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⑧ 통산 2000승의 전설, 사첼 페이지
연재

사첼 페이지 Ⓒ MLB.com
사첼 페이지는 미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입니다. 또한, 니그로리그에서 활약한 모든 선수를 통틀어 가장 인지도가 높은 선수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일화는 너무나도 놀라워서 지금까지도 야구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요. 일설에 따르면 페이지가 선수 생활 동안 거둔 승리만 2,000승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수비수를 모두 자리에 앉힌 후 탈삼진 3개로 이닝을 끝낸 일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화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듭니다. 하지만 그의 행적을 돌이켜 봤을 때 완전히 근거 없는 얘기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데요. 페이지는 1926년부터 1947년까지 21년간 니그로리그,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여러 독립리그를 오가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여기에 비시즌 중 순회 경기와 시범 경기를 합치면 그가 등판한 경기는 최소 2,500경기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와 동시대에 활약한 메이저리그 레전드들의 증언도 있는데요. 조 디마지오는 "내가 상대했던 모든 투수 중 최고"라고 회고했고, 디지 딘은 "그의 패스트볼은 내 패스트볼을 체인지업처럼 보이게 만든다"라고 말했습니다. 테드 윌리엄스는 한술 더 떠 "페이지는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라고 회고했죠. 실제로 1930년, 페이지는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을 상대로 탈삼진 22개를 잡아내며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죠.
앨러배마의 문제아, 은인을 만나다

사첼 페이지 Ⓒ MLB.com
사첼 페이지의 본명은 '리로이 로버트 페이지(Leroy Robert Paige)'로, 1900년에서 1906년 사이에 미국 앨러배마주 모바일에서 정원사인 존 페이지와 가정부인 룰라 페이지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다만 1948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구단주인 빌 비크가 앨러배마주 모바일의 보건소에서 확인한 출생증명서에는 1906년 7월 7일이라고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페이지에 따르면, 그의 별명인 '사첼(Satchel)'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 기차역에서 가방을 나르던 일에서 유래했는데요. 페이지는 한 번에 더 많은 가방을 들고 다니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 막대와 밧줄로 장치를 만들어 한 번에 서너 개씩 가방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걸 본 한 소년이 "너는 걸어 다니는 가방 나무(satchel tree) 같아"라고 외쳤고, 사첼은 곧 그의 별명으로 굳어졌다고 하죠.
1918년 7월 24일, 12번째 생일이 지난 지 2주 만에 페이지는 학교를 무단으로 결석하고 동네 가게에서 장난감 반지를 훔치다가 경찰에게 잡혔습니다. 그 일로 페이지는 앨러배마주 마운트 메익스에 있는 흑인 산업 학교(일종의 소년원)으로 보내졌는데요. 그곳에서 그는 인생의 은인이 될 에드워드 버드 코치를 만나게 됩니다. 버드 코치는 페이지가 투수로서 이상적인 체형을 갖추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페이지는 어린 시절부터 큰 키에 긴 팔과 큰 손을 지니고 있었는데요. 이에 버드는 페이지에게 공을 던지기 전에 발을 높이 차올린 후 최대한 타자 앞까지 팔을 끌고 나와서 던지는 투구폼을 전수했습니다. 또한, 버드는 페이지에게 타자의 자세와 배트의 위치를 통해 약점을 파악하는 법도 알려줬는데요. 훗날 페이지는 그 시절에 대해 "투구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5년의 자유를 바친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사첼 페이지, 전설의 시작

사첼 페이지 Ⓒ MLB.com
페이지는 18번째 생일을 7개월 앞둔 1923년 12월 흑인 산업 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의 여러 준 프로팀에서 뛰었습니다. 그리고 1926년 니그로 서던 리그의 채터누가 화이트삭스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인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죠. 이후 페이지는 니그로 내셔널리그의 명문 버밍햄 블랙바론스(1927~1930), 클리블랜드 컵스(1931), 피츠버그 크로포즈(1933~1936) 등을 거치며 전설적인 기록들을 써 내려갔습니다.
특히 피츠버그 크로포즈 시절에는 오스카 찰스턴, 조시 깁슨, 쿨 파파 벨 등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레전드들과 함께 뛰면서 니그로리그 역대 최강팀을 구축했는데요. 이 시기 페이지는 디지 딘과 밥 펠러를 비롯한 동시대 메이저리그 에이스들과 이벤트전에서 맞대결을 펼치며 수많은 명승부를 연출했습니다. 크로포즈에서의 생활을 정리한 이후인 1937~1938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 멕시코, 베네수엘라 등 해외리그에서 활약하기도 했죠.
1938년 베네수엘라에서 뛰던 페이지는 커리어 처음으로 어깨 통증을 느꼈습니다. 페이지는 통증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9월 중순쯤에는 팔을 거의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된 탓에 결국 미국으로 돌아와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는데요. 당시 페이지를 진찰한 의사는 그가 다시는 투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페이지는 포기하지 않았고, 1939년 여름에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페이지는 초창기에는 투수로서 이상적인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만으로 타자를 요리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광범위한 투구 레퍼토리를 지닌 투수로 진화했는데요. 여기엔 1938년에 당했던 부상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페이지는 커브, 싱커, 체인지업 등 다채로운 변화구를 구사했고, 다양한 팔 각도로 공을 던지거나 지연 동작을 통해 타자를 혼란에 빠뜨렸는데요. 이는 그가 40대까지 정상급 기량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죠.
니그로리그의 슈퍼스타

