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⑩ 그라운드의 신사, 스탠 뮤지얼
연재

스탠 뮤지얼 / 출처 - MLB.com
스탠 뮤지얼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꾸준한 타자 중 한 명입니다. 뮤지얼은 1941년부터 1963년까지 세인트루이스에서만 22시즌을 뛰면서 통산 3,026경기 3,630안타 475홈런 1,951타점 타율 0.331 출루율 0.417 OPS 0.976으로 올스타 24회, MVP 3회에 선정됐고 타격왕 7회, 타점왕 2회를 차지했으며 3차례나 카디널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뮤지얼은 통산 7번의 타격왕을 차지했을 정도로 뛰어난 콘택트 능력을 자랑하는 타자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6번의 30홈런 시즌을 보냈을 만큼 출중한 장타력을 지닌 타자이기도 했는데요. 실제로 그의 통산 6,134루타는 행크 애런(6,856), 알버트 푸홀스(6,211)에 이어 MLB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또한, 뮤지얼은 실력뿐만 아니라 훌륭한 성품과 성실성으로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그라운드의 신사'이기도 합니다.
'스탠 더 맨(Stan the Man)'이란 별명을 지녔던 뮤지얼은 은퇴할 때를 기준으로 통산 경기(3,026), 타석(10,972), 안타(,3630), 2루타(725), 득점(1,949), 타점(1,951), 타율(0.331)을 비롯해 29개의 내셔널리그(NL)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통산 홈런(475)은 멜 오트(511)에 이어 NL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죠. 또한, 뮤지얼은 올스타 출전 횟수(24)에서도 행크 애런, 윌리 메이스와 함께 MLB 공동 1위에 올라 있습니다.
도노라의 그레이하운드

스탠 뮤지얼 / 출처 - AP 통신
스탠 뮤지얼의 본명은 '스타니스와프 프란치셰크 뮤지얼(Stanislaw Franciszek Musial)'로, 1920년 11월 2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도노라에서 폴란드계 이민자 루카스 뮤지얼과 헝가리계 이민자 마리 란코스의 다섯 째로 태어났습니다. 뮤지얼의 아버지는 아들을 폴란드어 별명인 '스타슈(Stasiu)'라고 불렀는데요. 하지만 공립학교에 입학한 후 그의 이름은 스타니스와프 프란치셰크에서 '스탠리 프랭크(Stanley Frank)'로 영어화됩니다.
학창 시절 뮤지얼은 항상 미소를 짓고 쾌활한 성격을 지녀서 인기가 있었지만, 훗날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스포츠에 쏠려 있었는데요. 뮤지얼은 피츠버그 대학에서 장학금을 제안받았을 만큼 농구에도 재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야구였죠.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네 친구와 함께 야구를 했고,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레프티 그로브였습니다.
뮤지얼은 전직 마이너리그 투수였던 이웃의 조 발바오로부터 야구를 배웠고, 만 15세에는 발바오가 감독으로 있는 준 프로팀인 도노라 징크스에 합류했습니다. 뮤지얼은 준-프로 데뷔전에서 성인 야구선수를 상대로 6이닝 동안 삼진 13개를 잡아냈는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펜실베이니아주 전체에서 주목받는 선수가 됐고, '도노라의 그레이하운드'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런 뮤지얼을 지켜보는 메이저리그 구단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죠. 1937년 세인트루이스의 단장 브랜치 리키는 뮤지얼을 투수로 스카우트했고, 그에게 프로 계약을 제안합니다. 뮤지얼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아들이 프로 야구선수가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아내의 적극적인 중재와 아들의 설득으로 마지못해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8년 6월, 뮤지얼은 세인트루이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인 윌리엄슨 레드버즈에서 본격적인 프로 경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평생의 은인을 만나다

