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민훈기의 필드노트 : 강렬했던 다저스 좌완 샌디 코팩스의 온화한 미소 EP.12
연재
1996년부터 매년 봄이면 플로리다 주 베로비치(Vero Beach)로 장기 출장을 갔습니다.
LA 다저스에서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하며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박찬호와 다저스, 그리고 MLB 시범경기 등을 취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언제부턴지 백발의 아주 날씬하고(?) 단단한 체격의 초로의 아저씨가 늘 나타났습니다.
늘 여름인 그곳 기후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반바지에 티셔츠를 편히 입고 투수들의 피칭을 지켜보던 그 분은 바로 전설의 좌완 투수 샌디 코팩스(Sandy Koufax)씨였습니다. 특히 박찬호 선수에게 애정을 보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을 아끼지 않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아마도 자신을 닮은 강속구 투수인데다 제구력은 매끈하지 않았던 박찬호의 모습에 스스로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던 것도 같습니다.
1935년 뉴욕 브룩클린에서 태어난 코팩스의 본명은 샌포드 브라운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샌디’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그는 회계사인 아버지 잭 브라운과 어머니 에벌린 리첸스타인 유태인 부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샌포드가 세 살 때 부모는 이혼을 했고 그가 9세 때 어머니가 변호사인 어빙 코팩스와 재혼을 하면서 샌디 코팩스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샌디의 스포츠는 야구가 아니라 농구였습니다.
185cm에 95kg의 단단한 체구였던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센터부터 가드까지 모든 포지션을 소화하는 전천후 농구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신시내티 대학에 진학했을 때만 해도 코팩스는 일반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다 농구를 하고 싶어서 신입생 농구팀 테스트에 응했고, 대번 감독의 눈에 들어 곧바로 농구장학생이 될 정도로 그의 농구 실력은 대단했습니다. 대학에서 미리 스카우트하지 않은 선수가 테스트 거쳐 운동 장학금을 받는 일은 요즘에도 아주 아주 드뭅니다.
그런데 대학 야구팀이 뉴올리언스에서 스프링 캠프를 차린다는 것을 들은 코팩스는 따분한 봄방학을 보내느니 야구팀에나 지원을 해보자며 룸메이트 노만 렙코위치와 함께 트라이아웃을 신청했습니다. 코팩스가 얼마나 공을 세게 던지든지 두 명의 포수가 공받기를 거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전설의 시작이었을까요,
그렇게 해서 결국 야구팀 투수가 된 코팩스였지만 그때만 해도 공은 빠르지만 제구력은 형편없는 그런 신참 투수였습니다. 야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당연했습니다. 어린 시절 리틀리그와 학교팀에서 야구를 하기는 했지만 코펙스는 왼손잡이 포수부터 3루수, 1루수 등을 했지만 투수는 거의 한 적이 없었습니다.
1953년 대학 시즌에 코팩스는 3승1패 2.81을 기록했는데 32이닝 동안 51개의 삼진을 잡았지만, 볼넷도 30개나 내줬을 정도였습니다.
1954년 대학 재학 중 세 번의 프로입단 테스트 끝에 다저스가 2만 달러(계약금 1만6000+연봉 6000)를 제시했고, 코팩스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건축가가 되고 싶었던 코팩스는 야구 선수로 잘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니 나중에 건축학교에 등록할 학비를 모으려고 계약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계약금이 4000달러 이상인 선수는 2년간 마이너로 보낼 수 없다는 희한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저스는 코팩스를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포함시켜야 했고,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마이너로 쫓겨난 선수가 바로 후에 다저스의 명감독이 된 왼손 투수 토미 라소다 였습니다. 기교파로 커브가 발군이었다는 라소다 감독은 마이너리그에서 한 경기 삼진 25개를 잡은 이야기를 다저스 기자 식당에서 떠벌이곤 했는데, ‘그놈의 샌디 때문에 내가 빅리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며 농담반 진담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식당에 있으면 어느 자리에서도 들릴 정도로 목소리도 컸고, 저만해도 그 얘기를 몇 번은 들었습니다 ^^
1955년 구원 투수로 시작해 7월 6일 처음 선발 등판한 경기에서 4.2이닝 동안 8개의 볼넷을 내주고 강판됐던 코팩스는 거의 두 달 만인 8월27일 생애 두번째 선발 경기에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2안타 14K 7-0 완봉승으로 본인의 첫 메이저리그 승리를 장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에 코팩스는 41.2이닝을 던진 것이 전부였고 2승2패에 ERA 3.02를 기록했습니다. 삼진이 30개였지만 볼넷도 28개나 됐습니다. 물론 2승이 모두 완봉승이기도 했지만 말압니다.
1955년 19세에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샌디는 첫 6년 동안 공은 대단히 빠른데 제구는 몹시 흔들리는 불안정한 투수였습니다.
