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⑨ 좌완 역대 최다승, 워렌 스판
연재

워렌 스판 Ⓒ MLB.com
Hitting is timing. Pitching is upsetting timing.
ㅡ워렌 스판
워렌 스판은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 명입니다. 스판은 1942년부터 1965년까지 21시즌 통산 363승 245패 5,243.2이닝 2,583탈삼진 평균자책점 3.09을 기록했고 올스타 17회, 사이영상 1회, 다승왕 8회, 탈삼진왕 4회, 평균자책점 1위 3회, 노히터 2회, 월드시리즈 우승 1회를 차지했는데요. 통산 363승은 메이저리그 좌완 역대 최다승이자, 라이브볼 시대(1920년 이후) 최다승 기록입니다.
1942년 21세에 데뷔한 스판은 그해 10월 미국 육군에 입대하면서 1946년 25세가 되어서야 메이저리그에 복귀했습니다. 만약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느라 3시즌을 놓치지 않았다면 스판은 사이 영(511승), 월터 존슨(417승)과 함께 400승 이상을 달성한 3명 중 1명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메이저리그는 매년 최고의 좌완 투수에게 그의 이름을 딴 '워렌 스판 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투구 철학

워렌 스판 Ⓒ MLB.com
워렌 스판의 본명은 워렌 에드워드 스판(Warren Edward Spahn)으로 1921년 4월 23일 미국 뉴욕주 버펄로에서 에드워드 스판과 메이블 스판 부부의 여섯 자녀 중 다섯 째로 태어났습니다. 스판의 이름은 워렌 G. 하딩 대통령과 아버지(에드워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가난했지만 지역 야구팀 버펄로 바이슨스의 팬이었던 아버지는 가족들 중에서 가장 운동 신경이 뛰어난 스판에게 야구를 가르쳤습니다.
스판은 원래 1루수가 되기를 원했는데요. 하지만 왼손잡이가 뛸 수 있는 포지션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아버지는 작은 체격(170cm 59kg)의 스판이 1루수로 뛰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뒷마당에 만든 마운드에서 그에게 패스트볼과 커브를 던지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아버지가 강조한 것은 '유연한 투구폼'과 '제구력'이었는데요. 어린 시절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가르침은 훗날 스판의 모토가 됩니다.
스판은 아메리칸리전 베이스볼(미국과 캐나다에서 13-19세 아마추어 선수들이 뛰는 리그)까지 1루수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사우스파크 고교에 입학했을 때, 1루수는 훗날 프로 레슬러가 되는 빌 벤저먼이 차지하고 있었죠. 스판은 마지못해 투수로 포지션을 옮긴 후 마지막 2년간 무패를 기록하며 두 차례나 시 고교 대회 우승을 이끌었지만, 너무 마른 체형이란 이유로 MLB 스카우트들의 외면을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파트타임 스카우트인 빌리 마이어스의 생각은 달랐는데요. 스판의 제구력에 감명을 받은 마이어스는 1940년에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그를 월급 80달러에 영입했습니다. 당시 스판은 아이비리그의 명문대 코넬 대학교로부터도 부분 장학금을 제안받았지만, 가족들이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브레이브스와 계약을 맺고 마이너리그로 향했습니다.
커리어의 전환점이 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워렌 스판 Ⓒ MLB.com
스판이 처음 배정된 팀은 잭 온슬로가 감독으로 있는 뉴욕 펜리그(D등급)의 '브래드포드 비스'였습니다. 7월 배타비아 클리퍼스와 원정 경기에서 빅리그에 데뷔한 스판은 볼넷 2개를 내주면서 패전 투수가 됐고, 시즌의 3분의 1이 지난 시점에는 새로운 커브를 실험하다가 왼쪽 어깨를 다치면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5승 4패 66이닝 62탈삼진 평균자책점 2.83으로 가능성을 보여줬죠.
이듬해인 1941년 스판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팀 동료가 잘못 던진 예상치 못한 공에 맞아 부러진 코가 갈고리 모양으로 굳어지면서 '후크스(Hooks)'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여름 일리노이-인디애나-아이오와 리그(B 등급)의 에반스빌 비스에서 뛰는 동안 다승(19), 승률(.760), 완봉(7), 평균자책점(1.83) 부문 1위를 차지하는 눈부신 활약을 펼치면서 소속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스판은 1942년 스무 살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데뷔는데요. 두 번째 경기에서 브루클린 다저스의 타자 피위 리즈에게 빈볼을 던지라는 지시를 거부하자, 케이시 스텡겔 감독이 그를 마이너리그로 돌려보내면서 스판은 데뷔 시즌 4경기 등판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훗날 스텡겔 감독은 "전쟁 영웅이자 위대한 좌완 투수 중 한 명인 그에게 '용기가 없다'라고 말한 것은 내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였다"라고 후회했습니다.
그렇게 마이너리그에서 17승 12패 평균자책점 1.96으로 1942시즌을 마친 스판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육군에 입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스판은 276공병 전투대대의 상사로서 유럽에 파병된 후 여러 전장에 투입되어 생사를 오가는 실전을 펼쳤는데요. 그 과정에서 퍼플 하트 훈장, 동성 훈장, 전장 진급(소위), 대통령 표창을 받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야구선수가 됩니다.
전쟁에서 복귀 후 에이스로 떠오르다

