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⑭ 미스터 컵스, 어니 뱅크스
연재

어니 뱅크스 Ⓒ MLB.com
It's a great day for a ballgame. Let's play two?
ㅡ어니 뱅크스
어니 뱅크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거포형 유격수입니다. 뱅크스가 활약하던 1950-60년대는 메이저리그 유격수들의 평균 홈런 수가 10개도 되지 않던 시대였는데요. 하지만 뱅크스는 1955년 홈런 44개를 때려내면서 유격수로서 40홈런을 돌파한 첫 번째 타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유격수로서 40홈런을 돌파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타자도 모두 뱅크스였죠. 심지어 같은 기간 뱅크스는 유격수로서 홈런왕을 2번, 타점왕을 2번이나 차지했습니다.
또한, 뱅크스는 시카고 컵스의 첫 번째 흑인 선수이자,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기도 합니다. 뱅크스는 1953년 데뷔해 은퇴할 때까지 19년간 컵스에서만 뛰면서 통산 2,528경기 2,583안타 512홈런 1,636타점 타율 0.274 OPS 0.830으로 올스타 14회, 골드글러브 1회, 내셔널리그 MVP 2회를 차지했고, 1977년 첫 번째 투표에서 83.8%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는데요. 이에 1982년, 컵스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그의 등번호 1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야구에는 관심이 없었던 소년

어니 뱅크스 Ⓒ MLB.com
어니스트 뱅크스(Ernest Banks)는 1931년 1월 31일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에디 뱅크스와 에시 뱅크스의 12명의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에디는 준 프로 구단인 댈러스 블랙 자이언츠에서 8시즌 동안 포수로 활약했고,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식료품점의 창고 관리인으로 일했습니다. 뱅크스가 8살일 때, 아버지는 그에게 첫 글러브와 야구공을 선물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어린 시절 뱅크스는 야구에 관심이 없었고, 미식축구와 농구를 더 좋아했는데요.
아들과 캐치볼을 하고 싶었던 아버지 에디는 캐치볼을 할 때마다 10센트 짜리 동전을 용돈으로 줬고, 그 과정을 통해 뱅크스는 야구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뱅크스가 다니는 부커 T. 워싱턴 고교에는 야구부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에 뱅크스는 소프트볼을 했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본 졸업생 빌 블레어가 준 프로 팀인 디트로이트 콜츠에 추천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구단주인 조니 카터가 그의 집을 직접 방문해 부모님을 설득하면서 콜츠에 입단할 수 있었죠.
뱅크스는 콜츠 시절 캔자스시티 스타스와 경기에서 니그로리그의 레전드이자, 스타스의 감독이었던 쿨 파파 벨에게 경기장 밖에서의 침착함과 그라운드 안에서 경기력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에 벨은 니그로리그의 명문팀인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의 감독이었던 벅 오닐에게 뱅크스를 추천했고, 마침 기존 유격수인 진 베이커가 시카고 컵스로 이적하면서 공백이 생긴 모나크스가 그를 월급 300달러에 영입하면서 뱅크스에게는 새로운 삶이 열렸습니다.
모나크스에서 첫 시즌이었던 1950년 뱅크스는 유격수를 맡으며 타율 0.255를 기록했는데요. 훗날 뱅크스는 인터뷰에서 "모나크스는 제겐 학교와도 같았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한편, 시즌 종료 후 그는 오닐 감독의 추천으로 재키 로빈슨, 로이 캄파넬라, 돈 뉴컴, 래리 도비를 비롯해 현역 흑인 메이저리거가 다수 포함된 '재키 로빈슨 올스타스'에서 뛸 기회를 얻습니다. 그 해 겨울, 뱅크스는 투어를 따라다니며 로빈슨으로부터 내야 수비에 대한 수업을 받습니다.