1958년에 11승 11패로 첫 두 자릿수 승리를 거뒀지만 158.2이닝을 던지며 삼진 131개를 잡았지만 볼넷도 105개나 내줬습니다.
당시 다저스의 포수였던 놈 셰리(Norm Sherry)가 해준 한마디 조언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당시 시범 경기에서 또 스트라이크존에 공을 넣지 못해 애를 먹던 코팩스에게 셰리는 마운드로 올라가 “조금 힘을 빼고 공을 넣어봐. 그렇게 세게만 던지려 하지 말고, 그냥 스트라이크만 넣자는 느낌으로 던져봐”라고 조언했습니다
코팩스는 포수의 조언대로 강속구를 생각하지 않고 포수 미트만 보고 던지는데 집중했는데, 신기하게도 오히려 공이 더 빠르고 정확하게 꽂히기 시작했습니다. 힘을 빼자 제구가 잡히고 공끝은 더 살아나는 효과가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 이닝을 삼진 3개로 깔끔하게 막은 뒤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셰리는 코팩스에게 “아까보다 힘을 빼서 던졌는데도 공이 더 빨라진 것 느꼈지?”라고 말했고, 코팩스에게는 큰 깨달음의 순간이었습니다
마이너 강등 위기도 몇차례 있었지만 강속구에 대한 코칭스태프의 미련으로 버텼던 샌디는 1961년 18승을 거두며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까지 58년간 깨지지 않던 크리스티 매튜슨의 한 시즌 최다 탈삼진 267개의 기록을 넘어서 269 삼진을 잡으며 다저스는 물론 전국의 야구팬들을 매료시켰습니다.
특히 매시즌 9이닝당 5~6개의 볼넷을 내주던 그는 1961시즌 이 수치를 3.4개로 줄였습니다. 그리고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9이닝당 평균 볼넷 3개를 넘긴 적이 없었고, 1.7개, 1,9개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최고의 제구력을 지닌 최강의 강속구 투수가 된 것입니다.
참고로 2024시즌 규정 이닝 투수 중에 BB/9이 2개 미만이던 투수는 MLB에 9명, KBO에 4명이 있었습니다.
1960년 시즌이 끝나는 날 글러브와 스파이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며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던 샌디였습니다. 그런데 포수 셰리의 그 한마디와 함께 MLB 역사에 남을 좌완 투수로 탈바꿈했으니, 한 선수의 인생과 그리고 야구 역사를 바꾼 조언이었습니다.
1963년 40경기 선발로 나서 20번의 완투를 비롯해 25승 5패 ERA 1.88에 311이닝을 던지면서 삼진 306개, 볼넷 58개를 기록한 쿠팩스는 1965 시즌에는 26승 8패, 1966시즌에는 27승 9패를 거둡니다.
그리고 19승을 거뒀던 1964시즌까지 하면 4년간 무려 97승을 거두는 MLB 역사상 기장 압도적인 4시즌을 보냈습니다.

1965년 9월 9일(미국시간) 샌디는 LA 다저스타디움에서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퍼펙트게임을 달성합니다. 시카고 컵스가 상대였는데, 코팩스는 단 한 명의 주자도 내보내지 않고 27명의 타자를 연속으로 아웃시키며 MLB 역대 8번째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상대 선발 투수 밥 헨드리도 이날 단 1개의 피안타만을 허용하는 눈부신 투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경기는 1-0으로 다저스가 신승을 거두었는데, 유일한 1점을 낸 과정도 극적입니다. 5회말 다저스 공격에서 선두 타자 루 존슨이 볼넷으로 출루한 뒤 희생번트로 2루에 진루했고, 이어서 3루 도루를 시도했습니다. 이때 컵스 포수의 송구 실책으로 공이 외야로 빠지는 바람에 존슨은 홈까지 파고들었고, 다저스는 안타 없이 1점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 1점이 그날 승부를 갈랐고, 코팩스는 퍼팩트 게임, 헨드리는 거의 노히트노런 투구를 하고도 패전을 기록했습니다. 양팀 합쳐 딱 1안타 경기!!!
샌디의 경기 내용도 그야말로 퍼펙트였습니다.
총 14개의 삼진을 잡았는데, 대타 포함 11타자 중에 어니 뱅크스의 3삼진 포함 10명이 삼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8,9회에는 6타자 연속 삼진으로 113구만에 경기를 마무리했습니다. 퍼펙트게임 최초로 매 이닝 삼진을 잡았고, 14K는 퍼펙트게임 역대 최다 기록.(2012년 매트 케인이 타이)
훗날 야구 전문가들의 투표에서 이 경기가 ‘역사상 가장 잘 던진 경기’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 퍼펙트 게임은 샌디의 통산 4번째 노히트노런이자, 4년 연속 노히트 달성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이었습니다.
또 한 경기는 월드시리즈였습니다.