스탠 뮤지얼 / 출처 - MLB.com
만 17세의 뮤지얼에게 윌리엄슨에서 보낸 신인 시즌(1938년)은 경기장 안팎에서 적응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뮤지얼은 투수로서 6승 6패 평균자책점 4.66을 기록했고,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듬해 뮤지얼은 9승 2패 평균자책점 4.30을 기록했지만, 윌리엄슨이 클래스 B로 승격되자 1940년 세인트루이스 산하의 다른 마이너리그 팀인 데이토나 비치 아일랜더스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뮤지얼은 그곳에서 평생의 은인을 만나게 되는데요. 바로 뮤지얼의 타격 재능을 알아본 아일랜더스의 감독 디키 커였습니다. 커 감독은 투수로서 등판하지 않는 날에는 뮤지얼을 외야수로 기용했고, 뮤지얼은 커의 지도 아래 잠재력을 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뮤지얼은 투수로서 18승 5패 평균자책점 2.62를 기록했고, 405타석에서 타율 0.311을 기록합니다. 비록 홈런은 1개에 불과했지만 삼진은 28번밖에 당하지 않았고 3루타 10개로 70타점을 쓸어 담았죠.
한편, 뮤지얼은 그해 5월 25일 고향 친구인 릴리 라바시와 결혼했습니다. 데이토나 비치의 세인트폴 성당에서 열린 결혼식에는 커 감독과 그의 아내 코라가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11일 승승장구하던 뮤지얼에게 시련이 찾아옵니다. 그날 올랜도와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중견수로 나선 뮤지얼은 좌중간으로 낮게 가라앉는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를 쫓아가 다이빙캐치를 시도하다 어깨부터 땅에 떨어졌습니다.
뮤지얼은 어깨 부상을 당한 직후 투수로서 생명이 끝났다는 것을 느꼈고, 한동안 야구를 완전히 그만두는 것까지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커 감독은 그가 야구를 그만두지 않도록 설득했고 심지어 재정적인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뮤지얼 부부를 자신의 집에서 지내도록 했습니다(1958년 뮤지얼은 이 빚을 갚기 위해 커 감독에게 휴스턴에 있는 저택을 선물합니다). 이에 힘입어 뮤지얼은 최선을 다해 시즌을 완주할 수 있었죠.
타자로 전향 후 스타덤에 오르다

스탠 뮤지얼 / 출처 - MLB.com
1941년 뮤지얼은 세인트루이스 산하 AA 구단인 콜럼버스 레드버즈에 배정됐지만, 감독인 버트 쇼튼은 전년도의 어깨 부상으로 그의 팔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챘습니다. 그러자 뮤지얼은 클래스 C 스프링필드 카디널스에 재배정됐는데요. 다행스럽게도 커 감독과 쇼튼 감독뿐만 아니라 리키 단장을 비롯한 모든 카디널스의 관계자들은 뮤지얼이 투수보단 타자로서 더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스프링필드 카디널스의 감독 올리 바넥도 마찬가지였죠. 바넥 감독은 뮤지얼을 풀타임 외야수로 기용했고, 그는 스프링필드에서 87경기를 뛰는 동안 타율 0.379를 기록했습니다. 이후 뮤지얼은 인터내셔널리그(AAA)의 로체스터 레드윙스로 승격됐고, 그곳에서도 3경기에서 11안타를 몰아치는 등 좋은 활약을 이어갔는데요. 그러자 세인트루이스는 1941시즌 종료를 2주 남겨놓고 그를 메이저리그에 콜업합니다.
뮤지얼은 1941년 9월 17일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더블헤더 2차전에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당시 세인트루이스는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와 내셔널리그 1위를 놓고 경쟁을 펼치고 있었는데요. 뮤지얼은 데뷔전 멀티히트를 포함해 12경기에서 20안타를 몰아치며 타율 0.426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는 다저스와 2경기 반 차이로 뒤처지면서 리그 우승에 실패합니다.
1942년 풀타임 첫해인 뮤지얼은 타율 0.315 10홈런 72타점 OPS 0.888로 NL 타율 부문 2위에 오르면서 강한 임팩트를 남깁니다. 뮤지얼의 활약에 힘입어 세인트루이스는 106승 2무 48패로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한 후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를 4승 1패로 꺾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해 연말, 유력 지역지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가 올해의 신인으로 선정하면서 뮤지얼은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카디널스의 타격왕