니그로리그를 떠나 메이저리그를 향하다

어니 뱅크스 Ⓒ MLB.com
뱅크스는 1951년 미군에 징집되어 한국 전쟁 중 독일에서 2년간 복무했고, 1953년 1월에 전역한 후 브루클린 다저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트라이아웃을 거절하고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로 복귀해 타율 0.347을 기록했는데요. 하지만 이때쯤 많은 흑인 야구선수들이 메이저리그를 향하면서 니그로리그에 대한 관심이 줄었고 관중도 크게 줄었습니다. 모나크스의 감독 오닐도 이대로라면 니그로리그가 해체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1953년 9월, 시카고 컵스가 뱅크스와 투수 빌 디키의 이적료로 2만 달러를 제안하자 모나크스는 이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컵스와 800달러에 계약을 맺은 뱅크스는 9월 17일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습니다. 그는 컵스의 첫 흑인 선수였는데요. 컵스에서 데뷔전을 치른 그를 찾아간 재키 로빈슨은 "어니, 네가 여기 와서 기쁘다. 한동안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조용히 듣고 배우렴. 나는 몇 년간 말하지 않고 들으면서 사람들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어"라고 조언했습니다.
이는 그의 조용하지만 존재감 있는 모습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시즌 종료까지 10경기를 뛰면서 데뷔 시즌 타율 0.314 2홈런 6타점 OPS 0.956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뱅크스는 이듬해인 1954년 컵스의 주전 유격수로 전격 발탁되는데요. 유격수 뱅크스와 함께 키스톤 콤비를 이룬 2루수는 컵스의 두 번째 흑인 선수인 진 베이커였습니다. 뱅크스와 베이커는 원정 경기마다 같은 방을 썼고, 최초의 흑인 키스톤 콤비로 호흡을 맞추며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됐다.
뱅크스는 1954년 타율 0.275 19홈런 75타점 OPS 0.753으로 NL 신인왕 투표 2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내립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880g짜리 배트를 쓰기로 한 것이죠. 강한 손목 힘을 바탕으로 공을 최대한 몸에 붙여놓고 어퍼 스윙을 가져가는 뱅크스는 시즌 중 우연히 팀 동료의 배트를 들어 올리다 가벼운 배트를 쓰면 배트 스피드를 쉽게 끌어올릴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이를 곧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꼴찌팀 MVP

어니 뱅크스 Ⓒ MLB.com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났는데요. 뱅크스는 1955년 타율 0.295 44홈런 117타점 OPS 0.941로 40홈런을 달성한 최초의 유격수가 됐습니다. 또한, 5개의 만루홈런으로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이 가지고 있던 단일 시즌 최다 만루홈런 기록(4개)을 경신하며 내셔널리그 MVP 투표 3위에 이름을 올렸죠. 1956년 뱅크스는 손 부상(골절)으로 데뷔 후부터 이어온 연속 출전 기록이 424경기에서 중단됐고 시즌 성적도 타율 0.295 28홈런 85타점 OPS 0.887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1957년 건강하게 돌아온 뱅크스는 타율 0.285 43홈런 102타점 OPS 0.939로 다시 40홈런 고지를 밟았구요. 1958년 타율 0.313 47홈런 129타점 OPS 0.980으로 홈런, 타점, 장타율(0.614) 부문 1위를 차지하면서 MVP에 오릅니다. 해당 시즌 컵스는 72승 82패(0.468)에 그쳤는데, 메이저리그 역사상 5할 승률 미만인 팀에서 MVP 수상자가 나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그만큼 뱅크스의 활약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뱅크스는 이듬해인 1959년 타율 0.304 45홈런 143타점 OPS 0.970으로 타점 부문 1위를 차지했고, 유격수 수비율(0.985)에서도 1위를 차지하면서 NL 역사상 최초로 2년 연속 MVP에 오른다. 이어 1960년에도 타율 0.271 41홈런 117타점 OPS 0.904로 홈런 부문 1위를 차지했고, 유격수 수비율(0.977)에서도 1위에 오르면서 커리어 첫 유격수 부문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하지만 이는 뱅크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골드글러브 수상이기도 했습니다.
한국 전쟁(6.25 전쟁) 당시 군에서 다친 무릎의 상태가 점차 악화됐기 때문이죠. 무릎 상태가 나빠지면서 뱅크스는 1961시즌 유격수 수비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컵스의 수석코치 비디 힘슬은 그에게 외야수로 포지션 변경을 제안합니다. 뱅크스는 외야수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항상 팀을 먼저 생각한 그는 컵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5월 23일부터 6월 15일까지 좌익수로 23경기에 출전했습니다.
