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⑫ 56경기 연속 안타, 조 디마지오
연재

조 디마지오 Ⓒ MLB.com
Have faith in the Yankees my son. Think of the great DiMaggio.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中
조 디마지오는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의 계보를 잇는 뉴욕 양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중견수 중 한 명입니다. 디마지오의 통산 성적은 13시즌 1,736경기 2,214안타 361홈런 1,537타점 30도루 타율 0.325 출루율 0.398 OPS 0.977로, 얼핏 앞서 언급한 명성에 비해 부족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디마지오는 표면적인 기록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선수입니다.
디마지오는 대공황의 여파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어수선했던 시절, 미국인들에게 위로가 되어준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기 때문입니다. 1941년 디마지오는 지금까지도 가장 깨기 어려운 기록으로 꼽히는 '56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냈습니다. 이 시기 미국인들은 "오늘도 디마지오가 안타를 쳤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인사말을 대신할 정도였죠. 그래서 붙은 별명이 '국민적 기쁨(National pleasure)'입니다.
디마지오는 선수 생활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올스타에 뽑혔고, 양키스를 10번의 아메리칸리그 1위와 9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승리자'이기도 합니다. 커리어 통산 9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은 팀 동료이자 후배였던 요기 베라(10번)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기록이죠. 또한, 디마지오는 야구 외적으로도 마릴린 먼로와의 러브 스토리로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이기도 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야구 천재

샌프란시스코 실스 시절 조 디마지오 Ⓒ MLB.com
디마지오의 본명은 '주세페 파올로 디마지오(Giuseppe Paolo DiMaggio)'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동쪽으로 25마일 떨어진 어촌인 마르티네즈에서 이탈리아(시칠리아)계 이민자 부부의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다섯 아들 모두 자신처럼 어부가 되기를 바랐는데요. 하지만 디마지오는 아버지와 함께 어선에 오르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린 디마지오의 관심은 온통 야구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죠.
디마지오는 10살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고, 갈릴레오 고교를 중퇴한 뒤 1931년까지 샌프란시스코의 여러 아마추어 및 준 프로 팀에서 뛰었는데요. 1932시즌이 끝날 무렵, 퍼시픽코스트리그(PCL)의 샌프란시스코 실스에서 뛰던 그의 형 빈스는 감독인 아이크 캐비니에게 17세의 디마지오를 추천했습니다. 디마지오는 시즌 마지막 3경기에 출전한 후 1933년 월급 225달러에 계약을 맺으며 프로야구에 뛰어듭니다.
프로 입단 첫해인 1933년 디마지오는 61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내며 마이너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긴 기록을 세웠고, 이듬해인 1934년에도 타율 0.341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지만, 8월에 택시에서 내리던 중 오른쪽 무릎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구단들이 디마지오 영입전에서 철수했는데요. 그러나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 빌 에식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빌 에식은 양키스 구단에 디마지오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고 설득했고, 양키스는 디마지오가 1935년 실스에서 뛰면서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그를 영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듬해인 1935년 부상에서 회복한 디마지오는 타율 0.398 34홈런 154타점을 기록하면서 실스를 PCL 우승으로 이끌고 MVP에 선정됐는데요. 양키스는 약속대로 실스 구단에 5만 달러와 선수 5명을 주고 디마지오를 영입했습니다.
엄청난 기대 속에서 '베이브 루스의 후계자'로 인정받다

양키스 입단 초기 조 디마지오 Ⓒ MLB.com
양키스에 입단한 디마지오는 첫 스프링 트레이닝부터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 1936년 3월 <스포팅뉴스>는 "양키스 팬들은 그(디마지오)를 황무지에서 팀을 이끌어갈 모세처럼 여긴다"라고 묘사했죠. 디마지오는 불과 2년 전까지 베이브 루스가 맡았던 양키스의 3번 타자로 빅리그 데뷔전을 치릅니다.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디마지오는 첫해부터 타율 0.323 29홈런 125타점 OPS 0.928을 기록합니다.
디마지오가 데뷔한 1936년 양키스는 102승 2무 51패(0.667)로 리그 1위를 차지한 후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자이언츠를 4승 2패로 꺾고 4년 만에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디마지오는 처음 출전한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346으로 4번 타자인 루 게릭과 함께 양키스의 우승을 이끌며 '베이브 루스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는데요. 월드시리즈 종료 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간 그는 고향 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듬해 디마지오는 타율 0.346 46홈런 167타점 OPS 1.085로 홈런(46)·득점(151)·장타율(.673)·총 루타(418)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2루수 찰리 게링거에게 밀려 아메리칸리그(AL) MVP 투표 2위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소속팀 양키스는 102승 3무 52패(0.662)로 리그 1위에 오른 후 월드시리즈에서 자이언츠를 다시 한번 4승 1패로 꺾으며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합니다.
디마지오는 1938년 타율 0.324 32홈런 140타점 OPS 0.967을 기록했고, 양키스는 정규 시즌 99승 5무 53패(0.651)로 리그 1위에 오른 데 이어 월드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를 4연승으로 꺾고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합니다. 월드시리즈 3연패는 루스의 시대에도 달성하지 못한 업적이었죠. 이해 디마지오는 양키스의 캐스터인 아치 맥도날드로부터 '양키 클리퍼(The Yankee Clipper, 쾌속 범선)'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양키스의 쾌속 범선(The Yankee Clipper)

