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⑬ 최강의 스위치 히터, 미키 맨틀
연재

미키 맨틀 Ⓒ MLB.com
"이봐, 칼라인. 넌 맨틀의 반만큼도 못한 선수야!(Hey Kaline. You ain't half the ballplayer Mantle is)"
그러자 칼라인이 대답했다.
"얘야, 세상에 미키 맨틀의 반만큼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단다.(Kid, nobody is half the player Mantle is.)"
미키 맨틀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스위치 히터이자, 가장 위대한 중견수 중 한 명입니다. 또한, 베이브 루스와 조 디마지오의 계보를 잇는 양키스의 슈퍼스타였습니다. 맨틀은 1951년 데뷔해 1968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18시즌 2,401경기 2,415안타 536홈런 1,509타점 153도루 타율 0.298 출루율 0.421 OPS 0.977 WAR 110.2승을 기록했고 올스타 20회, 골드글러브 1회, MVP 3회, 홈런왕 4회, 타격왕 1회, 타점왕 2회, 트리플크라운 1회를 차지했는데요.
모든 스위치 히터의 우상이자 출발점인 그는 현재까지도 통산 홈런(536)과 단일시즌 타율(0.365), 홈런(52), 볼넷(146), OPS(1.177) 부문에서 스위치 히터 기준 역대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또한, 통산 7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홈런(18), 장타(26), 득점(42), 타점(40), 볼넷(43), 총 루타(123) 부문에서 WS 1위 기록을 보유 중인 '가을 남자'이기도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1974년 첫 번째 투표에서 88.2%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스위치 히터로 훈련받다

미키 맨틀 Ⓒ MLB.com
'미키 찰스 맨틀(Mickey Charles Mantle)'은 1931년 10월 20일 미국 오클라호마주 스파비노에서 태어났습니다. 맨틀이 태어나기 전부터 준 프로야구 선수였던 그의 아버지 엘빈 찰스 '머트' 맨틀은 "첫아이가 남자아이라면 메이저리그 선수로 키울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장남의 이름을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의 포수였던 '미키' 코크런에서 따와서 지었고, 광부로 일하면서도 시간이 될 때마다 틈틈이 아들에게 야구를 가르쳤습니다.
미래에는 야구에서 플래툰 시스템이 일반화될 것이라고 내다본 머트는 원래 오른손잡이였던 아들을 어린 나이부터 스위치 히터로 훈련시켰는데요. 훗날 맨틀은 "아버지는 오른손으로 던지셨고 저는 왼손으로 쳤습니다. 할아버지는 왼손으로 던지셨고 저는 오른손으로 쳤습니다. 그게 아버지가 저에게 스위치 히터를 가르친 방식입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어린 시절 맨틀은 매일 학교가 끝난 후에는 친구들과 함께 야구를 하면서 놀았습니다.
고교 시절 맨틀은 야구, 미식축구, 농구에서 모두 재능을 드러냈는데요. 하지만 고교 2학년 때 미식축구 연습 중에 팀 동료에게 왼쪽 정강이를 차면서 당시로서는 불치병에 가까웠던 골수염 진단을 받았습니다. 맨틀의 부모는 그를 밤새 오클라호마 시티로 데려갔고, 몇 년 전에 나온 페니실린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치료는 감염을 성공적으로 줄였고, 다행히도 맨틀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맨틀은 15살부터 준-프로 팀인 백스터 스프링스 위즈키즈에서 뛰었습니다. 1948시즌이 끝날 무렵, 양키스의 스카우트 톰 그린웨이드는 맨틀의 팀 동료 중 한 명인 3루수 빌리 존슨을 지켜보기 위해 백스터 스프링스에 방문했는데요. 하지만 그의 관심은 곧 유격수인 맨틀에게로 옮겨갔습니다. 이날 맨틀이 2개의 홈런을 하나는 우타석, 하나는 좌타석에서 때려냈기 때문인데요. 심지어 2개 모두 외야 펜스 너머의 개울에 떨어지는 대형 홈런이었죠.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조 디마지오의 후계자