1963년 월드시리즈에서 LA 다저스는 명문 뉴욕 양키스를 만났는데, 1차전 선발로 나선 코팩스는 양키스 타자 15명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눈부신 투구를 펼쳤습니다.
당시 양키스는 미키 맨틀, 로저 마리스, 요기 베라 등 내로라하는 강타자들을 거느린 최강팀이었지만, 코팩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1회부터 연속 삼진 행진을 이어간 코팩스는 15개의 탈삼진으로 월드시리즈 한 경기 최다 탈삼진 신기록을 세웠고, 다저스는 그 경기에서 5-2로 승리했습니다
코팩스의 강렬한 투구에 서전부터 기가 눌린 양키스 타선은 시리즈 내내 힘을 쓰지 못했고, 다저스는 4전 전승으로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월드시리즈에서 늘 양키즈에 막히곤 했던 다저스에겐 달콤한 복수극이었고, 샌디가 4차전에서도 완투승을 거두며 그 선봉에 섰습니다.
당시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는 1차전 15K 패전 후 “코팩스가 25승을 거둔 것은 알겠는데, 대체 5패는 어떻게 당한 건지 이해가 안 된다”라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코멘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샌디 코팩스의 화려한 야구 생애는 최정상에서 갑자기 끝나고 맙니다.
1966년 시즌을 27승 9패, 1.73 ERA라는 경이적인 성적으로 마무리하며 또 사이영 상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그해 이른 겨울 만 30세의 이른 나이에 샌디는 전격 은퇴를 선언, 야구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사실 코팩스는 1964년부터 극심한 왼팔꿈치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진통제와 얼음찜질에 의존하며 투구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주치의는 이미 1965년 후반기에는 “더 던지면 일상생활에 지장 있을 수 있다”는 경고를 했습니다. 1966년 시즌을 앞두고는 “이번 시즌을 뛰는 건 위험하다”고 경고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투혼으로 버티며 1966시즌 커리어 최고의 성적을 올렸지만 월드시리즈에서 볼티모어에게 패한 후(코펙스는 1경기 6이닝 1실점 패전 투수) 그는 ‘후회 없는 마무리’를 선택했습니다.
샌디 코팩스의 빅리그 생활은 12년에 불과했고, 그중에 절반은 스트라이크존을 찾느라 보냈지만, 165승 87패, 통산 ERA 2.76의 압도적 기록을 남겼습니다.
요즘같이 의술이 발달해 인대접합수술 같은 걸 받았더라면, 코팩스와 야구 역사가 또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남긴 임팩트는 그 어떤 투수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72년에는 샌디는 역사상 최연소인 만 36세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전설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샌디의 위업들을 살펴보면,
-한 시즌 382개의 탈삼진(1973년 놀란 라이언이 383개로 경신)
-한시즌 좌완 투수 최다 완봉승 11번(종전 기록은 베이브 루스가 1916년 세운 9번)
-NL 삼진왕 4번
-NL 다승왕 3번
-4번의 WS에서 평균자책점 0.95
-올스타 6번
-리그 MVP 1번
-사이영상 3번(세번 모두 만장일치, 1967년까지는 빅리그 전체에서 한명만 수여)
-WS MVP 2번
-한 이닝 공9개로 3연속 삼진 2번
아, 은퇴 후 이야기도 잠시 하면 코팩스는 NBC 방송의 야구 해설을 하기도 하고, 다저스 마이너리그 투수 코치를 지내기도 했지만 늘 고독하고 조용히 은둔하는 인물에 가까웠습니다.
영화배우 리차드 위드마크의 딸과 결혼을 했다가 이혼하는 등 두 번의 이혼을 겪은 그는 2000년대까지도 스프링 캠프 때면 다저타운의 베로비치에 나타나 후배들을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박찬호에게도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코팩스를 직접 만나는 행운이 몇 번 있었는데,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도 조용하고 사근사근하며 미소를 잊지 않는 노신사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고집과 프라이드가 대단하고, 개인적안 사진 찍기를 싫어했던 기억도 납니다.
피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아직도 소년처럼 눈을 반짝이며 정열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 곧바로 입을 다무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라이징 패스트볼과 12시에서 6시 방향으로 낙하하는 최고의 커브를 지녔던 코팩스에 대한 선수들의 코멘트를 몇 가지 소개하며 코팩스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코팩스에게 안타를 빼앗는다는 것은 마치 포크로 커피를 마시려는 것과 같다. - 윌리 스타젤
그가 25승을 거둔 것은 이해하겠지만 어떻게 5패나 당했는지 모르겠다. - 요기 베라
그가 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게임을 망친 것이다. - 베라의 말에 다저스 동료 모리 윌스의 답변
최고의 투수에게 패한 것은 불명예가 아니다. - 코펙스에게 퍼펙트게임으로 패한 커브스의 헨드리 투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