카디널스 동료들과 포즈를 취한 스탠 뮤지얼(왼쪽에서 두 번째) / 출처 - AP
뮤지얼은 풀타임 2년 차인 1943년 내셔널리그 최고의 선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는 타율(0.357), 안타(220), 2루타(48), 3루타(20), 출루율(0.425), 장타율(0.562), 총루타(347) 부문 1위에 오르면서 생애 첫 올스타와 MVP에 선정됐고, 세인트루이스 역시 105승 3무 49패로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하면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월드시리즈에선 양키스에 1승 4패로 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죠.
이듬해인 1944년에도 뮤지얼은 안타(197), 2루타(51), 출루율(.440), 장타율(.549)에서 리그 1위에 올랐고, 타율 0.347(NL 2위)을 기록하며 올스타에 선정됩니다. 소속팀 세인트루이스는 105승 3무 49패로 3년 연속 내셔널리그 1위에 올랐고, 월드시리즈에서 같은 연고지를 쓰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4승 2패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뮤지얼은 월드시리즈에서도 타율 0.304를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뮤지얼은 1945년 1월 23일 미국 해군에 입대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하지만 테드 윌리엄스(3년)나 조 디마지오(3년)와 같은 선배 스타들과는 달리, 뮤지얼은 13개월 정도를 복무하면서 커리어에서 큰 손해를 보지는 않았는데요. 그는 처음에는 베인브리지 해군 훈련 센터에 배정된 후 하와이 진주만으로 들어오는 손상된 선박을 수리하는 부대에 재배치됐고, 1946년 3월 이등 항해사로 명예 제대했습니다.
제대 후 1946년 세인트루이스에 복귀한 뮤지얼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수비 중 슬라이딩을 하다가 왼쪽 무릎 인대를 다친 뒤 새로운 감독 에디 다이어의 요청으로 포지션을 1루수로 옮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율(0.365), 안타(228), 2루타(50), 3루타(20), 득점(124), 장타율(0.587) 부문 1위에 올랐고, 소속팀 세인트루이스의 내셔널리그 정규 시즌 1위를 이끌면서 커리어 두 번째 MVP에 선정됐습니다.
스탠 더 맨(Stan the Man)

젊은 시절 스탠 뮤지얼(우) / 출처 - AP
1946년은 뮤지얼이 '스탠 더 맨(Stan the Man)'이라는 별명을 얻은 해이기도 합니다. 6월 에베츠 필드에서 열린 다저스와 원정 경기에서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의 기자 밥 브로그는 뮤지얼이 타석에 설 때마다 다저스 팬들이 함성을 지르는 것을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 식사 때 브로그는 카디널스의 직원인 레오 워드에게 다저스 팬의 함성이 무슨 뜻인지 물었는데요.
그러자 워드는 "스탠이 나올 때마다 '이런 그 사람이 또 왔어!(Here comes the man!)'라고 하던데요"라고 답했습니다. 브로그는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에서 이 일화를 언급했고 뮤지얼은 그 후로 '스탠 더 맨'이라고 불렸습니다. 뮤지얼의 활약에 힘입어 다저스를 2경기 차로 제치고 리그 1위에 오른 세인트루이스는 월드시리즈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꺾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듬해인 1947년 뮤지얼은 4월까지 타율 0.146에 그쳤습니다. 세인트루이스 담당의인 로버트 하일랜드의 진단 결과, 그의 부진 원인은 편도선염과 맹장염을 동시에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요. 하지만 시즌 중이었기 때문에 수술을 받을 순 없었습니다. 간단한 응급처치 후 5일 만에 그라운드로 복귀한 뮤지얼은 통증을 견디며 타율 0.312 19홈런 95타점 OPS 0.902이란 준수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친 후 수술을 받았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1948년 뮤지얼은 타율 0.376 39홈런 131타점 OPS 1.152로 타율, 안타(230), 2루타(46), 3루타(18), 득점(135), 타점(131), 출루율(0.450), 장타율(0.702) 부문 1위를 차지합니다. 만약 뮤지얼의 홈런 하나가 우천 취소로 인해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랄프 카이너, 조니 마이즈와 함께 홈런 부문 공동 1위로 트리플크라운과 타격 10관왕을 달성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NL MVP는 그의 몫이었죠.
완전체로 거듭나다