조니 사인(우)과 원투펀치를 이뤘던 워렌 스판(좌) Ⓒ MLB 명예의 전당
1946년 메이저리그에 복귀한 25세의 스판은 25경기에서 8승 5패 125.2이닝 67탈삼진 평균자책점 2.94를 기록하며 차세대 에이스감으로 주목받았는데요. 스판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풀타임 첫해인 1947년 21승 10패 289.2이닝 123탈삼진 평균자책점 2.33으로 다승(21), 이닝(289.2), 완봉(7)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하면서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됩니다. 이는 통산 13번의 20승 시즌 중 첫 번째 시즌이기도 했죠.
1948년 스판은 아내(로렌)의 임신과 외동아들(그레고리)의 출산 그리고 들쭉날쭉한 패스트볼의 제구로 인해 15승 12패 257이닝 114탈삼진 평균자책점 3.71으로 평소보다 부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니 사인(24승 15패 ERA 2.60)과 스판의 원투펀치에 힘입어 리그 1위를 차지한 브레이브스는 월드시리즈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현 가디언스)에 2승 4패로 패하면서 아쉬움을 삼켰습니다.
이후 브레이브스는 부상과 계약 관련 불화로 인해 4시즌 연속 3위 안에 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팀 분위기도 스판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요. 스판은 1949년부터 1952년까지 4년간 평균 20승 16패 299이닝 172탈삼진 평균자책점 3.05를 기록하며 2번의 다승왕과 함께 4년 연속 탈삼진왕에 오릅니다. 그리고 브레이브스는 1952년을 마지막으로 보스턴을 떠나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로 연고지를 옮깁니다.
밀워키로 연고지를 옮긴 첫해인 1953년 스판은 스프링 트레이닝 중 무릎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지만 계약 파기의 공포 속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시즌을 완주했습니다. 스판은 오프시즌이 돼서야 수술을 받았는데요. 놀라운 점은 일 년 내내 고통 속에서 투구했음에도 불구하고 23승 7패 265.2이닝 148탈삼진 평균자책점 2.10으로 다승(23), 평균자책점(2.10)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했다는 겁니다.
밀워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다

워렌 스판 Ⓒ MLB.com
밀워키로 연고지를 옮긴 후 브레이브스는 역대 최고의 3루수 중 한 명인 에디 매튜스(통산 512홈런)과 '홈런왕' 행크 애런(통산 755홈런)의 등장으로 다시 우승권 전력을 다져갔습니다. 한편, 마운드에선 루 버데트(통산 203승)가 성장해 원투펀치를 구축하면서 에이스 스판의 부담을 줄여줬죠. 아이러니하게도 버데트는 스판의 이전 원투펀치 파트너였던 조니 사인을 양키스로 보내는 대가로 영입한 선수였습니다.
스판은 밀워키 시절 첫 4시즌(1953-1956년) 동안 평균 20승 11패 269이닝 131탈삼진 평균자책점 2.82를 기록했고, 브레이브스는 같은 기간 2위, 3위, 2위, 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1957년 36세의 스판은 21승 11패 271이닝 111탈삼진 평균자책점 2.69으로 다승(21), 완투(18) 부문 1위를 석권하며 마침내 커리어 첫 사이영 상을 수상했고, 브레이브스도 밀워키로 연고지를 옮긴 후 첫 리그 1위를 차지합니다.
브레이브스의 1957년 월드시리즈 상대는 미키 맨틀이 이끄는 뉴욕 양키스였는데요. 1947년부터 1956년까지 10년간 월드시리즈 5연패 포함 7번의 우승을 차지한 '당대 최강팀' 양키스를 상대로 1차전에 등판한 스판은 5.1이닝 7피안타 1볼넷 3실점으로 무너지면서 패전 투수가 됐습니다. 하지만 4차전에선 10이닝 11피안타 1볼넷 2탈삼진 5실점으로 연장 10회까지 홀로 마운드를 책임지며 완투승을 거뒀습니다.
스판은 에이스로서 7차전에 등판할 계획이었지만,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2선발인 루 버데트가 이틀 휴식 후 등판해 양키스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며 우승을 이끄는 것을 더그아웃에서 지켜봐야 했죠. 친구가 3승 무패로 월드시리즈 MVP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서 스판은 엇갈린 감정을 느꼈을 겁니다. 이는 커리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이기도 했습니다.
불혹의 나이에도 이어진 전성기

