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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연재 : 카드로 보는 MLB Story ⑨] ‘스탠 뮤지얼’의 ‘서른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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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스탠 뮤지얼서른 즈음에
故 김광석의 노랫말로 풀어본 스탠 뮤지얼의 인생 이야기
 
 
 
 
 
 
ⓒ EBS 지식채널e(서른 즈음에, 143화 2006년 8월 21일 방송)
 
 

누구나 스스로의 나이에 대한 무게는 스스로 감당해 내면서 지냅니다. 10대 때에는 거울처럼 지내지요. 자꾸 비추어보고, 흉내 내고. 선생님, 부모님, 또 친구들. 그러다 20대 때쯤 되면, 뭔가 스스로를 찾기 위해서 좌충우돌 부대끼면서, 그러고 지냅니다.

 

가능성도 있고. 나름대로, 주관적이든 일반적이든, , 객관적이든. 나름대로 기대도 있고. 그렇게들 지내지요. 자신감은 있어서 일은 막 벌리는데, 마무리를 못 해서 다치기도 하고, 아픔도 간직하게 되고, 그럽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유리처럼 지내지요. 자극이 오면 튕겨내 버리던가, 스스로 깨어지던가.

 

그러면서 그 아픔 같은 것들이 자꾸 생겨나고, 또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면 더 아프기 싫어서 조금씩 비켜나가죠. 피해 가고. 일정 부분 포기하고, 일정 부분 인정하고. 그러면서 지내다 보면 나이에 자 붙습니다. 서른이지요. , 그때쯤 되면 스스로의 한계도 인정해야 되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도, 뭐 그렇게 재미있거나 신기하거나 그렇지도 못합니다.

 

, 그런 답답함이나, 재미없음이나, 그런 것들이, 그 즈음에, 그 나이 즈음에. 저뿐만이 아니라, 또 후배뿐만이 아니라, 다들, 친구들도 그렇고, 비슷한 느낌들을 가지고 있더군요.”

 

- <1995.8.27. 소극장 공연 중, 故 김광석>

 
 
 

우리는 인생의 부침을 겪을 때마다 김광석의 노래를 감기약처럼 꺼내 듣습니다.

 

이별의 아픔을 겪었을 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군대에 갔을 때, 혹은 서른 즈음에.

 

그의 노래는 등대처럼 한결같이, 늘 그 자리에 있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좌절하거나 슬퍼할 만한 인생의 구간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어떤 때는 그의 노래가 왔어? 오랜만이네. 잘 왔어. 조금 쉬었다 가. 하며, 반겨주는 느낌도 듭니다.

 

故 김광석의 노래들은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우리네 삶에 등장해 기꺼이 우리 인생의 OST’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그러고는 기어코 웅크리고 있는 우리를 부축해 그 노래의 주인공으로, 나아가 삶의 주인공으로 다시금 일으켜주곤 했지요.

 

아마도 그의 노래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힘, 시대를 관통하는 힘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故 김광석의 노래는 투박하지만 맵시 있는, 유행을 타지 않는,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는 옷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군가에겐 그저 푹 눌러쓰면 그만인 야구모자일 수도 있겠고요.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여전히 그의 통기타와 하모니카 소리, 마음을 울리는 애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참 다행한 일입니다. 그중 하모니카는 그의 노래의 시작을 알리는, 마치 항해를 앞둔 배의 뱃고동 소리와도 같았습니다.

 

하모니카사람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악기라고 합니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추억하게 하는 하모니카 소리.

 

 

이역만리 미국 땅의 한 메이저리거도 하모니카를 불곤 했는데요. 바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St. Louis Cardinals)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6) 주인공이자 명예의 전당 멤버인 스탠 뮤지얼(Stan Musial, 본명 : Stanislaw Franciszek Musial)’입니다.

