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 카드로 보는 MLB Story ⑪] ‘디디에 드록바의 간절함’ 혹은 ‘신(神)의 개입’
연재
안녕하세요. 카드 읽어주는 남자입니다.
저는 지난 주말 이랜드 뮤지엄에서 개최하는 ‘위대한 축구선수 100인전’에 다녀왔는데요. ‘위대한 축구선수 100人’을 모티브로 스토리텔링한 전시회였습니다. 선수들의 땀과 영광의 순간이 담긴 게임 유즈드(Game Used) 아이템을 직접 볼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 ‘위대한 축구선수 100인전’에 전시된 실착 유니폼 모음(카드 읽어주는 남자)
구체적으로 ▲차범근·박지성·손흥민 등 태극전사들의 스토리가 담긴 ‘TAEGEUK WARRIORS 존’, ▲FIFA 월드컵 최다 우승국(5번)인 브라질의 우승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는 ‘BRAZIL 존’, ▲역대 월드컵 본선 진출국 선수들의 유니폼이 전시된 ‘THE BEAUTIFUL GAME 존’, ▲역대 월드컵 포스터와 MVP·골든부츠 등 수상자 11인의 저지 컬렉션이 전시된 ‘THE CHAMPIONS 존’, ▲직접 프리킥을 차 볼 수 있는 체험공간 ‘FREE KICK CHALLENGE 존’, ▲메시와 호날두의 컬렉션을 모아둔 ‘THE GOAT 존’ 등 다양한 테마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메시의 유니폼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카드 읽어주는 남자)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던 곳은 ‘THE GOAT 존’이었는데요, 메시와 호날두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디디에 드록바가 입었던 코트디부아르 유니폼
하지만 저의 발걸음은 한동안 ‘THE BEAUTIFUL GAME 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바로, 코트디부아르의 공격수 ‘디디에 드록바(Didier Drogba)’의 유니폼과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유니폼 앞에 우두커니 서서 혼자 이런 상상을 하고 왔던 것 같습니다.
ⓒ 디디에 드록바의 월드컵 실착 유니폼과 설명(카드 읽어주는 남자)
과연 그의 축구 인생도 이렇게 평탄했을까? 드록바는 도대체 어떤 선수였을까? 자연스레 시선이 유니폼 아래의 소개글로 향한다. 코트디부아르의 월드컵 성적과 그가 남긴 업적에 대한 내용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친절한 설명이 어쩐지 부족하게 느껴진다.
나는 다시 유니폼을 바라본다. 이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을 드록바의 모습을 상상한다. 상대 팀의 집중 마크와 몸싸움으로 길게 잡아 당겨졌을 유니폼 끝자락. 심판의 시선이 공을 향해 있을 때 그가 당했을 수많은 반칙들.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그의 살갗은 수비수들의 먹잇감이 되어 꼬집히고 할퀴어졌을 것이다. 만신창이가 되어 있어야 할 유니폼이지만,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수많은 수비수들을 용서라도 한 듯 어느새 곧게 펴져 있다.
이윽고 내 눈은 오른쪽 팔뚝 부분에 붙은 2010 남아공 월드컵 패치를 기어코 찾아낸다. 그의 두 번째 월드컵 출전. 하지만 브라질, 포르투갈 등 강호들과의 조 편성으로 다시 한번 눈물을 삼켰을 드록바. 시끄러운 부부젤라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을 그의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들리는가, 당신. 아프리카의 검은 맹수가 내는 이 연약한 울부짖음이.
- 카드 읽어주는 남자
그리고 관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래전 영상으로 접했던 한 남성의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작게 들려왔습니다. 후술하겠지만, 놀랍게도 드록바의 정신은 메이저리그(MLB)에도 깃들어 있었습니다.
(빠더니, 빠더니, 빠더니)
프랑스어로 “용서하세요”라는 의미*인데,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코트디부아르의 드록바가 했던 말입니다.