디마지오는 1939년 타율 0.381 30홈런 126타점 OPS 1.119로 생애 첫 타격왕 및 MVP를 수상했고, 양키스를 4시즌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0년 타율 0.352 31홈런 133타점 OPS 1.051을 기록하면서 2시즌 연속 타격왕에 오르죠. 하지만 디마지오의 커리어에서 가장 유명한 업적은 1941년에 나왔는데요. 바로 메이저리그 신기록인 '56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낸 겁니다.
디마지오는 1941년 5월 15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투수 에디 스미스를 상대로 4타수 1안타를 기록하면서 연속 안타 기록을 시작했습니다. 이날까지 그는 타율 0.194에 그치고 있었고, 양키스는 리그 4위에 머물고 있었죠. 디마지오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30경기 연속 안타로 양키스의 기록을 깨면서부터였는데요. 이후 연속 안타 기록이 계속 늘어나면서 점차 전국적으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미국인들은 "오늘도 디마지오가 안타를 쳤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인사말을 대신했습니다. 전국적인 관심 속에서 디마지오는 6월 29일 워싱턴 새너터스와 더블헤더 2차전에서 안타를 때려내며 조지 시슬러가 1922년에 세운 현대 야구 기록인 41경기 연속 안타를 경신하는데요. 디마지오의 기록은 15일 후인 7월 17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56경기 연속 안타를 마지막으로 끝납니다.
놀라운 점은 디마지오가 기록이 끝난 다음날부터 다시 16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내면서 73경기 중 72경기에서 안타를 기록했다는 겁니다. 만약 7월 17일 클리블랜드전에서 안타를 때려냈다면 디마지오의 연속 안타 기록은 73경기가 될 수도 있었죠. 디마지오는 1941년 타율 0.357 30홈런 125타점 OPS 1.083으로 타점왕에 오르면서 두 번째 MVP를 수상했고, 양키스도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플레이 스타일

조 디마지오 Ⓒ MLB.com
디마지오는 전형적인 5툴 플레이어였습니다. 타격뿐만 아니라 빠른 주력과 강한 어깨, 뛰어난 수비력을 갖춘 선수였죠. 1931년부터 1946년까지 양키스의 감독이었던 조 매카시는 디마지오를 자신이 본 최고의 주자라고 회고했는데요. 동시대 최대 라이벌이었던 테드 윌리엄스조차도 "우리 시대 최고의 선수는 디마지오였습니다. 저는 그보다 타격이 뛰어났지만,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디마지오의 가장 큰 장점은 웬만해서는 거의 삼진을 당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디마지오는 타석에서 다리를 넓게 벌리고 서서 스윙을 하기 전까지 움직임을 최소화했는데요. 이러한 방식으로 통산 6821번의 타석에서 369번의 삼진밖에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통산 홈런 361개보다 고작 8개 더 많은 수치였죠. 디마지오의 연속 안타 기록 역시 어떻게든 인플레이 타구를 만드는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디마지오는 1942년 타율 0.305 21홈런 114타점 OPS 0.875로 커리어 로우를 기록합니다. 양키스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죠. 이는 그의 커리어에서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10번 가운데 유일하게 우승하지 못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3년 2월 17일 디마지오는 많은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그랬듯이 육군 항공대에 입대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디마지오는 입대 후 캘리포니아주 산타아나, 하와이,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 등지에서 주둔하며 체육 강사로 복무했지만 만성 위궤양으로 인해 1945년 9월 퇴역했습니다. 디마지오는 전장에서 복귀한 후 첫 해인 1946년 타율 0.290 25홈런 95타점 OPS 0.878로 명성에 비해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냈고, 시즌 종료 후에는 왼쪽 발꿈치에서 뼈 돌기를 제거하는 수술과 해당 부위에 피부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습니다.
단 한순간도 빛나지 않은 적이 없었던 선수