 

 

 

 

 

 

 

ⓒ 스탠 뮤지얼의 하모니카 연주 장면(National Baseball Hall of Fame and Museum)

 

 

스탠 뮤지얼<스탠 뮤지얼의 하모니카 연주(Stan Musial Plays the Harmonica)>라는 악보집을 발간할 정도로 하모니카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명예의 전당 헌액식, 자선행사를 포함한 다양한 행사에서 하모니카를 자주 연주했으며, 특히 ‘Take Me Out to the Ballgame’이라는 곡을 좋아했습니다. 이 곡은 MLB를 대표하는 노래이자 가장 오래된 응원가로 알려졌으며, 1908앨버트 본 틸저(Albert Von Tilzer, 1878~1956)가 작곡하고, 잭 노워스(Jack Norworth, 1879~1959)가 작사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직접 하모니카를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스탠 뮤지얼은 다른 뮤지션들과 함께 음악 그룹을 결성하기도 하는 등 은퇴 후 인생 2을 음악과 함께 보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모니카를 배운 그는 입술을 오므리고 숨을 불어넣기만 하면 된다,하모니카를 연주하는 것은 야구를 하는 것만큼이나 재미있다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스탠 뮤지얼은 현역 시절엔 야구 배트로 감동을, 은퇴 후엔 작은 하모니카 하나로 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 스탠 뮤지얼(USA Today)

 

 

그는 2013119, 92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MLB 사무국은 스탠 뮤지얼은 진정한 신사였다. MLB 전체가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공개 모임에서 하모니카를 연주하던 그는 소박하고, 다정하고, 서민적이었다. 그는 단순한 야구 영웅이 아니라 미국의 아이콘이었다며 그를 그리워했습니다.

 

애도의 물결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해 시즌이 시작되고 412일 세인트루이스의 홈구장인 부시 스타디움(Busch Stadium)’에서는 스탠 뮤지얼을 위한 팬들의 답가가 연주됐습니다. 이날 경기장을 찾은 팬들은 입장하면서 하모니카를 받았고, 팬들은 그의 등번호와 동일한 6에 생전 그가 좋아하던 ‘Take Me Out to the Ballgame’을 다 같이 연주했습니다. 몇몇 팬들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 스탠 뮤지얼을 추모하는 팬들의 하모니카 연주 장면(MLB.com)

 

 

스탠 뮤지얼은 통산 3,026경기에 출전했는데, 단 한 번도 퇴장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기자들을 질책하거나 언론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감독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경기장에서 주먹다짐을 벌인 적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신사 중의 신사였습니다.

 

 

  

 

#겸손 #예의 #품위 #신사 #서민적 #하모니카 #음악

 

 

 

스탠 뮤지얼? 김광석? 이름을 가리면 누구를 나타내는 키워드인지 헷갈립니다. 분야는 달랐지만, 미국의 스탠 뮤지얼과 대한민국의 김광석은 삶의 결이 참 비슷했습니다. 둘은 꾸준함의 대명사이기도 했습니다. 스탠 뮤지얼은 종종 “매 경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지 않으면, 경기에서 뛰는 건 의미가 없다고 말했고, 김광석도 국내 최초 1,000회 공연 기록을 달성한 후 주변에 살아가시는 분들이 다들 자기 직업에 충실해서 직장 다니시고 그러듯이 저도 제 가수라는 직업에 충실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다 보니까 1,000회가 됐습니다라고 인터뷰한 바 있습니다.

 

그럼 故 김광석의 노랫말들을 스탠 뮤지얼의 인생에 빗대어 보면 어떨까요? 과연 스탠 뮤지얼에게도 잘 어울리는 옷일까요? 아마 노래를 다 듣고 나면, 스탠 뮤지얼도 고개를 끄덕일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내 노래다 하면서 말이지요.

 

 

 

 

 

 

 

Track 01. 그녀가 처음 울던 날

 

그녀의 웃는 모습은 활짝 핀 목련꽃 같아. 그녀만 바라보면 언제나 따뜻한 봄날이었지.