스탠 뮤지얼 / 출처 - MLB.com
뮤지얼은 몸을 웅크리고 투수를 거의 등지다시피 하는 독특한 타격 자세로 유명했습니다. 훗날 테드 라이언스는 뮤지얼의 타격 자세를 "경찰이 오는지 보려고 모퉁이를 돌아보는 아이 같다"라고 묘사했는데요. 하지만 투수가 공을 던지면 마치 스프링처럼 잔뜩 웅크렸던 몸을 풀어서 폭발적인 스윙을 했습니다. 이런 타격 메커니즘 덕분에 그는 거포치고는 작은 체격(180cm 79kg)에도 총알 같은 타구를 만들어낼 수 있었죠.
1948년은 이런 뮤지얼의 타격 메커니즘이 완성된 한 해였습니다. 풀타임 첫해인 1942년부터 1948년까지 연평균 13홈런으로 중장거리 타자에 가까웠던 뮤지얼은 1948년 39홈런을 시작으로 1957년까지 10시즌 동안 연평균 31홈런을 기록하는 거포로 거듭납니다. 더 대단한 점은 같은 기간 타율 0.340을 기록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장타력이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콘택트 능력을 잃지 않았다는 건데요.
뮤지얼은 1948년부터 1957년까지 10년간 연평균 타율 0.340 31홈런 112타점 OPS 1.029을 기록했고 타격왕 5회(1948, 1950-52, 1957), 최다안타 3회(1948-49, 1952), 타점왕 2회(1948, 1956)를 차지했습니다. 비록 1948년 세 번째 MVP를 마지막으로 MVP를 추가하진 못했지만, 10년 연속 MVP 투표 10위 안에 들었고 그중 4번은 2위에 올랐죠. 하지만 세인트루이스는 1946년을 끝으로 월드시리즈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1957년 6월 12일, 뮤지얼은 823경기 연속 출전으로 내셔널리그 기록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8월 27일 피츠버그와 원정 경기에서 스윙을 하다가 왼쪽 어깨 관절이 골절되고 쇄골 위쪽 근육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면서 연속 출전 기록은 895번째 경기에서 끝납니다. 이듬해인 1958년 뮤지얼은 타율 0.337 17홈런 62타점 OPS 0.950을 기록했고, 5월 13일 시카고 컵스전에서 역사상 8번째로 통산 3000안타 고지에 오릅니다.

뮤지얼은 38세를 기점으로 급격한 성적 하락을 겪었습니다. 뮤지얼은 1959년 타율 0.255 14홈런 44타점 OPS 0.792를 기록하는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1960년 타율 0.275 17홈런 63타점 OPS 0.841을, 1961년 타율 0.288 15홈런 70타점 OPS 0.860을 기록한데 이어 1962년 타율 0.330 19홈런 82타점 OPS 0.924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는데요. 특히 7월 8일, 41세의 뮤지얼은 한 경기에서 홈런 3개를 친 역대 최고령 선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63년 타율 0.255 12홈런 58타점 OPS 0.728을 기록하자 뮤지얼은 미련 없이 은퇴를 선택했습니다. 뮤지얼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1963년 9월 10일, 첫 손자가 태어난 날 첫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낸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홈런을 친 할아버지가 됐습니다. 이후 9월 25일 세인트루이스 구단주인 어거스트 부시 주니어는 뮤지얼을 팀의 부사장으로 임명하고, 그의 등번호 6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가장 완벽에 가까운 야구 선수