1루수로 포지션을 옮긴 천재 유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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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스는 처음 접하는 외야 수비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중견수 리치 애시번의 도움으로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23경기 1실책). 하지만 넓은 범위를 커버하는 외야 수비는 오히려 뱅크의 무릎 상태를 더 악화시켰고, 컵스는 그의 포지션을 다시 1루수로 옮겼습니다. 뱅크스는 현역 시절 1루수였던 찰리 그림 코치에게 수비를 배우며 연속 출전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수비 도중 왼쪽 무릎을 벽돌 벽에 부딪혔고, 뱅크스의 연속 출전은 717경기에서 중단됩니다.
무릎 부상으로 일주일간 경기에 나서지 못했던 뱅크스는 복귀 후 익숙한 포지션인 유격수로 뛰면서 타율 0.278 29홈런 80타점 OPS 0.852로 1961시즌을 마쳤지만, 1962년부터는 포지션을 1루수로 완전히 옮겼습니다. 뱅크스는 풀타임 1루수 첫해에 타율 0.269 37홈런 104타점 OPS 0.809으로 여전한 기량을 과시합니다. 하지만 1963년 내내 이하선염으로 고통을 겪었고, 발꿈치 부상까지 겹치며 타율 0.227 18홈런 64타점 OPS 0.695에 그쳤는데요.
뱅크스는 1964년 타율 0.264 23홈런 95타점 OPS 0.757로 반등에 성공했고, 1965년에도 타율 0.265 28홈런 106타점 OPS 0.781을 기록했지만, 더 이상 MVP 시절의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진 못합니다. 그러던 중 컵스는 1966년 '더 립' 레오 듀로셔를 감독으로 영입했는데요. MLB 역대 5번째로 2,000승 고지를 밟은 듀로셔는 감독으로서 뛰어난 능력과는 별개로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심판, 언론, 구단 운영진 뿐만 아니라 선수들과도 잦은 갈등을 빚은 인물이었죠.
훗날 듀로셔는 "뱅크스가 시카고에서 지닌 위상 때문에 전성기가 지난 그를 트레이드하거나 벤치에 앉힐 수 없다는 것에 좌절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뱅크스는 듀로셔의 영입을 진심으로 반겼는데요. 뱅크스는 듀로셔가 감독으로 부임한 첫해 타율 0.272 15홈런 75타점 OPS 0.747로 1963년 이후 최악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그러자 컵스는 1967년 봄 뱅크스를 선수 겸 코치로 임명했다. 이는 기량이 떨어진 어니의 출전 시간을 줄이기 위한 의도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불꽃을 태운 미스터 선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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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뱅크스는 젊은 1루수 존 보카벨라와 주전 경쟁에서 승리했고, 1967년 타율 0.276 23홈런 95타점 OPS 0.765을 기록합니다. 그는 1968년에도 타율 0.246 32홈런 83타점 OPS 0.756의 성적을 남겼고, 1969년 타율 0.253 23홈런 106타점으로 통산 14번째 올스타에 선정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습니다. 하지만 8월 말까지 지구 1위를 지키던 컵스는 시즌 막판 2위로 추락하며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이 시즌은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가을야구에 근접한 순간이었습니다.
뱅크스는 1970년 72경기로 출전 경기가 대폭 감소하는 가운데에서도 타율 0.252 12홈런 44타점 OPS 0.772를 기록했고, 5월 12일에는 통산 500번째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그러나 1971년 39경기에서 타율 0.193 3홈런 6타점 OPS 0.572에 그친 후 현역 은퇴를 발표합니다. 뱅크스는 통산 512홈런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했는데, 유격수로서 기록한 277홈런은 은퇴 시점을 기준으로 역대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
뱅크스는 통산 경기 수(2,528경기), 타석(9,421), 장타(1,009), 총 루타(4,706) 부문에서도 여전히 컵스 구단 역대 1위에 올라있습니다. 문제는 뱅크스가 활약한 19시즌(2,528경기) 동안 컵스는 한 번도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건데요. 이는 선수로서 가장 오랫동안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기록입니다. 그럼에도 뱅크스는 회고록에서 컵스 팬들에 대한 감사와 함께 "컵스와 계약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라며 소속팀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뱅크스는 "야구하기 좋은 날이군, 한 게임 더 어때?(It’s a great day for a ballgame. Let’s play two?)"라는 말로도 유명한데요. 1969년 7월, 섭씨 42도의 더위에서 경기를 하게 된 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 이 말은 지미 엔라이트 기자가 보도하면서 유명해졌죠. 실제로 야구를 사랑했던 그는 더블헤더를 매우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태도는 그에게 '미스터 컵(Mr. Cub)'과 '미스터 선샤인(Mr. Sunshine)'이라는 별명이 붙는 데 일조했습니다.