 

스탠 뮤지얼의 관심사가 야구에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농구, 탁구, 댄스에서도 많은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도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늘 밝은 미소와 유쾌한 성격 덕분에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운동 잘하는 인기 많은 남자친구였습니다. 당연히 누군가는 그를 눈여겨 보고 있었겠지요. 바로 릴리언 수잔 라바쉬(Lillian Susan Labash)’라는 갈색 머리 소녀였습니다.

 

 

ⓒ 뮤지얼 부부(jrsbullpen.com)

 

 

1934릴리언의 아버지가 도노라 징크스(Donora Jinx)’ 팀의 경기를 보러 데려가면서 이 둘은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15세였던 스탠 뮤지얼은 세미 프로 야구팀에서 투수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스탠 뮤지얼릴리언은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 되었고, 1940525일 결혼했습니다. 스탠 뮤지얼은 당시 릴리언에 대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Track 02.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스탠 뮤지얼베이브 루스(Babe Ruth)처럼 처음엔 투수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38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한 후 좌완 투수로 뛰었지만, 그해 811일 선수 부족으로 중견수로 뛰던 중 다이빙 캐치를 하다 왼쪽 어깨에 큰 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수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진단이 나왔고, 한동안 야구를 완전히 그만두는 것까지 고려했습니다.

 

 

ⓒ 스탠 뮤지얼의 수비 장면(Sports Illustrated)

 

 

하지만 당시 팀의 감독이었던 디키 커(Dickey Kerr)는 그가 야구를 그만두지 않도록 설득했고, 심지어 재정적인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뮤지얼 부부를 자신의 집에서 지내도록 허락하기도 했습니다. 커 감독1940년 그가 외야수로 뛰면서 타율 .352를 기록한 것을 계기로 타격에 전념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듬해인 1941년 마침내 스탠 뮤지얼은 시즌 막바지에 메이저리그로 승격돼 타수는 적었지만(47타수), 타율 .426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942년 그의 지난해 성적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해 총 140경기에 나와 타율 .315, 147안타, 홈런 10, 72타점을 기록했습니다. 풀 시즌 첫해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를 누르고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1943년엔 안타(220), 2루타(48), 3루타(20), 타율(.357), 장타율(.562)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하며 슈퍼스타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Track 03.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 위로 …

  

스탠 뮤지얼은 역대 가장 기이한 타격 자세 중 하나로 놀라운 기록들을 세워나갔습니다. 왼손잡이인 그는 왼발을 타석 뒤쪽 선에 대고 파고들며 오른발을 왼발보다 약 12인치 앞에 두고 클로즈드 스탠스(Closed Stance)를 취했습니다. 그는 서너 번 연습 스윙을 한 후 우스꽝스러운 훌라춤을 추며 긴장을 풀었습니다.

 

 

 

ⓒ 스탠 뮤지얼의 타격 자세(Sports Illustrated)

 

 

그가 이런 자세를 택한 이유는 그 자세가 플레이트 바깥쪽을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들 그런 자세로는 MLB에서 오래 버틸 수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상대 투수들은 그가 똬리를 튼 방울뱀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잔뜩 웅크린 검객처럼 배트를 휘둘렀습니다. 그의 타구는 총알과 같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타격 폼으로 이런 훌륭한 성적을 낼 수 있었을까요? 다시 생각해봐도 아리송합니다.