스탠 뮤지얼 / 출처 - MLB.com
타자로서 뮤지얼의 가장 큰 장점은 '꾸준함'이었습니다. 뮤지얼은 풀타임 첫해인 1942년부터 16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했고, 통산 월간 타율에서도 모두 3할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통산 홈에서 1815안타, 원정에서 1815안타로 정확하게 같은 안타를 기록했는데요. 게다가 좌타자임에도 불구하고 통산 좌투수를 상대로 타율 0.316 140홈런 602타점 OPS 0.915로 강했고, 득점권 타율 0.327(OPS 1.003)으로 해결사의 면모를 보였죠.
한편, 뮤지얼은 MLB 역사상 한 팀에서만 뛰면서 3000안타와 400홈런을 달성한 3명(칼 야스트렘스키, 칼 립켄 주니어)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타이 콥은 1952년 인터뷰에서 "완벽한 야구 선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장 완벽에 가까운 야구 선수가 있다면 뮤지얼입니다. 그는 홈경기와 원정 경기, 앞서나갈 때와 뒤처졌을 때를 가리지 않고 항상 열심히 플레이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극찬한 바 있습니다.
뮤지얼은 인성 면에서도 흠잡을 데가 없었는데요. 뮤지얼은 1947년 재키 로빈슨이 인종 장벽을 허물었을 때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몇 안 되는 스타급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또한, 1937년 15세 때 처음 만난 릴리와 2012년 91세의 나이로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76년을 함께 했고 릴리와 사이에서 네 자녀(리차드, 개리, 자넷, 지니)를 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늘 겸손한 태도를 견지했죠.
뮤지얼은 통산 3026경기에 출전했지만 퇴장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스포츠 캐스터 밥 코스타스는 한 인터뷰를 통해 "그는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치지 못했습니다. 56경기 연속 안타를 치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연인과 결혼했고 72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뮤지얼이 상징하는 것은 20년 이상 지속된 우수성과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품위입니다"라고 정리한 바 있습니다.
우승 후 단장직을 자진 사퇴하다

스탠 뮤지얼 / 출처 - MLB.com
뮤지얼은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세인트루이스의 부사장으로 일했습니다. 또한 1964년부터 1967년까진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미국인들의 체력 향상을 촉진하기 위해서 만든 임시 보직인 체력 고문직(physical fitness adviser)을 겸임했는데요. 1967시즌 시작 전 세인트루이스의 단장으로 부임한 뮤지얼은 그 해 구단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죠. 뮤지얼은 구단 임원(부사장, 단장)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뮤지얼은 단장 시절 선수와 계약 협상 초기부터 공정한 제안을 했고, 선수들의 가족들을 위해 경기장 내에 보육 시설을 만들어 선수단의 충성심을 얻고 사기를 진작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구단을 경영하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지 않았는데요. 한번은 "저는 정말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지만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묻지 마세요"라고 말할 정도였죠. 그는 부임 첫해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장직에서 자진사퇴합니다.
카디널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스탠 뮤지얼 / 출처 - MLB.com
1968년 8월 4일, 세인트루이스는 홈구장인 부시 메모리얼 스타디움 앞에 뮤지얼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의 동상에는 전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인 포드 프릭이 한 말인 "여기 야구의 완벽한 전사(warrior)가 서 있습니다. 여기 야구의 완벽한 기사(knight)가 서 있습니다"가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뮤지얼은 첫 번째 투표에서 93.2%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뮤지얼은 현역 은퇴 후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도 세인트루이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야구 통계 사이트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따르면 뮤지얼은 블랙 잉크 지수에서 타자 부문 역대 5위, 그레이 잉크 지수에서 타자 부문 역대 3위에 올라있는데요. 또한, '세이버메트리션의 아버지'라 불리는 빌 제임스는 2001년 뮤지얼을 메이저리그 역사상 10번째로 위대한 야구선수로 선정했습니다.
뮤지얼은 2013년 1월 19일 미국 미주리주 라두에 있는 자택에서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부시 스타디움에 있는 그의 동상 앞에서 추모식을 열었습니다. 버드 셀릭 커미셔너는 "우리는 스탠 뮤지얼이라는 진정한 레전드를 잃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명예의 전당에 걸맞은 선수였고, 훌륭한 미국인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라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