* forgive, pardon
축구공으로 총성을 멈추게 한 ‘디디에 드록바’
아프리카 서부 기니만(Gulf of Guinea)에 위치한 코트디부아르는 과거 무역의 요충지였습니다. 1960년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 공화국을 수립했지만, 상아와 초콜릿 무역의 이권은 국가를 반으로 가르고 말았습니다. 독재 정권의 집권과 군사정변으로 긴 홍역을 치렀죠. 이 혼란은 남부 기독교 정부와 북부 이슬람 반군이 충돌한 2002년부터 극에 달했습니다.
ⓒ CNN
서로 총구를 겨누게 된 자국민들을 보며 드록바는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드록바는 5살 때 프랑스로 이주했습니다. 즉 프랑스 시민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국가대표가 될 수도 있었지만, 드록바는 결국 자신의 조국인 코트디부아르를 택했습니다.
내가 대표팀을 통해 조국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축구 선수로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이다.”
- 디디에 드록바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대표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만약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던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면 조국이 하나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 2014 PANINI PRIZM WORLD CUP TEAM PHOTOS #11 COTE D'IVOIRE(카드 읽어주는 남자)
2005년 6월 4일.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 짓기 위해서는 카메룬과의 홈경기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했습니다. 드록바는 리더가 되어 경기 전 선수들과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미안하지만 할 말은 해야 해.
악수조차 나누고 싶지 않은 상대라도 패스를 해야 되는 거라고.
우린 팀이니까 함께 플레이해야 돼. 그게 팀이니까.
우린 다시 할 수 있어.
상대가 약해서가 아니라 우린 더 잘 해낼 수 있다고.
어떤 실수도 하면 안 돼.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주자고”
드록바가 홀로 2골을 넣는 등 분투했지만 결국 카메룬 징크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2:3으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따금 유니폼으로 눈물을 훔치는 선수들도 보였습니다. 다들 좌절했지만 아직 작은 희망의 불씨는 남아있었습니다. 굳이 따지고 싶지 않은, 대한민국의 월드컵 16강 고정 레퍼토리이기도 한 ‘경우의 수’가 코트디부아르에도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코트디부아르는 수단을 반드시 꺾고, 같은 시간 펼쳐지는 ‘이집트 : 카메룬’ 경기에서는 조 1위 카메룬이 이집트에 지거나 비겨야 하는 희박한 ‘경우의 수’였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카메룬의 승리를 예상했기 때문에 ‘기대’가 아닌 ‘기적’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These Football Times
그리고 운명의 2005년 10월 8일. 수단의 알-메리크 스타디움(Al-Merrikh Stadium)에서 예상대로 코트디부아르는 수단을 3:1로 제압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경기장에서 카메룬도 이집트를 1:0으로 줄곧 리드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트디부아르의 승리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경기 종료 10분 전 이집트가 동점 골을 기록하며 각본 없는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수는 1:1 동점이었고, 다들 심판의 종료 휘슬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디오 앞에 모인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은 첫 월드컵에 대한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추가시간이 4분 정도 흘렀을 무렵 카메룬이 페널티킥을 얻어냈습니다. 키커는 카메룬의 수비수 피에르 워메(Pierre Womé). 페널티킥을 성공하면 카메룬이, 실패하면 코트디부아르가 독일行 티켓을 거머쥐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코트디부아르 국민들과 선수들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신(神)은 조금 더 간절해 보이는 사람의 손을 들어준 것 같았습니다.
ⓒ 페널티킥을 실축한 카메룬의 피에르 워메(Actu Cameroun)
워메가 찬 공이 오른쪽 골대를 맞고 라인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카메룬 선수는 유니폼으로 얼굴을 덮어 가리기도 했습니다. 훗날 밝혀진 사실이지만, 워메는 자신의 페널티킥 실축으로 인해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 GRANTLAND
기적, 아니 ‘신의 개입’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 코트디부아르 선수단이 있던 알-메리크 스타디움의 비좁은 라커룸에서는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코트디부아르 대표팀의 주장 ‘시릴 도모로드(Cyrille Domoraud)’가 취재진을 라커룸으로 불러드렸고, 곧바로 마이크가 드록바의 손에 쥐어졌습니다. 모두가 환희에 울먹일 때 드록바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대본도 없이 무릎을 꿇고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 BBC SPORT
“전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오늘 우리는 모든 코트디부아르 국민이 공존할 수 있고 함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월드컵이라는 축제가 사람들을 다시 하나로 모을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여러분께 이렇게 무릎을 꿇고 간청 드리고자 합니다.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Pardonnez, Pardonnez, Pardonnez)
코트디부아르는 전쟁 따위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제발, 부디 모두 총을 내려놔 주세요. 평화로운 방법으로도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우린 그저 즐기고 싶습니다. 전쟁을 멈춰주세요. 우린 그저 즐기고 싶습니다. 전쟁을 멈춰주세요.”