사첼 페이지 Ⓒ MLB.com
건강을 회복한 페이지는 1939년 푸에르토리코 윈터리그에서 19승 3패 205이닝 208탈삼진 ERA 1.93을 기록하면서 여전한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1940년 캔자스시티 마나크스와 계약을 맺으며 4년 만에 니그로리그에 복귀하는데요. 1940년대 초 페이지는 다른 니그로리그 팀과 1일 계약을 맺고 임대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페이지는 팀과 임대료를 나눠 가졌는데, 그 금액이 무려 4만 달러에 이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고로 이는 당대 메이저리그 최고 스타였던 뉴욕 양키스의 조 디마지오의 연봉과 맞먹는 액수였죠. 이후에도 페이지는 1947년까지 마나크스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수많은 일화들을 남겼는데요. 특히 1942년 니그로리그 월드시리즈에선 '검은 베이브 루스' 조시 깁슨과의 2차전 9회 초 1점 차 2사 만루 맞대결에서 그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등 시리즈 전 경기에 출전해 팀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43년 올스타전에서는 코미스키 파크에 운집한 52,000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3이닝 노히트를 기록하고 교체되면서 기립 박수를 받기도 했죠. 하지만 아쉽게도 페이지가 니그로리그에서 남긴 여러 전설적인 기록 중 상당수는 소실되어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습니다. 2020년 12월, 롭 만프레드 MLB 커미셔너가 "니그로리그를 메이저리그 지위로 인정한다"라고 발표하면서 니그로리그의 기록이 MLB 공식 기록으로 인정됐습니다.
하지만 20개가 넘는 니그로리그 중에서 메이저리그 지위를 얻은 리그는 7개에 불과했죠. 또한, 재정적으로 열악했던 니그로리그 팀들은 유랑극단처럼 미국 전역과 해외를 순회하며 경기를 치렀는데, MLB 사무국은 기록 정리 과정에서 시즌당 60-80경기밖에 되지 않는 '공식 경기'만을 기록으로 인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페이지의 니그로리그 성적은 224경기(연평균 14경기) 1,275.2이닝 96승 51패 1,213탈삼진 ERA 2.52만이 남아있습니다.
마침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다

사첼 페이지 Ⓒ MLB.com
재키 로빈슨의 데뷔로 인종의 장벽이 허물어진 후 1년 뒤인 1948년, 페이지는 클리블랜드 소속으로 마침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는데요. 당시 페이지의 나이는 만 41세였습니다. 이후 만 46세인 1953년까지 페이지는 5시즌 동안 28승 33세이브 473이닝 287탈삼진 평균자책점 3.31을 기록합니다. 웬만한 투수라면 진작 은퇴했을 나이에 이런 성적을 거뒀다는 점에서 전성기 시절 그의 실력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었는데요. 1965년 메이저리그의 연금 관련 규정이 개정되면서 페이지가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의 구단주 찰리 핀리는 딱 한 경기를 위해 그를 영입했습니다. 그해 9월 25일 보스턴 레드삭스전에 등판한 '만 58세'의 페이지는 놀랍게도 3이닝 1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합니다. 이는 지금까지도 메이저리그 투수의 최고령 등판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물론 페이지가 40대의 나이에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고 해서 '메이저리그에서 처음부터 뛰었다면 월터 존슨보다 훨씬 뛰어난 성적을 거뒀을 것'이라고 단언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가 인종 차별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모든 기록을 역사에 남기지 못한 비운의 대투수라는 겁니다. 이는 테드 윌리엄스가 1966년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니그로리그 레전드들의 헌액을 촉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페이지의 50년에 걸친 선수 경력은 1971년 2월 9일 니그로리그 선수로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약 50년이 지난 2020년 미국 스포츠 전문 매체 <디 애슬레틱>은 '메이저리그 레전드 TOP 100'를 뽑으면서 페이지를 10위로 선정했는데요. 이는 '빅 트레인' 월터 존슨(7위)에 이어 투수 중에서는 두 번째로 높은 순위입니다.
은퇴 이후의 삶

페이지는 1966년 6월 19일 마이너리그에서 페닌슐라 그레이즈의 투수로 등판해 그린스버러 양키스를 상대로 3이닝 노히터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틀 후에 다시 그린스버러를 상대로 등판해 2이닝 5피안타 2실점을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50년에 걸친 선수 경력을 마쳤습니다. 1968년에도 메이저리그의 연금 관련 규정문제로 다시 복귀를 추진했지만, 다행히도 이듬해 연금 자격을 인정받으면서 해프닝에 그치게 됐죠.
이후 페이지는 1973년 마이너리그 팀인 털사 오일러스의 투수코치를 잠시 맡았고, 1980년 트리플A 스프링필드 카디널스의 부사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페이지는 1982년 6월 8일 캔자스시티에 있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향년 7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6년 7월 28일, 니그로리그가 야구에 기여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명예의 전당이 위치한 뉴욕주 쿠퍼스타운에는 페이지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