플레이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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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로서 뱅크스의 최대 강점은 장타력이었습니다. 거포치곤 작은 체격(185cm 81kg)에도 불구하고 강한 손목 힘을 바탕으로 빠른 배트 스피드를 지녔던 그는 과거의 거포들과는 달리 가벼운 배트를 사용해 장점을 극대화했고, 이는 타격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무엇보다 뱅크스는 MLB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거포형 유격수였는데요. 그는 유격수들의 평균 홈런이 10개가 되지 않던 시대에 40홈런을 때려냈고, 이는 대형 유격수들의 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뱅크스는 적극적인 타격을 지향하는 전형적인 올드스쿨형 타자였습니다. 이로 인해 볼넷이 적고 출루율도 낮았지만, 그 반대로 삼진도 적어서 통산 8번이나 100타점을 넘겼을 만큼 타점 생산력이 뛰어났습니다(실제로 100삼진 이상 시즌이 한 번밖에 없었다). 또한, 군 생활 중 무릎을 다친 이후 고질적인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풀타임 첫해인 1954년부터 1969년까지 16시즌 동안 연평균 150경기에 출전했을 정도로 강인한 내구성을 갖춘 선수기도 했습니다.
유격수로서 뱅크스는 고질적인 무릎 통증으로 수비 범위가 넓은 편은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피나는 노력을 통해 실수를 줄임으로써 안정적인 수비를 자랑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통산 3차례나 유격수 수비율 1위에 올랐고, 어시스트 1위도 2차례 기록했습니다. 1루수로 보직을 옮긴 후에도 골드글러브를 수상하진 못했지만 풋아웃 1위를 4차례, 어시스트 1위를 3차례 기록했고, 통산 수비율이 무려 0.994에 달할 정도로 유격수 시절보다 더 나은 수비를 펼쳤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뱅크스는 인종차별의 시대를 관통한 선수였죠. 흑백차별이 만연한 시대에 뛰면서 그는 수많은 빈볼과 반칙을 묵묵히 견뎌내야 했습니다. 이에 재키 로빈슨은 신인 시절 뱅크스에게 "말하기보다는 듣고 인내하라"라고 조언했고, 이를 받아들인 그는 특유의 낙관주의로 인종의 벽을 넘어 모든 MLB 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런 공로로 그는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미국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 받습니다.
은퇴 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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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에서 은퇴한 뱅크스는 1973년부터 1974년까지 컵스의 1루 코치를 맡았고, 이후로도 20년간 컵스의 홍보대사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1977년 첫 번째 투표에서 득표율 83.8%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1982년 컵스는 그의 등번호 14번을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죠. 컵스는 2008년 개막전을 앞두고 홈구장인 리글리 필드 앞에 뱅크스의 동상을 공개했습니다. 뱅크스는 현역 시절 다른 슈퍼스타들에 비해 많은 연봉을 받지는 못했는데요.
하지만 컵스의 구단주인 필립 K. 리글리의 조언 덕분에 수입의 대부분을 투자했고, 현역 시절이었던 1967년 시카고 남부에 '어니 뱅크스 포드'라는 자동차 딜러십을 세우면서 미국에서 두 번째로 자동차 딜러십을 소유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되는 등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죠. 이를 바탕으로 55세 무렵에는 500만 달러가 넘는 자산가가 됐습니다. 뱅크스가 84번째 생일을 8일 앞둔 2015년 1월 23일 세상을 떠나자, 시카고에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