드록바의 진심이 담긴 영상은 뉴스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그의 진심 어린 호소에 감명받은 정부군과 반군은 각자의 무기를 내려놓게 됩니다. 일주일 남짓 한 시간이었지만 코트디부아르엔 단 한 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 CNN
전쟁의 마침표를 찍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지만, 신의 개입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어쩌면 펼쳐지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이 위대한 스토리의 결말을 드록바가, 그리고 둥근 축구공 하나가 써낸 것입니다.
드록바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것인지, 아니면 신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드록바를 이용한 것인지는 아직도 알 길이 없습니다.
“드록바는 나의 영웅” 축구 선수될 뻔한 메이저리거 ‘피트 알론소’
한편 10대 시절 드록바의 플레이를 보며 잠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웠던 메이저리거도 있는데요. 그 주인공은 바로 뉴욕 메츠(New York Mets)의 프랜차이즈인 ‘피트 알론소(Pete Alonso)’입니다.
ⓒ 2023 TOPPS UPDATE #US292 PETE ALONSO(카드 읽어주는 남자)
지난해 6월 런던 시리즈(London Series)가 열리기 전 알론소는 인터뷰를 통해 어린 시절 2006년 독일 월드컵을 통해 드록바의 플레이를 본 후 그에게 매료되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힘과 우아함을 겸비한 선수였다고 그 시절 드록바의 모습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계기로 실제로 1~2시즌 동안은 축구를 했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드록바만큼의 재능은 없다고 판단했는지, 다행히(?)도 야구배트를 선택했고, 축구장이 아닌 야구장에서 뉴욕 메츠 팬들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알론소가 가장 좋아하는 축구클럽도 드록바가 몸담았던 ‘첼시(Chelsea FC)’라고 밝혔습니다.
ⓒ 2019 TOPPS NOW #447 LONDON SERIES(카드 읽어주는 남자)
한편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정규 시즌 경기 일부를 영국 런던에서 진행하기로 했는데요. 올해는 사정상 열리지 못했지만, 지난해 6월 8~9일엔 뉴욕 메츠(New York Mets)와 필라델피아 필리스(Philidelphia Phillies)의 경기가 런던 스타디움(London Stadium)에서 열렸습니다. 원래 축구·육상 경기장으로 활용되는데, 런던 시리즈 기간에는 야구 경기장으로 임시 개조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야구의 글로벌화를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MLB 월드 투어(World Tour)의 핵심 이벤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9년엔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 Sox)와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 경기가, 2023년엔 시카고 컵스(Chicago Cubs)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St.Louis Cardinals)의 경기가 열린 바 있습니다.
ⓒ talkSPORT
알론소는 “드록바가 경기장에 나설 때마다 보여준 존재감, 경기 방식, 매번 전력을 다하는 모습, 그리고 경기에서 보여준 파워, 공격성, 스타일은 내가 경기에 접근하는 방식에 확실히 영감을 주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드록바의 정신을 이어받은 덕분일까요? 미국 스포츠 매체인 ESPN은 알론소가 올해 커리어 하이(Career High) 시즌을 보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6월 14일 기준 타율(7위), 2루타(1위), 홈런(6위), 타점(1위) 등 주요 지표에서 모두 10위 내에 랭크되어 있고, 그중 타점은 63개로 독보적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2위와 6개 차이).
아니면 혹시 피트 알론소에게도 신의 개입이?
쓰고 보니, 오늘은 메이저리그 이야기보다 축구 이야기에 가까웠네요.
부디, 빠더니.
※ 8월 31일까지 열리는 이랜드 뮤지엄의 ‘위대한 축구선수 100인전’에는 디디에 드록바 외에도 다른 99명의 감동적인 사연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꼭 한번 방문할 것을 추천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