미키 맨틀(왼쪽)과 조 디마지오(오른쪽) Ⓒ MLB.com
맨틀이 이듬해 봄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린웨이드는 그에게 마이너리그 계약(계약금 1500달러, 월급 140달러)을 제안했습니다. 양키스와 계약한 맨틀은 1949년 캔자스-오클라호마-미주리리그의 클래스-D 인디펜던스 양키스에서 유격수로 뛰면서 타율 0.315로 인상적인 성적을 남깁니다. 맨틀은 1949년 6월 30일 홈구장인 슐리스 스타디움에서 프로 첫 홈런을 때려냈는데요. 비거리가 무려 460피트(약 140m)에 달하는 초대형 홈런이었습니다.
맨틀은 1950년 웨스턴 어소세이션의 클래스-C 조플린 마이너스로 승격됐고 타율 0.383 26홈런 136타점으로 타격왕을 차지했지만, 유격수로서 수비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 7월 한국전쟁(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맨틀은 군 입대를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징집 위원회는 그가 왼쪽 다리의 골수염 상태로 인해 군 복무에 신체적으로 부적격하다고 판단했는데요. 이는 맨틀이 군 복무 부적격 판단을 받은 세 번 중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맨틀은 1950년 9월 17일 양키스로 콜업되면서 드디어 메이저리그 생활에 발을 들였습니다. 시즌 막판에 콜업되어 벤치에만 앉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원정에 동행하면서 조 디마지오, 요기 베라, 필 리주토와 같은 대선배들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보스턴 레드삭스와 페넌트레이스를 펼치는 것을 지켜봤죠. 이러한 경험은 18세였던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듬해인 1951년 맨틀은 양키스의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을 받습니다.
1951년 맨틀이 스프링 캠프에 도착했을 때, 양키스의 클럽하우스 매니저인 피트 쉬히는 그에게 등번호 6번을 부여했습니다. 이는 맨틀이 베이브 루스(3번), 루 게릭(4번), 조 디마지오(5번)의 뒤를 이어 양키스의 차세대 슈퍼스타가 될 것이라는 의미였죠. 한편 디마지오가 3월 1일에 1951년이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라고 발표하고, 다음날 케이시 스텡겔 감독이 디마지오의 후계자는 맨틀이 될 것이라고 공언하면서 그에 대한 기대치가 더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조로운 출발 이후 찾아온 어려움

미키 맨틀 Ⓒ MLB.com
이렇듯 엄청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맨틀은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맹활약을 펼치며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USC 트로이언스 야구팀을 상대했을 때 나왔습니다. 이날 맨틀은 홈 플레이트 양쪽에서 각각 한 방씩 홈런을 터뜨렸는데, 두 홈런 모두 최소 500피트(152m) 이상을 날아갔다고 전해지는데요. 이를 통해 스텡겔 감독은 메이저리그에서 아직 한 번도 타석에 선 적이 없는 맨틀에게서 양키스의 미래를 보게 됩니다.
스텡겔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맨틀은 제가 본 어떤 거포보다 더 빠른 주력을 지녔고, 어떤 발 빠른 주자보다 더 강한 파워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을 합친 선수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녀석(맨틀)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너무 뛰어나서 저는 매우 혼란스럽습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많은 기대 속에 1951년 4월 17일 보스턴 레드삭스와 경기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맨틀은 5월까지 신인답지 않은 맹활약을 펼칩니다.
하지만 순조로운 출발 이후 맨틀은 타석에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는데요. 부진이 길어지자, 결국 양키스는 그에게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산하 트리플 A 구단으로 내려보냅니다. 스텡겔 감독은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는 맨틀에게 "미키,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야. 몇 주 후면 타격이 나아질 거고, 곧 우리가 다시 데려올 거야. 약속할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자신감이 흔들린 맨틀은 강등 이후에도 좀처럼 부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좌절한 맨틀은 어느 날 아버지에게 전화해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캔자스시티로 차를 몰고 온 아버지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맨틀의 옷을 챙기기 시작했고, "내가 남자를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겁쟁이를 키웠구나. 돌아와서 나랑 같이 광산에서 일하자"라고 답했죠. 아버지가 위로해 줄 것으로 기대한 맨틀은 처음으로 호된 꾸지람을 듣습니다. 그리고 훗날, 맨틀은 이 사건이 자신의 커리어를 바꿨다고 회고했습니다.
계속되는 풍파 속에서 성장하다

