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윙 스피드, 이정후, 그리고 라파엘 팔메이로
연재
야구를 기록의 스포츠라 부른 것은 10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기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정보는 예전과 차원이 다른 시대입니다. 관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현시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전한 야구 기록은 ‘스탯캐스트’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경기 결과를 통해 얻는 기록 외에, 투구와 타구는 물론 선수의 움직임마저 추적해 수치화하는 스탯캐스트 자료가 실시간으로 공개되면서 야구를 바라보는 시야도 10년 전과 비교해도 천지개벽 수준으로 진화했습니다.
스탯캐스트는 아직도 완성형이 아닙니다. 이미 소개된 지표는 해마다 업그레이드되고, 새로운 항목도 추가됩니다. 최근에는 타자가 휘두른 배트의 스피드는 물론, 타자가 공을 때릴 때 타석에서 움직인 위치 정보까지 정리됩니다. 그리고 가장 최신 업데이트를 통해 타자의 스윙 궤적이 형성하는 각도 등 추가 정보까지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매년 스탯캐스트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탐구 정신과 호기심에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국내 팬들도 스탯캐스트에 친숙합니다. 올해는 스탯캐스트를 놓고 이야깃거리가 더 많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이정후 때문입니다. 시즌 초반 양키 스타디움 원정경기에서 멀티 홈런을 터뜨리는 등 빅리그 정상급 활약을 펼치면서 온갖 기록 순위에서 상위권을 기록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타구의 질은 물론 타석에서의 접근 성향을 나타내는 스탯캐스트 지표에도 관심이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의아한 상황이 생겼습니다. 당시 타율, 장타율, OPS 등 기본적인 기록은 뉴욕 양키스의 애런 저지와 비교되는 수준이었음에도 유독 배트 스피드는 하위권으로 나타난 겁니다. (5월 22일 기준 하위 11%) 이정후의 배트 스피드가 엄청날 것이라고 상상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최하위권이라니. 몇몇 팬들은 배트 스피드와 타격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하기도 했습니다.

투수의 구속과 달리 타자의 배트 스피드는 시각적으로 극단적인 차이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올 시즌 평균 배트 스피드가 가장 빠른 피츠버그의 오닐 크루즈(78.9마일)와 샌디에이고의 루이스 아라에스 (62.6마일) 사이에는 대략 16마일 정도의 평균 스피드 차이가 있습니다. (5월 23일 기준) 하지만 중계 화면상에서 이 차이를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는 없습니다. 상식 수준에서 생각했던 배트 스피드와 스탯캐스트가 측정하는 수치 사이에서 괴리가 발생할 수도 있고, 투수의 구속만큼 타자의 배트 스피드가 일정하게 표출되지 않아 인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배트 스피드 측정의 역사가 길지 않다 보니 아직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개입될 여지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수치화되면서 야구의 다양한 현상을 탐구하게 된 것은 세이버메트릭스 시대의 축복입니다. 하지만 산출된 수치로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처럼 오인하는 측면도 존재합니다. 배트 스피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트 스피드가 빠르면 강한 타구를 생산할 것이라고 1차적으로 예측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배트 스피드만으로는 특정 선수의 타격 능력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타자의 스윙은 선수의 신체적 특성과 타격 자세가 반영되는 복합적인 행위입니다. 공을 정확히 맞히는 능력과 각자의 스트라이크존 설정 능력, 타격 성향을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조금이나마 의미 있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극단적으로 빠르거나 느린 경우가 아니라면 배트 스피드는 일종의 ‘야구 MBTI’처럼 타자의 개성으로 인식하는 편이 낫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정후의 배트 스피드 역시 능력을 설명하는 개념이라기보다 개성으로 봅니다.
배트 스피드와 비슷한 성격의 수치가 직구 회전수입니다. 야구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공의 구위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고, 시행착오 끝에 지금은 직구의 분당 회전수를 구위와 직결되는 데이터로 봅니다. 실제로 투수들을 직구 회전수 순으로 정렬하면 구위가 뛰어난 선수들이 상위권에 놓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가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회전수가 낮은 순으로 정렬한 선수 목록이 구위가 약한 선수의 집합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높은 것이 낫긴 하지만, 낮다고 나쁜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배트 스피드와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느린 배트 스피드로 역대급 성공을 거둔 사례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선수가 라파엘 팔메이로입니다.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500홈런과 3천 안타를 모두 달성한 선수는 행크 에런과 윌리 메이스, 에디 머레이 등 단 7명에 불과합니다. 팔메이로도 그중 한 명입니다. 90년대와 2000년대의 강타자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팔메이로는 스윙만큼 부드러운 1루 수비로도 명성을 떨쳤습니다. 99년에는 1루수로 28경기밖에 뛰지 않았음에도, 기존 수비 실력에 대한 투표자들의 고정 관념 덕에 골드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해당 시상의 논란이 향후 골드글러브 수상 기준을 바뀌는 단초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팔메이로는 폭발적이고 강한 스윙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대신 부드러우면서 유연한 스윙을 일정하게 유지해 지속적으로 장타를 생산했습니다. 스윙에 대한 찬사도 자주 받았습니다. 작년에는 MLB닷컴이 선정한 ‘역대 가장 멋진 스윙의 소유자 10명’에 포함됐습니다. 켄 그리피 주니어의 아름다운 궤적이 돋보이는 스윙, 테드 윌리엄스처럼 이론적인 면까지 꿰뚫은 스윙과 함께 팔메이로의 스윙도 함께 거론됐습니다. 해당 기사에서는 팔메이로의 스윙을 ‘달콤하고 여유롭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스윙으로 장타력을 꾸준히 발휘한다는 점에서 ‘이지 파워(easy power)’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기도 합니다. (스윙을 완료한 뒤 자연스럽게 신체의 중심이 1루를 향한다는 점에서, 멋진 스윙으로 평가받는 선수 대다수가 왼손 타자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30개 구단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윙을 뽑는 2021년 MLB닷컴 기사에도 팔메이로의 이름이 올랐습니다. 무리가 없고 일관성이 있는 스윙 메커니즘을 지닌 덕인지 팔메이로는 선수 생활 내내 큰 부상도 없었습니다. 1986년에 데뷔한 팔메이로는 1988년 첫 풀타임 시즌을 경험했는데, 이후 서른아홉이던 2004년 시즌까지 매년 규정 타석을 채웠습니다. 숫자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엄청난 내구성입니다.
ESPN의 메이저리그 전문 기자 버스터 올니는 팔메이로의 경기 전 연습 과정에도 주목한 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기를 앞두고 타자들은 느슨한 스윙으로 연습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몸이 풀리면 강한 스윙으로 컨디션을 끌어올립니다. 대부분의 비슷한 루틴입니다. 하지만 팔메이로는 다릅니다. 연습 내내 느슨한 스윙으로 일관하고, 그 스윙을 실전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경기 상황이나 상대 투수가 달라져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시대에 디트로이트와 휴스턴에서 뛰었던 브래드 아스머스는 팔메이로의 스윙을 놓고 “마치 배트가 스스로 회전하는 것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팔메이로는 금지 약물 관련 이슈에 휩싸여 명예가 실추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569홈런과 3,020안타를 기록하고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특성을 살려 역대급 성과까지 얻은 스윙만큼은 여전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팔메이로의 스윙을 분석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찾아볼수록 타격의 심오한 깊이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정후의 배트 스피드 논란을 잠재우는 근거 이상의 경이로움도 느낍니다. 더불어 역시 야구에 숫자로 정리할 수 있는 정답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새삼 깨닫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