조 디마지오 Ⓒ MLB.com
디마지오는 수술 여파로 인해 1947년에도 4월까지 타율 0.143에 그칩니다. 하지만 5월부터 반등에 성공한 그는 타율 0.315 20홈런 97타점 OPS 0.913으로 양키스를 4년 만에 리그 1위로 이끌면서 세 번째 MVP에 선정됐고, 다저스와 월드시리즈에서 홈런 2개를 때려내며 팀의 우승을 견인합니다. 그리고 1948년 타율 0.320 39홈런 155타점 OPS 0.994로 홈런·타점 부문 1위를 차지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이듬해인 1949년 디마지오는 오른쪽 발꿈치 부상으로 인해 첫 65경기를 놓쳤습니다. 그러자 언론에서는 '양키 클리퍼'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떠들어댔는데요. 그러나 6월 중순부터 통증이 사라지면서 극적으로 복귀한 디마지오는 76경기에서 타율 0.346 14홈런 67타점 OPS 1.055를 기록하면서 양키스의 정규 시즌 1위를 이끌었고, 그 해 양키스는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를 꺾고 또 한 번의 우승을 차지합니다.
디마지오는 1950년 타율 0.301 32홈런 122타점 OPS 0.979을 기록했고, 양키스는 월드시리즈에서 필라델피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나이와 부상으로 인해 1951년에는 116경기 출전에 그쳤고 타율 0.263 12홈런 71타점 OPS 0.787으로 최악의 부진을 겪었죠. 그러자 1951년 12월 만 37세의 나이로 은퇴를 발표했는데요. 디마지오는 <스포팅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은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양키스 구단과 코칭스태프 그리고 팀 동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형편없는 한 해를 보냈지만 타율 0.350을 기록한다고 하더라도 올해가 제 마지막 시즌이었을 겁니다. 통증으로 인해 야구를 하는 것이 저에게는 고된 일이 됐습니다. 야구를 더 이상 즐기지 못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야구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제 마지막 경기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은퇴 후의 삶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 MLB.com
대부분의 스포츠 스타와는 달리 디마지오는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대중의 관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특히 1954년 1월 마릴린 먼로와 결혼을 발표하면서 화제의 중심이 됐는데요.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두 남녀 스타의 결혼은 불과 9개월 동안만 유지됐습니다. 디마지오는 결혼을 하면 먼로가 헌신적인 주부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먼로는 결혼 후에도 영화배우의 커리어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둘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디마지오의 질투, 통제적인 태도, 신체적인 학대 그리고 먼로의 배우로서 바쁜 삶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는데요. 하지만 디마지오는 이혼 후에도 먼로를 잊지 못했습니다. 1962년 먼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디마지오는 장례식을 주관했다. 이후에도 디마지오는 20년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그녀의 무덤에 붉은 장미 여섯 송이를 놓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누구와도 다시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디마지오는 1955년 네 번째 투표에서 88.8%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현역 은퇴 후 야구계를 떠났던 그는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부사장 겸 코치로 일하며 레지 잭슨과 조 루디를 비롯한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 기여했죠. 훗날 이들은 1972년부터 1974년까지 3년 연속 월드시리즈의 주역이 됩니다. 디마지오는 1999년 1월 19일 84세의 나이에 폐암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디마지오의 마지막 말은 "드디어 마릴린을 볼 수 있게 됐군"이었습니다. 그의 사망 후 2개월이 지난 1999년 4월 양키스타디움의 모뉴먼트 파크에는 밀러 허긴스, 루 게릭, 베이브 루스, 미키 맨틀에 이어 5번째로 디마지오의 기념비가 세워졌는데요. 비문에는 "야구의 전설이자 미국의 상징"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양키스는 그의 등번호 5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고, 1999시즌 동안 유니폼 왼쪽 소매에 5번을 달았습니다.
Joe DiMaggio 선수가 1950년에 소속된 뉴욕 양키스 월드 시리즈 반지
이 반지는 1950년 뉴욕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로 조 디마지오의 아들인 조 디마지오 주니어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지 내부에는 '조 디마지오'의 이름이 세겨져 있으며, 금(14K)으로 제작되었고 가운데에는 다이아몬드(진품)가 세팅되어 있습니다. 해당 시즌 디마지오는 만 35세의 나이로 타율 0.301 32홈런 122타점 OPS 0.979을 기록하며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