미키 맨틀 Ⓒ MLB.com
아버지의 꾸지람 이후, 맨틀은 마이너리그에서 타율 0.361 11홈런 60타점을 기록하면서 양키스에 다시 콜업됐습니다. 복귀 후 등번호를 7번으로 바꾼 그는 빅리그 데뷔 첫해를 타율 0.267 13홈런 65타점으로 마쳤고, 양키스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죠. 하지만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우중간 방면 뜬공을 처리하기 위해 전력 질주를 하던 맨틀은 중견수 디마지오의 충돌을 피하려다가 스파이크가 노출된 배수관에 걸려 넘어지면서 오른쪽 무릎을 크게 다칩니다.
결국 맨틀은 들것에 실려 필드에서 나가야 했고, 이는 그가 현역 시절 당한 수많은 부상 중 첫 번째였습니다. 하지만 최악의 소식은 따로 있었는데요. 경기 후 맨틀을 병원에 데려가던 아버지는 아들을 택시에 태우려다가 쓰려졌고, 두 사람은 함께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맨틀은 무릎 인대가 찢어지면서 수술이 필요했고, 아버지가 호지킨병 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결국 이듬해 5월, 맨틀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는 40세에 불과했죠.
아버지의 이른 죽음은 맨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두 삼촌이 모두 호지킨병으로 인해 이른 나이에 사망했고, 아버지 역시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데요. 맨틀은 선수 생활 내내 팀 동료들에게 자신도 젊은 나이에 죽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고, 이 믿음은 특유의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맨틀에게 암울하고 우울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맨틀은 12월 메릴린 존슨과 결혼식을 올립니다.
1952년 이제 막 20살이 된 맨틀은 불과 1년 사이에 많은 일을 겪었는데요. 그는 10대의 나이로 빅리그에 데뷔했고, 처음으로 슬럼프를 겪었으며, 월드시리즈에선 큰 부상을 당했고, 아버지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뤘습니다. 또한 그에겐 1951년 월드시리즈 이후 조 디마지오가 은퇴하면서 중견수로 포지션을 옮겼고, 슈퍼스타의 빈자리를 메워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죠. 그러나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맨틀은 많은 성장을 이룹니다.
드디어 시작된 전성기

