었습니다. 현재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오라클파크 외야 뒤쪽의 바다 이름도 ‘맥코비 만’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44번은 바로 레지 잭슨(Reggie Jackson)입니다. 
아마도 그의 플레이를 가장 많이 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특히 잭슨은 바로 ‘10월의 사나이(Mr. October)’라는 별명이 탄생한 원조 선수입니다.
1977년 뉴욕 양키즈의 거포였던 잭슨은 LA 다저스와의 월드시리즈(WS)에서 한 경기 3홈런, 3경기 연속 홈런, 단일 WS 5홈런을 기록하며 10월의 남자로 등극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경기가 된 6차전에서는 3홈런을 치며 맹위를 떨치자 당시 해설자이던 하워드 코셀(Howard Cosell)이 이 장면을 보며 “그는 Mr. October다!”라고 외쳐 이 별명이 탄생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포스트시즌에서 활약을 펼친 선수들에게 ‘미스터 옥토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지만, 그 원조는 바로 레지 잭슨이었습니다.


그 월드시리즈에서 잭슨은 4할5푼에 5홈런 8타점의 맹타를 휘둘렀습니다.
특히 6차전 3홈런은 모두 초구를 때려 담장을 넘겼는데, 상대 투수도 박찬호의 스승이던 버트 후튼, 알리 호슬리, 너클볼 찰리 허프 등 각각 다른 당대 유명 투수들을 상대로 뽑은 홈런이었습니다.

 

유색 인종인 레지 잭슨은 늘 자신감에 넘쳐서 때론 오만하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자존감이 넘쳤습니다. 특히 인종 차별 등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숨기지 않는 카리스마 넘치는 선수였습니다.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고 거침없이 외부로 터뜨렸으며, 강력한 리더의 자질과 함께 물러서지 않는 투지를 지닌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때론 그런 투쟁심이 부작용을 낳았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양키즈 이적 후 ‘굴러온 돌’ 잭슨이 팀 내 최고 연봉자가 되면서 기존의 간판스타이던 백인 포수 서만 몬슨과의 불화도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진짜 유명했던 일화는 다혈질의 빌리 마틴 감독과의 충돌입니다.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던 마틴 감독과 4번 타자 잭슨의 충돌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가 전 미국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977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정규 시즌 경기에서 마틴 감독은 외야 수비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며 잭슨을 경기 중에 뺀 적이 있었습니다. 
마틴 감독은 이닝이 끝나기도 전에 잭슨은 블레어로 교체했고, 잭슨이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자 그에게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잭슨도 발끈해 설전을 벌이다가 선수들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난투극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이 경기는 NBC-TV를 통해 전국으로 방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 미국의 야구팬들이 마틴 감독과 잭슨의 다툼을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1946년 5월18일 필라델피아 인근 윈코트에서 태어난 레지 잭슨의 본명은 레지날드 마르티네스 잭슨입니다. 
‘레지(Reggie)’라는 애칭으로 항상 불린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훅인)으로 대부분 알고 있지만, 사실 100% 흑인은 아니고 남미계 혼혈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마르티네스 잭슨은 프에리토리코 출신으로 니그로리그에서 뛴 야구 선수였습니다. 어머니 클라라 잭슨은 흑인이었습니다.
레지 잭슨은 프에로토리코와 파나마 혈통이 흐르는 흑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인종 구별을 할 때 흑인의 피가 조금만 섞이면 흑인으로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75% 타인종 혈통이 섞여도 흑인계 혈통이 25%면 인구조사 때 흑인으로 구분합니다. 차별적아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 레지 잭슨 캔디바 스포츠카드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서 성장한 잭슨은 고교 시절 야구도 잘했지만 풋볼 스타였습니다. 애리조나 주립대에 입학할 때도 야구가 아닌 풋볼 장학생이던 잭슨은 2학년 때부터 그의 파워를 탐낸 야구부 보비 윈클스 감독 때문에 야구 선수로 전향했습니다.
1966년 드래프트에서 잭슨은 전체 2번으로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에 뽑혔습니다. 당시 1번 지명권은 뉴욕 메츠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츠는 흑인 선수 잭슨이 백인 여자 친구와 사귄다는 이유로 잭슨이 아닌 스티브 칠코트라는 백인 포수를 1번 픽으로 뽑았습니다.
잭슨은 1984년 발간된 자서전에서 당시 메츠의 윈클스 감독이 그런 사실을 자신에게 말해주었다고 밝혔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당시 그의 여자친구이던 제니 캠포스는 멕시코계의 미국인이었습니다. 잭슨은 제니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독신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포수 칠코트는 마이너리그에서만 6년을 뛰다가 은퇴했습니다.