1957년 월드시리즈에서 마주한 워렌 스판(좌)과 화이티 포드(우) Ⓒ AP 통신
스판은 이듬해인 1958년 22승 11패 290이닝 150탈삼진 평균자책점 3.07로 다승(22), 완투(23), 이닝(290) 부문 1위에 오르면서 브레이브스의 2년 연속 리그 1위를 이끌었습니다. 월드시리즈에선 다시 만난 양키스를 상대로 1차전 10이닝 3실점 완투승, 4차전 9이닝 무실점 완봉승 호투를 펼쳤는데요. 하지만 6차전에는 9.2이닝 4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됐고, 브레이브스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양키스에 패했습니다.
스판은 1957년부터 1961년까지 5시즌 연속 다승, 완투 부문 1위에 오르는 꾸준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특히 1960년 9월 16일 필리스전에서 커리어 첫 노히터를, 1961년 4월 28일 자이언츠전에서 두 번째 노히터를 달성하며 2년 연속 대기록을 세웠고, 1961년 8월 11일 컵스전에선 역대 13번째 300승을 달성했죠. 이해 40세의 스판은 21승 12패 262.2이닝 평균자책점 3.02로 다승, 완투, 평균자책점 1위에 오릅니다.
이후에도 스판은 1962년 18승 14패 269.1이닝 118탈삼진 평균자책점 3.04로 완투(22) 부문 1위에 올랐고, 1963년 23승 7패 259.2이닝 102탈삼진 평균자책점 2.60으로 완투(22) 부문 1위에 오르면서 42세의 나이에 7년 연속 완투 1위라는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43세가 된 스판은 무릎 통증에 시달리면서 7승 16패 173.2이닝 78탈삼진 평균자책점 5.29으로 데뷔 시즌 이후 최악의 성적을 거뒀는데요.
그러자 브레이브스는 시즌 종료 후 25년 동안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스판을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당시 메츠 감독은 그가 1942년 빅리그에 데뷔했을 때 첫 번째 감독이었던 스텡겔이었습니다. 빈볼을 던지라는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신인 투수를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냈던 꼴찌 팀의 감독은 이후 양키스의 감독으로서 통산 월드시리즈 우승을 7차례나 차지한 명장으로 변모해있었습니다.
나는 야구를 은퇴하지 않았다. 야구가 나를 은퇴시켰다.

스텡겔이 명장으로 탈바꿈하는 동안, 데뷔 시즌 4경기에서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5.74에 그친 애송이 투수도 어느새 통산 356승을 거두는 대투수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스판을 영입하고 일주일 후, 메츠는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인 요기 베라와도 계약을 맺었는데요. 하지만 명예의 전당 입성이 확실시되는 감독과 배터리가 만난 메츠는 직전 3시즌 평균 48승113패를 기록한 창단 4년 차 신생팀에 불과했습니다.
스판은 1965년 메츠에서 투수와 코치를 겸직하며 시즌 중반까지 4승 12패 126이닝 56탈삼진 평균자책점 4.36을 기록한 후 방출됐습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와 계약한 스판은 3승 4패 71.2이닝 34탈삼진 평균자책점 3.39를 기록한 후 1965년 10월 1일 44세의 나이로 마지막 메이저리그 경기에 등판했습니다. 시즌 종료 후 방출된 그는 훗날 "나는 야구에서 은퇴하지 않았다. 야구가 나를 은퇴시켰다"라고 말했습니다.

스판은 1973년 첫 번째 투표에서 83.2%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이후 1973년부터 1978년까지 6시즌 동안 일본프로야구 히로시마 카프의 투수 코치를 맡았고, 미국으로 돌아온 뒤 1981년까지 3시즌 동안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 마이너리그 투수들을 지도했죠. 은퇴한 그는 오클라호마주 하츠혼에 정착해 2000에이커(약 250만 평)에 달하는 대형 목장을 운영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2003년 8월, 브레이브스는 홈구장 터너 필드 앞에 하이 레그 킥을 하는 스판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고령으로 인해 건강 문제를 겪던 82세의 그는 휠체어를 타고 행사에 참가해 "제가 하이 레그 킥을 개발한 이유는 사람들에게 엉덩이를 보여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 후 2003년 11월 24일, 스판은 오클라호마주의 자택에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