미키 맨틀 Ⓒ MLB.com
맨틀은 1952년 타율 0.311 23홈런 87타점 4도루 OPS 0.924로 커리어 첫 올스타에 선정됐고,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345 2홈런 3타점 OPS 1.061을 기록하며 소속팀 양키스의 4연속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1953년에도 타율 0.295 21홈런 92타점 8도루 OPS 0.895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됐고, 월드시리즈에서 타율은 0.208에 그쳤으나 5차전 만루 홈런을 포함 홈런 2개와 타점 7개를 쓸어 담으면서 양키스의 5연속 우승에 기여합니다.
양키스는 1953시즌 정규 시즌 111승을 기록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현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에게 밀려 아메리칸리그 2위에 그치면서 연속 우승이 중단되는데요. 하지만 맨틀은 1954년 타율 0.300 27홈런 102타점 OPS 0.933으로 커리어 첫 100타점을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5년에는 타율 0.306 37홈런 99타점 OPS 1.042로 홈런(37), 3루타(11), 볼넷(113), 출루율(.431), 장타율(.611) 부문 1위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전성기의 시작을 알립니다.
맨틀의 1956년은 가장 위대한 시즌 중 하나로 꼽힙니다. 그는 타율 0.353 52홈런 130타점 OPS 1.169으로 양대리그 통합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고 득점(132), 장타율(.705), WAR(11.3승)에서도 리그 1위에 오르면서 생애 첫 MVP에 선정됩니다. 또한, 월드시리즈에서도 타율 0.250 3홈런 4타점 OPS 1.067을 기록하며 양키스의 우승을 이끌었죠. 그리고 이듬해인 1957년 타율 0.365 34홈런 94타점 OPS 1.177을 기록하며 2년 연속 MVP를 차지합니다.
맨틀은 1958년에도 타율 0.304 42홈런 97타점 18도루 OPS 1.035로 또 한 번 홈런왕에 올랐고, 월드시리즈에선 타율 0.250 2홈런 3타점 OPS 1.003을 기록하며 양키스의 우승을 견인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59년에는 상대팀의 집중 견제로 타율 0.285 31홈런 75타점 21도루 OPS 0.904에 머물렀고 양키스도 리그 3위에 그쳤죠. 그러자 맨틀의 뒤를 받쳐줄 거포의 필요성을 느낀 양키스는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서 로저 매리스를 영입합니다.
M & M 보이즈 결성

미키 맨틀(왼쪽)과 로저 매리스(오른쪽) Ⓒ MLB.com
좌타 거포인 매리스의 영입은 양키스가 둔 '신의 한 수'였습니다. 1960년 3번 타자 맨틀이 타율 0.275 40홈런 94타점 OPS 0.957으로 홈런(40), 득점(119) 부문 1위를 차지하고, 4번 타자 매리스가 타율 0.283 39홈런 112타점 OPS 0.952로 타점왕에 오르면서 양키스는 리그 1위를 탈환했습니다. 두 타자는 MVP 투표에서 1위(매리스), 2위(맨틀)에 선정됐는데, 뉴욕 언론은 맨틀과 매리스의 앞 글자를 따서 'M&M 보이즈'라는 멋들어진 별명을 지어줬죠.
1961년 맨틀과 매리스는 팀 선배 베이브 루스의 1927년 단일 시즌 신기록인 60홈런에 도전하며 시즌 내내 치열한 경쟁을 펼쳤는데요. 뉴욕 언론은 커리어 초창기까지만 하더라도 맨틀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그를 부상을 '자주 당하고 삼진이 많은 오클라호마 출신의 시골뜨기'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맨틀은 시간이 지나면서 뉴욕 언론을 상대하는 법을 배웠고, 뉴욕 출신인 팀 동료 화이티 포드의 도움을 받아 점차 언론의 호감을 얻었습니다.
뉴욕 언론은 반대로 1960시즌 시작 전에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서 영입한 매리스를 '굴러 들어온 돌'로 여겼습니다. 여기에는 매리스의 조용하고 무뚝뚝한 성격도 영향을 끼쳤죠. 이에 따라 뉴욕 언론은 맨틀을 '진짜 양키(Real Yankee)' 즉 기록에 합당한 선수로, 매리스는 루스의 합법적인 후계자(맨틀)로부터 왕관을 훔치려는 침입자로 묘사했습니다. 1961년 9월 10일, 18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매리스는 56홈런, 맨틀은 53홈런을 기록하고 있었는데요.
결국 뉴욕 언론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맨틀은 몇 주 동안 심한 근육통과 감기에 시달리면서 시즌 종료까지 홈런 1개를 추가하는데 그쳤습니다. 반면, 매리스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61번째 홈런을 쏘아 올리며 루스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을 경신합니다. 당연하게도 이해 MVP는 타율 0.269 61홈런 141타점 OPS 0.993을 기록한 매리스였는데요. 하지만 이해 맨틀도 타율 0.317 54홈런 128타점 OPS 1.135로 스위치히터 역사에 남을 기록을 남겼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 하락세