 

 

ⓒ 2021 Topps Stadium Club Chrome Gold Refractor #137 Stan Musial(카드 읽어주는 남자)

 

 

 

 

 

Track 04. 이등병의 편지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스탠 뮤지얼은 1945년 1월 22일 해군에 입대해 약 13개월 동안 군복무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야구에 전념할 수 있었고,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진주만 공습 당시 그는 8개 팀으로 구성된 리그에서 뛰었는데, 대부분 메이저리거들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기본 훈련을 위해 메릴랜드(Maryland)主 베인브리지(Bay Bridge)로 배치된 스탠 뮤지얼은 1루수를 맡았습니다. 스탠 뮤지얼은 은퇴 후 자서전을 통해 베인브리지에서 보낸 짧은 시간이 그의 선수 생활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회상했습니다. 스탠 뮤지얼은 외야수였지만, 당시 베인브리지 운동부 장교였던 제리 오브라이언(Gerry O’Brien) 중위가 자신을 1루에 배치했으며, 이따금 수비 실력이 형편없다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또한 베인브리지에서 군인들은 홈런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더 많은 홈런과 장타를 치기 위해 타격 자세를 수정했었다는 것입니다. 군대에서의 1루 경험(훗날 자신의 포지션)장타 생산능력 향상을 위한 노력스탠 뮤지얼을 위대한 타자로 완성하는 밑거름이 되어준 것입니다.

 

 

ⓒ 해군 복무 시절의 스탠 뮤지얼(KDSK.com)

 

 

기본 훈련을 마친 후 그는 캘리포니아 해군 기지로 보내졌고, 진주만 함선을 수리하는 부대에서 복무하기 위해 호놀룰루로 파견되기도 했습니다. 1946년 3월 1일 베인브리지에서 명예 제대함으로써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1946년 세인트루이스에 복귀한 스탠 뮤지얼은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수비 중 슬라이딩을 하다 왼쪽 무릎 인대를 다쳐 포지션을 1루로 바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타율(0.365), 안타(228개), 2루타(50개), 3루타(20개), 득점(124개), 장타율(0.587) 부문 1위에 올랐고, 소속팀을 정규 시즌 1위를 이끌며 커리어 두 번째 MVP에 선정됩니다.

 

 

 

 

 

Track 05. 서른 즈음에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스탠 뮤지얼의 활약은 계속됐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 즈음, 1950년(28세, .346), 1951년(29세, .355), 1952년(30세, .336) 3년 연속 리그 타율 1위를 차지했고, 35세의 나이인 1957년(.351)에도 다시 타율 1위를 차지했습니다. 1958년(36세)에는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대타로 나와 2루타를 치며 자신의 커리어 통산 3,000번째 안타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스탠 뮤지얼은 3,630개의 안타로 커리어를 마쳤는데, 이는 여전히 피트 로즈(Pete Rose, 4,256개), 타이 콥(Ty Cobb, 4,189개), 행크 애런(Hank Aaron, 3,771개)에 이어 4번째로 많은 안타 기록입니다. 스탠 뮤지얼의 커리어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록은 6,134개의 총 루타 기록입니다. 당시 행크 애런(Hank Aaron)6,856개에 이어 역대 2위였습니다(현재는 3위, 2위는 앨버트 푸홀스).

 

 

ⓒ 담배회사 광고모델로 활동한 스탠 뮤지얼(Heritage Auctions)

 

스탠 뮤지얼은 1950년대 ‘Chesterfield Cigarettes’라는 담배회사 광고모델로도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흡연의 해로운 영향에 대해 알게 된 후 더 이상 담배 광고모델로 활동하지 않았고, 주위에 흡연을 권장하지도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스타들이 담배 연기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지만, 스탠 뮤지얼의 30대, 스탠 뮤지얼서른 즈음은 화려했습니다. 야구를 대하는 그의 진지한 태도성실함 덕분이었습니다.

 

 

 

 

 

Track 06. 그날들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스탠 뮤지얼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인 6번을 달고 뛰었습니다. 1963년 9월 29일 은퇴 당시 그는 메이저리그 기록 17개, 내셔널리그 기록 29개, 올스타전 기록 9개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스탠 뮤지얼의 팬이라면 정확한 날짜는 아니더라도, 그를 빛내준 타이틀과 연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 은퇴 당시(1963년) 내셔널리그 역대 안타(3,630개) 1위, 홈런(475개) 2위

⦁ 통산 타율 .331, 내셔널리그 타격왕(7회), 최다 안타 1위(6회)

⦁ 정규 시즌 3,026경기 동안 한 번도 퇴장당한 적 없음.

