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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연재] 민훈기의 필드노트 : 카디널스의 상징 ‘스탠 더 맨’ 뮤지얼 E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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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미국 중부에 위치한 세인트루이스는 찐 야구의 도시입니다.

1880년대 말이면 미국의 서부 끝을 여전히 세인트루이스로 여기는 미국인들이 많았을 시절입니다.
그 시절 1881년에 사업가이던 크리스 본 더 아헤가 브라운 스토킹스라는 지역 야구팀을 사들여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라고 이름 지으며 이 팀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이 팀은 당시 한동안 운영됐던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이라는 프로야구 리그에 창단 멤버로 합류해 4번 우승하는 등 강팀으로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1892년 내셔널리그의 일원이 됐고, 1900년에는 팀의 별명을 카디널스로 바꿉니다. 그러니까 이 팀의 역사는 1882년부터 시작이니 올해가 143년째 시즌입니다.

 

특파원 시절 카디널스 원정 취재를 갈 때마다 강렬하게 받은 인상이 3가지 있었습니다.
첫째는 붉은 물결의, 정말 충성도 높고 또 야구에 대한 이해도가 미 전역에서 최고라도 해도 이견을 달 자가 없을 정도의 팬들의 열기였습니다.
미국에서 ‘스포츠 열기’하면 미식축구, 풋볼을 꼽지만 세인트루이스 다운타운에 위치한 부시스태디움의 팬심과 열기는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더운 야구장이었습니다. 1970년대까지도 유행했던 야구장의 모형은 대부분 ‘쿠키 상자처럼 찍어 만든 야구장’이라는 뜻의  ‘cookie-cutter stadium’이었습니다. 보통 야구와 풋볼을 함께 유치하곤 했는데, 로마 콜로세움 비슷하게 가운데가 움푹 파인 느낌에, 실은 야구에도 풋볼에도 그다지 적합지 않은 운동장이었습니다. 바람도 통하지 않고 정말 더웠습니다.
특히 여름 무더위가 엄청난 세인트루이스였기에, 90년대까지도 기자실 앞이 탁 트이고 에어컨이 시원치 않았던 그곳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를 정도로 몹시도 더웠습니다.

 

©️쿠키-커터 구장의 전형이던 올드 부시스타디움

 

그리고 마지막은 맥주!
1990년대 MLB 야구장 중에는 기자실에 맥주 기계가 있는 곳에 몇 곳 남아있었습니다. 기자실 흡연이 허용되는 구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맥주를 무상 제공하던 곳이 세인트루이스 부시스타디움이었습니다. 업무 중이라 맘껏 마실 수는 없었지만, 그 더위를 식혀주던 맥주회사 부시가 제공한 시원한 맥주 맛은 일품이었습니다. ^^ 혹시 궁금하실까봐, 마지막까지 기자실 흡연을 허가한 야구장은 몬트리올의 올림픽 스타디움이었습니다.

 

쿠키-커터 스타디움의 전형이었던 부시스타디움이 배출한 수많은 스타 중에 카디널스 팬들은 물론 전 미국의 가장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인물은  ‘Stan the Man‘ 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스탠 뮤지얼이었습니다.

 

스탠리 프랭크 뮤지얼(Stanley Frank Musial)이 풀네임인 그는 폴란드계 이민자 아버지와 슬라브계 어머니 사이의 6남매 중 다섯째로 본명은 Stanislaw Franciszek Musial 이었다고 합니다. 

뮤지얼의 상징성은 옛 부시 스타디움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동상을 보면 확 느낄 수 있습니다. 스윙을 준비하는 모습의 뮤지얼의 동상은 1967년 조각가 칼 모스가 제작했는데, 약 2.4m의 동상이 3.4m 받침대 위에 우뚝 서 있습니다. 후에 이 동상은 새로 지어진 뉴부시 스타디움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동상에는 ’야구의 완벽한 전사이자, 완벽한 기사 (Baseball's perfect warrior, perfect knight)‘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부시 스타디움 앞 뮤지얼 동상 

 

그가 어느 정도 대단한 선수였는지는 ‘스포팅 뉴스’에서 빅리그 사상 100대 선수를 선정하면서 조 디마지오보다 한 단계 위인 11위에 뮤지얼을 올린 것만 봐도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야구와 농구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1941년 카디널스와 계약하고 데뷔할 당시 투수였지만 어깨를 다치며 외야수로 전향했고 그것이 위대한 타자의 탄생을 나았습니다.
해군으로 복무했던 1945년 시즌을 제외하면 뮤지얼은 1963년까지 오로지 카디널스 유니폼만 입고 활약했습니다. 그는 타고난 타자였던 모양입니다. 뮤지얼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공을 잘 맞췄다. 타격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본 적도 없다. 많은 선수들이 과학적으로 접근하지만 내겐 그저 공을 치는 능력이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타고난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어제 광주 중계를 갔을 때만해도 4안타를 친 구자욱 선수가 ‘야구 진짜 어렵다, 정말 모르겠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난번 잠실 해설을 갔을 때는 오지환 선수가 “수비는 이제 어느 정도 수학처럼 공식이 보이는데, 타격은 정말 왜 이렇게 어려운지...”라며 혀를 차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뮤지얼에게는 타격조차 그저 놀이처럼 쉬웠던 모양입니다.
실은 어마어마한 노력과 훈련이 있었던 건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182cm에 79kg의 체격은 거포라고 하기에는 조금 왜소했지만 코브라를 연상시키는 특이한 타격 폼에서, 온몸이 꼬였다가 풀리면서 정확히 공을 가격하면 빨랫줄 같은 라인드라이브성 타구가 운동장의 곳곳으로 날아갔습니다.  