미키 맨틀 Ⓒ MLB.com
1962년 부상으로 39경기를 결장했음에도 맨틀은 타율 0.321 30홈런 89타점 OPS 1.091으로 볼넷(122), 출루율(.486), 장타율(.605) 부문 1위에 오르며 통산 세 번째 MVP에 선정됐습니다. 또한, 커리어에서 유일한 골드글러브를 수상했죠. 이해 양키스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맨틀은 양키스와 10만 달러 계약을 맺으며 10만 달러의 벽을 넘어선 역대 5번째 선수가 됐습니다.
맨틀은 1963년에도 기세 좋게 출발했지만 6월 5일 볼티모어전에서 홈런성 타구를 잡으려다가 발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면서 65경기 타율 0.314 15홈런 35타점 OPS 1.063으로 시즌을 마칩니다. 그러나 1964년 건강하게 복귀한 맨틀은 타율 0.303 35홈런 111타점 OPS 1.015를 기록했는데요. 이어 월드시리즈에서도 타율 0.333 3홈런 8타점 OPS 1.258로 맹활약을 펼쳤지만, 소속팀 양키스는 7차전 끝에 세인트루이스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칩니다.
만 33세가 된 1965시즌을 기점으로 맨틀은 급격한 기량 하락을 겪습니다. 여기에는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혔던 부상과 과한 음주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맨틀은 1965년 타율 0.255 19홈런 46타점 OPS 0.831에 그쳤고, 1966년 타율 0.288 23홈런 56타점 OPS 0.927으로 반등하나 했지만, 1967년 타율 0.245 22홈런 55타점 OPS 0.825로 다시 성적이 하락했습니다. 하지만 1967년 5월 14일, MLB 역사상 6번째로 500홈런을 달성했죠.
맨틀은 마지막 시즌인 1968년 타율 0.237 18홈런 54타점 OPS 0.782를 기록했습니다. 그 결과 맨틀의 통산 타율은 3할 이하로 떨어졌고, 이는 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죠. 이듬해인 1969년 3월 1일, 맨틀은 자신의 은퇴를 발표합니다. 은퇴 시점을 기준으로 맨틀의 536홈런은 MLB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고, 양키스에서 출전한 경기는 2401경기로 2011년 8월 29일 데릭 지터가 경신하기 전까지 구단 역대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
은퇴 후의 삶

미키 맨틀 Ⓒ MLB.com
맨틀은 1974년 첫 번째 투표에서 88.2%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한편 양키스는 1969년 6월 8일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미키 맨틀 데이'에 그의 등번호 7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고 맨틀에게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밀러 허긴스와 함께 양키스타디움 중앙 담장 근처에 걸릴 기념비와 청동 명판을 수여했습니다. 이후 2009년 현재의 홈구장인 뉴양키스타디움이 개장했을 때 맨틀의 기념비와 청동 명판은 모뉴먼트 파크로 옮겨졌습니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맨틀은 새로운 직업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1969년 NBC의 파트타임 해설 위원으로 잠시 활동했고, 1970년에는 1루 코치로 양키스에 복귀했지만 금방 그만뒀는데요. 이후 호텔과 레스토랑 사업에 투자했지만 실패하면서 한동안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스포츠 기념품 산업이 붐을 일으키면서 맨틀의 재정 상황도 개선됐죠. 그는 방송 출연과 기념품 사인으로 현역 시절보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맨틀이 선수 생활 내내 지나친 음주로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1993년 절친한 친구이자 스포츠 캐스터인 팻 서머럴의 권유로 입원 치료를 받은 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알코올 중독의 위험성을 알리는 활동을 했습니다. 1995년 6월 심한 복통으로 병원에 입원한 맨틀은 간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암세포가 온몸으로 전이된 후였고 2개월 후인 8월 13일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