 

1967년 시즌 중반에 빅리그에 데뷔한 잭슨은 1968년 팀이 오클랜드로 이전한 후에 본격적으로 간판타자로 맹활약을 펼치기 시작, 1969년에는 47홈런으로 거포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자 구단주 챨리 핀리와 연봉 인상 문제를 놓고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핀리 구단주는 잭슨을 마이너로 보내겠다고 위협했고, 당시 보위 쿤 커미셔너의 중재로 수습이 되기는 했지만, 다음 시즌 잭슨은 23홈런에 2할3푼7리로 성적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잭슨은 그러나 1972년부터 오클랜드가 WS 3연패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잭슨은 1972년 ALCS 결승 5차전에서 홈스틸로 동점을 만들며 역전극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슬라이딩을 하다가 햄스트링 부상으로 남은 월드시리즈에서는 뛰지 못했다. 
그러나 1973년 WS에서는 2루타 3개와 3루타, 홈런 각각 1개씩을 치며 6타점으로 MVP에 뽑혔습니다. (그리고 1977년에 양키즈 유니폼을 입고 다시 MVP에 뽑히면서 잭슨은 최초로 두 팀에서 WS MVP를 수상한 선수가 됐습니다.)
잭슨은 1974년에도 29홈런 93타점으로 오클랜드 팀의 WS 3연패에 기여했는데, 오클랜드는 양키즈를 제외하면 WS 3연패를 이룬 유일한 팀으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잭슨이 양키즈를 떠나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옮긴 1982년부터 그의 경기를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기에 다저스와 에인절스 경기를 즐겨 봤습니다.
그의 스윙을 보면 그야말로 ‘모 아니면 도’였습니다. 모든 스윙은 100% 체중을 실은 풀스윙이었고, 그 파워 스윙에 걸리면 그 어떤 공도 담장 안에 머물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또 아주 많은 경우 잭슨이 휘두르는 방망이는 허공만 갈랐습니다. 잭슨은 21년 빅리그 생애 동안 2597개의 삼진으로 역대 최다 삼진 타자로 남아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늘 당당했습니다. ‘삼진을 당했다는 건 그만큼 내가 강하게 스윙했다는 뜻이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잭슨은 1982년 에인절스 유니폼을 입은 첫 시즌에 39홈런 101타점의 활약을 펼치며 팀 창단 이래 첫 페넌트 우승을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에인절스와 5년 계약을 맺은 마지막 해인 1986년에도 두 번째 우승 멤버가 됐으니 가는 곳마다 우승을 끌어낸 대단한 타자였습니다..
1984년 9월 17일, 자신이 빅리그 첫 홈런을 친지 정확히 17년째 되는 날 잭슨은 통산 500호 홈런을 로열스의 좌완 버드 블랙에게 뽑아냈습니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 블랙은 후에 투수 코치로 7년간 일하면서 잭슨이 이루지 못한 에인절스의 WS 우승 멤버가 됐습니다.

 

1987년 잭슨은 자신의 야구 생애를 시작한 오클랜드 에이스로 복귀해 마지막 시즌을 보냈습니다. 이미 시즌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는 친정팀에서 1년만 더 뛰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10월4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시즌 최종전 마지막 타석에서 잭슨은 중전 안타를 때리며 자신의 야구 생애를 마무리했습니다.