 

그의 통산 기록은 타율 .331, 안타 3,630개, 타점 1,951개, 경기수 3,026경기, 타수 10,972, 득점 1,949, 2루타 725개 등 입니다. 홈런은 475개로 당시까지 내셔널리그 역사상 멜 오트에 이어 두 번째였습니다. 2루타가 725개, 3루타가 177개로 통산 장타율이 .559에 OPS는 .976이었습니다. 통산 공격 WAR 125.2는 역대 6위입니다.

7번의 타격왕, 3번의 내셔널리그 MVP, 그리고 3번의 월드시리즈 우승팀 멤버였으며, 은퇴 시점에는 메이저리그 17개, 내셔널리그 29개 기록을 보유 또는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행크 애런(25번)에 이어 윌리 메이스와 함께 올스타전 최다 출전 2위 기록(24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의 수많은 기록 중에 몇 가지만 꼽아보면 

1946년: 군복무 마치고 복귀해 시즌 MVP와 팀 3번째 WS 우승 견인
1948년: 타율 .376 - 39홈런 - 131타점 → 트리플크라운에 1홈런 부족
1954년: 더블헤더에서 5홈런 – MLB 최초
1958년: 통산 3,000안타 달성 (최초로 장타로 3천안타 달성)
1962년: 41세에 3홈런 경기 (최고령)
1963년: 은퇴. 마지막 타석도 안타로 장식. 등번호 6번 영구 결번
1967년: 카디널스 단장으로 월드시리즈 우승 

 

그런데 뮤지얼이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것은 야구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항상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는 늘 팬들과 가까이 지냈고, 지역 사회를 위해서도 많은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모두에게 친절했고, 대스타라기 보다는 그저 만나면 반가운 이웃집 아저씨였습니다. 팬들과 항상 함께 호흡한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24번이나 팬투표로 올스타에 꼽힌 것도 그의 인기를 대변해줍니다.

 

사상 최고의 타자 중에 한 명인 타이 콥은 지난 1953년 한 인터뷰에서“역사상 완벽한 야구 선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완벽에 가장 근접한 선수가 있다면 그건 뮤지얼이다. 사상 최고의 타자 중에 한명임은 분명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뮤지얼은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콥에게 극찬을 들은 몇 안 되는 선수였습니다.

 

메이저리그 선수가 된 후 꽤 많은 연봉을 받게 되자 마이너리그 시절 도움을 준 코치에게 집을 사준 일화도 있습니다.
늘 상대에 대한 존중이 몸에 밴 인물로 22년간 3,026경기를 뛰면서 단 한 번도 퇴장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뮤지얼을 ‘야구의 완벽한 신사(Baseball's Perfect Gentleman)’라고 부르며 추앙했습니다.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한 뮤지얼 (출처: 위키피디아)

 

1990년대 중반부터 10년 정도 스프링 캠프 취재를 가면 거의 항상 플로리다 주 쥬피터에 있는 세인트루이스 캠프 취재도 갔습니다.
박찬호의 다저스가 원정 경기를 하기도 하고, 마크 맥과이어 취재를 간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늘 기자실 옆 휴게실에 인자한 노신사가 미소로 반겨주곤 했습니다. 처음엔 그저 은퇴한 지역 인사인가 했는데, 홍보실 직원이 그 유명한 스탠 뮤지얼씨라고 알려줬습니다. 참 격의 없고, 열린 마음의 신사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두 번 한국도 방문했었고, 특히 1958년에는 한국대표팀과의 대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국가대표 에이스는 좌완 김양중 투수로 강속구와 예리한 제구로 당대를 풍미한 최고 투수였습니다.
그날 뮤지얼과 6회 대결에서 볼카운트 1-2에서 김양중이 던진 날카로운 공이 스트라이크존 하단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런데 판정은 볼.


그리고 다음 공에 뮤지얼은 큰 스윙으로 삼진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 김양중 투수의 피칭을 극찬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경기를 관전한 다수의 관계자들은 명백히 스트라이크였는데 볼로 판정이 나자 뮤지얼이 다음 공에 깨끗이 헛스윙하고 타석을 나섰다고 증언합니다. 
이 일화를 알았더라면 그 분을 만났을 때 꼭 물어봤을 텐데 두고 두고 아쉬웠습니다.

 

뮤지얼씨는 2011년 스포츠 및 공익적 기여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미국 민간인 최고표창인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받은 훈장과 공헌장을 받았습니다.

2013년 1월의 추운 날, 뮤지얼씨는 92세에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문식에는 수천명의 팬들이 추위 속에 떠나는 영웅에게 조의를 표했습니다. 그는 붉은 카디널스 재킷과 타이, 그리고 연주 실력이 일품이었던 하모니카를 품은 채 천국의 야구장으로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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