⦁ 1942년, 1944년, 1946년 월드시리즈 우승

⦁ 1967년 월드시리즈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꺾고 우승할 당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단장

⦁ 24회 연속 올스타전 출전(올스타전 최다 홈런 기록 보유 : 6개)

⦁ 22년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한 팀에서만 3,026경기 출장(내셔널리그 기록)

⦁ 1954년 5월 2일 뉴욕 자이언츠와의 더블 헤더에서 홈런 5개 기록(메이저리그 기록)

⦁ 내셔널리그 MVP : 3회(1943년, 1946년, 1948년)

⦁ 스포팅 뉴스 선정 메이저리그 올해의 선수 2회(1946년, 1951년)

⦁ ‘Sports Illustrated’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선정(1957년)

⦁ 스포츠 매거진 선정 지난 15년간 최고의 선수(1961년)

⦁ 41세의 나이(1962년)로 타율 .330 기록 후 올해의 복귀 선수 선정(타율 부문 3위)

⦁ 명예의 전당 입성(1969년, 득표율 93.2%)

 

 

 

 

 

Track 07. 바람이 불어오는 곳

 

설렘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볼 하늘과 사람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스탠 뮤지얼은 은퇴 후 카디널스 프런트 오피스에서 일했습니다. 1967년 1월 23일 단장으로 임명됐지만, 12월 5일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임했습니다. 당시 그는 “제 직업은 정말 훌륭합니다. 하지만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묻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스탠 뮤지얼은 체질에 맞지 않는 경영보단 사람들과 부대끼며 함께 나누는 삶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20년간 세인트루이스의 장애인아동협회장(Crippled Children’s Society of St. Louis)을 역임했고, 세인트루이스 근이영양실조협회(Muscular Dystrophy Association), 세인트루이스 당뇨병협회(Diabetic Association) 등 다수의 이사회 이사를 역임했습니다. 1957년에는 ‘루게릭 상(Lou Gehrig Memorial Award)’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 美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스탠 뮤지얼(Cardinals Insider)

 

 

2011년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은 스탠 뮤지얼에게 평생의 업적과 봉사정신을 기리고자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이는 미국에서 민간인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로 알려졌습니다. 1947년 흑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이 단지 피부색만으로 언론과 팬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자 재키 로빈슨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스탠 뮤지얼은 일시적인 봉사 활동이 아닌,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자 노력했습니다. 메이저리거로서의 뛰어난 실력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헌신적인 자세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봉사와 나눔 정신은 여전히 많은 미국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Track 08.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
세월이 흘러감에 흰 머리가 늘어가네. 모두가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스탠 뮤지얼의 아내, 릴리얼 뮤지얼은 사실 그가 야구 유니폼이 아닌 농구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보고 반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의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도 참 좋았다고 회상했습니다. 스탠 뮤지얼“우리가 서로를 만나고 함께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부부는 72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뮤지얼 부부는 세인트루이스를 떠난 적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받은 사랑을 돌려줄 수 있을까’를 늘 고민했다고 합니다. 릴리얼 뮤지얼은 또 ‘내조의 여왕’이었으며, 특히 지역 어린이들의 교육을 돕는 데 헌신적이었습니다. 집 없는 가출 소녀들을 돕는 등 항상 다른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스탠 뮤지얼릴리얼 뮤지얼이 평생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 노년의 뮤지얼 부부(St. Louis Post-Dispatch)
 
 