 

21년 동안 잭슨은 563개의 홈런을 쳤고, 11번 포스트 시즌에 진출해 AL 우승 6번에 그중 5번은 WS 우승 반지를 끼었습니다. 14번 올스타에 뽑힌 그는 1973년에 리그 MVP와 WS MVP를 동시에 석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최초로 3개 팀(에이스, 양키스, 에인절스)에서 각각 100개 이상의 홈런을 친 선수였습니다.
잭슨의 은퇴 후 오클랜드는 9번을, 양키스는 44번을 각각 영구 결번으로 결정했습니다. 
 
1993년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잭슨은 현역 시절에도 ABC 스포츠 등의 리포터나 코멘테이터로 종종 모습을 보였고, ‘네이키드 건’ 등의 몇몇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소수 민족의 인권 문제 등에 항상 앞장서서 활발한 인권 활동을 벌이기도 한 인물이었습니다. 은퇴한 흑인 선수들이 코치나 감독, 스카우트, 구단 프론트 등에서 일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현역 시절 애증 관계였던 조지 스타인브레너 양키즈 구단주는 잭슨의 능력과 비전을 인정해 ‘구단주 특별 보좌’ 역을 맡겼습니다. 잭슨은 특히 소수민족 선수들과의 상담과 중간 역할을 해내며, 항상 소수민족 선수들 문제에 둔감했던 양키스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스포팅뉴스에서 선정한 20세기 100대 선수 중에 48위에 뽑힌 잭슨은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 오래된 명품 자동차들을 100대 넘게 보유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주에 자동차 딜러십 체인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잭슨은 공동지분으로 오틀랜드와 에인절스 구단을 구입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잭슨의 언변은 무하마드 알리 뺨칠 정도였습니다.

그는 “나는 잭키 로빈슨 이후 가장 중요한 흑인 선수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다.”라는 말을 했는가 하면, 뉴욕의 부촌인 파크 애베뉴에 살 때는 “내가 사는 빌딩에만 양키즈를 살 수 있는 사람이 10명은 되지만, 그중에 홈런을 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떠벌이기도 했습니다.

양키즈 이적을 앞두고는 ‘내가 양키즈에서 뛴다면 내 이름을 딴 캔디바를 만들어야 할거야’라고 했는데, 실제로 몇 년 후 ‘레지 바’라는 초콜릿 바가 출시됐습니다. 양키스타디움 팬들은 잭슨이 홈런을 칠 때마다 이 캔디를 던져대곤 했습니다.
 

그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딱 두 가지, 
열성적으로 응원하거나 아니면 최고로 싫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정 가는 곳마다 야유가 끊이지 않았지만 잭슨은 “팬들은 아무에게나 야유를 하지는 않는다.”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습니다.
양키스타디움 외야의 박물관에 걸린 그의 44번 동판에는 ‘당대 최고로 컬러풀하고 익사이팅한 플레이어이며, 특히 중압감이 극도에 달할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 타자였다.‘라고 묘사돼 있습니다.

 

©️ 1971년 올스타전 홈런 

 

마지막으로 그의 가장 유명한 홈런 영상을 보시죠.
1971년 7월 13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타디움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잭슨은 NL 투수 도크 앨리스를 상대로 엄청난 홈런을 쏘아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 타구가 우측 펜스 서치라이트 아래 설치된 타워 철골 부위에 붙여 놓은 타자 명판을 강타했습니다. 바로 레지 잭슨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이었습니다.
비거리 약 159m의 올스타전 역사상 가장 장거리 홈런이었습니다. 철골에 맞지 않았더라면 장외 홈런이었습니다.
MLB.com은 이 홈런을 ’올스타전 역사상 가장 놀라운 타구‘라고 평가했고, ESPN 은 ‘올스타전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장면’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1993년 첫 번째 투표에서 93.6%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된 잭슨은 양키즈 모자를 쓰고 참석한 헌당식 행사에서 “팬들은 7월이 아니라 10월을 기억한다. 우리가 이 게임을 하는 이유다!”라는 연설로 다시 한번 열성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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