릴리얼 뮤지얼은 노년에 심장 질환과 관절염으로 많은 시간을 휠체어에 의존해 보냈습니다. 릴리얼 뮤지얼은 2012년 5월 3일 오후 6시, 세인트루이스 라듀(Ladue)에 있는 부부의 자택에서 91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등번호를 남기고 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스탠 뮤지얼의 등번호가 6번이었기 때문입니다(오후 6시 운명). 스탠 뮤지얼은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그녀의 손을 꼬옥 잡고 그녀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Track 09.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 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릴리얼 뮤지얼스탠 뮤지얼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먼저 눈을 감자 스탠 뮤지얼의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위궤양(1983년)과 전립선암(1989년)을 앓기도 했지만 완쾌됐었습니다. 하지만 왼쪽 무릎 인대 제거 수술로 다리를 절었습니다.

 

ⓒ 1943년의 뮤지얼 부부(jrsbullpen.com)

 

 

스탠 뮤지얼은 항상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낼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눈을 감은 후엔 그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라이브 무대(YouTube.com)

 

 

 

 

 

 

Track 10. 먼지가 되어

 

작은 가슴 모두 모두어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릴리얼 뮤지얼이 없는 세상은 큰 의미가 없었나 봅니다. 알츠하이머 증상으로 고통받고 호스피스 치료를 받던 스탠 뮤지얼은 2013년 1월 19일 그녀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스탠 뮤지얼은 일리노이主 크레브 코어(Creve Coeur)의 벨러리브 헤리티지 가든(Bellerive Heritage Gardens)에 그의 사랑 릴리얼 뮤지얼과 함께 안치되었습니다. 

 

ⓒ 2013년 스탠 뮤지얼의 장례식 장면(St. Louis Post-Dispatch)

 

 

스탠 뮤지얼의 사망 소식에 윌리 메이스(Willie Mays)“오늘은 저에게 매우 슬픈 날입니다. 저는 스탠 뮤지얼을 아주 잘 압니다. 올스타전에서 저를 24번이나 챙겨주었죠. 그는 인종 문제를 진지하게 이해하고, 늘 최선을 다하는 진정한 신사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는 경기장 안팎에서 진정한 신사였습니다. 그 누구도 그에 대해 나쁘게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 윌리 메이스와 스탠 뮤지얼(eBay.com)

 

 

 

 

 

Track 11.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맘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팬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스타(star), 자신만의 영웅(hero)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인지, 그 별이 졌을 때 마주하는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라고 합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팬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스탠 뮤지얼을 그리워하는 팬들은 먼저 눈을 감은 그에게 짧은 이별의 편지를 썼는데요. ‘MLB.com’은 이 글귀들을 모아 온라인 공간에서 스탠 뮤지얼을 추모했습니다.

 

  • 스탠, 당신은 운동선수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정말 위대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 안톤 콜로바스(Anthone Colovas)

 

  • 경기장 안팎에서 위대한 사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 뮤지얼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카디널스와 우리 도시에 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편히 쉬세요. 그리고 당신의 사랑스러운 아내에게 키스해주세요. 우리는 당신을 그리워할 겁니다.   - 팸 클린드워스(Pam Klindworth)

 

  • 야구를 향한 당신의 헌신에 감사합니다. 제 마음은 무겁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개막일에 없다는 사실이 고통스럽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마음에 영원히 새겨져 있을 겁니다. 드디어 릴리안과 함께 하게 되셨군요.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집니다. … 당신 덕분에 천국은 더욱 밝은 곳이 되었겠네요. 고마워요, 스탠 뮤지얼. 고마워요.   - 칼라 오그덴(Carla Ogden)

 

  • 1958년 저는 열 살이었고, 그때 야구와 처음 사랑에 빠졌습니다. 제 영웅은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들이었습니다. 스포츠 잡지에서 읽었는데, 2센트 짜리 엽서를 보내면 몇몇 선수들이 사인을 해서 보내준다는 내용이었어요. 1958년 여름, 저는 하비 쿤(Harvey Kuehn), 짐 버닝(Jim Bunning), 행크 아귀레(Hank Aguirre), 프랭크 볼링(Frank Bolling), 얼리 윈(Early Wynn), 레드 쇤디엔스트(Red Schoendienst), 밥 털리(Bob Turley), 돈 라슨(Don Larsen), 토니 쿠벡(Tony Kubek)으로부터 9장의 엽서를 받았고 매우 기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서류용 봉투를 받았는데, 그 안에는 당신의 서명이 포함된 사진(8x10 크기)이 들어 있었습니다. 당신 같은 남자를 영웅으로 삼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제 딸들이 당신의 사진을 잘 보관하라고 그림 상자를 만들어주더군요. 감사드리며, 신의 축복을 빕니다.   - 딘 넬슨(Dean Nelson)

 

  • 당신을 만난 적은 없지만 나는 당신을 가장 존경합니다. 스탠, 당신은 경기장 안팎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대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도 당신처럼 살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언젠가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내 아이들과 나눌 것이고,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할 것입니다. “여기 야구의 완벽한 전사가 서 있습니다. 여기 야구의 완벽한 기사가 서 있습니다.(Here stands baseball’s perfect warrior. Here stands baseball's perfect knight.)”   - 라이언 켐프(Ryan Kemp)

 

 

 

 

 

Track 12.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잊혀져 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 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1969년 7월 28일 뉴욕 쿠퍼스타운에서는 스탠 뮤지얼명예의 전당 헌액식이 열렸습니다. 이날 스탠 뮤지얼은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연설을 했고, 이따금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읊조린 연설문은 한 통의 편지 같았습니다.

 

 

 

ⓒ 스탠 뮤지얼의 명예의 전당 헌액식 연설 모습(KDSK.com)

 

 

“제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게 주어진 많은 영광들 중 가장 큰 영광입니다. … 로이 캄파넬라(Roy Campanella), 웨이트 호이트(Waite Hoyt), 스탠 코벨레스키(Stan Coveleski)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것도 영광입니다. … 저는 특히 훌륭하고 이해심 많은 아내를 둔 축복을 받았고, 야구라는 직업적 특성상 원정 경기를 많이 다녀야 했기 때문에 저의 아내는 우리 아이들의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아버지 역할까지 해야 했습니다. … 오늘 이 자리에 제 손자도 와있습니다. 제가 할아버지가 된 날 엄청난 전율을 느꼈고, 그날 저는 나가서 홈런을 쳤습니다. * … 저희 부부는 가난했지만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야구공만 있으면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었죠. 저의 첫 번째 장난감도 야구공이었습니다. … 저는 주저 없이 세인트루이스가 살기 좋고 일하기 좋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인트루이스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의 팬들은 대단합니다. … 끝으로 저를 친절하게 대해 주신 전국의 모든 언론,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특별한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 저는 1941년 야구를 시작하며 1930년대에 뛰었던 선수들을 상대했습니다. 1963년까지 뛰면서 1970년대에도 뛸 선수들을 상대했습니다. 야구는 정말 위대한 경기입니다. 그리고 야구는 언제나 위대한 경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틀림없이 이 나라가 언제나 위대한 선수들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위대한 경기의 일부여서 기뻤습니다. 그리고 야구가 제게 준 것만큼 저도 야구에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스탠 뮤지얼은 마지막 시즌이었던 1963년 9월 10일, 첫 손자가 태어난 날 첫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냈고, 덕분에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홈런을 친 할아버지가 됐습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음악의 힘. 그리고 야구의 힘.

 

김광석스탠 뮤지얼. 만약 천국에 국경이 없다면 이 두 천재는 틀림없이 서로를 알아보고 금세 친해졌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하모니카가 그 매개체 역할을 했겠지요. 이미 둘의 듀엣 공연이 열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선가 김광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행복하십시오. 아쉬워 마세요. 또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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