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민훈기의 필드 노트 : 루스의 기록을 깬 조용한 홈런왕 행크 애런 EP.09
연재
메이저리그에서 매년 시상하는 ‘행크 애런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필라델피아의 시티즌스 뱅크파크를 찾은 것이었습니다.
잠시 인사와 얘기를 나눈 게 전부였지만 정말 온화하고 타고난 품성의 신사임을 대번 느끼게 했습니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했더니 1982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며 반가워했습니다.
©️행크 애런 상
‘행크 애런상’은 MLB에서 1999년 양대 리그의 최고 타자를 선정해 수상하는 뜻깊은 트로피입니다.
베이브 루스의 714홈런 기록을 깬 애런의 대기록 25주년 기념으로 이 상을 신설했고, 초창기에는 다양한 공격 지표를 기준 삼아 최고 선수를 뽑다가 후에 팬과 언론의 투표로 선정하고 있습니다.
첫해에는 클리블랜드의 매니 라미레스와 시카고 컵스의 새미 소사가 뽑혔고, 작년에는 양키즈의 애런 저지와 다저스의 오타니 쇼헤이가 각각 뽑혔습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4번으로 최다 선정자입니다.
최고의 타자상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행크 애런에게 1974년은 참 특별하고 또 힘든 시즌이었습니다.
미국의 영웅이자 야구의 대명사이던 베이브 루스의 통산 홈런 기록을 깨는 기념비적인 위업을 이룬 해였습니다.
‘위대한 루스’의 기록을 뒤쫓는 레이스는 1973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당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소속으로 39세이던 애런은 120게임에 392타수밖에 뛰지 못했음에도 40개의 홈런을 때리면서 통산 713개를 기록했습니다. 루스의 기록에 한 개차로 육박한 것입니다.
당시 애런은 하루에 3000통이 넘는 편지를 받아 개인 비서를 둘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애런의 기록 도전에 모두가 호의적인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1974년 시즌을 앞두고 애런은 끊임없는 살해 위협과 협박 편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국 야구 최고의 영웅이던 루스의 기록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애런이 깨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극성을 부렸습니다. 당시 애틀랜타 저널의 스포츠부장이던 루이스 그리자드는 애런의 부고 기사를 준비해놨을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했습니다.
물론 격려와 성원도 많이 답지했습니다. 특히 베이브 루스의 미망인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맹비난하며 ‘내 남편은 애런의 기록 도전을 열광적으로 성원하고 있을 것이다.’라며 공개적으로 애런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1974년 브레이브스는 신시내티와의 원정 3연전으로 시즌을 시작했습니다.
3게임만 치르면 홈으로 돌아가는 브레이브스 구단 측은 홈구장에서 신기록을 수립하길 원해 당초 원정 3연전에 애런을 기용하지 않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러자 보위 쿤 당시 커미셔너는 애런이 적어도 두 게임을 뛰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고, 애런은 시즌 첫 타석에서 레즈의 선발 투수 잭 빌링햄에게 홈런을 뽑아 루스의 기록과 타이인 714호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신기록은 홈구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974년 4월 8일 브레이브스 구단 사상 최다인 5만3775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애런은 4회말 LA 다저스의 알 다우닝에게 좌월 홈런을 터뜨렸습니다. 그 공은 브레이브스 불펜에 떨어져 구원 투수 톰 하우스가 잡아냈습니다.
영원불멸할 것으로 여겨지던 베이브 루스의 최다 홈런 기록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1934년 2월 5일 미국 동남주의 앨라배마 주 모빌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헨리 루이스 애런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려서 그를 ‘행크’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팬들이 붙여준 별명도 ‘해머링 행크’였다. 망치로 때리듯 공을 강하게 친다고 생긴 별명이었습니다.
모빌의 센트럴고교 시절부터 애런은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3루수와 외야수를 본 애런은 1,2학년 때 계속 중심 타자로 활약하며 팀을 2년 연속 니그로고교 챔피언에 올려놓았습니다. 3학년 때 사립학교인 조세핀 알렌고교로 전학한 그는 3루수와 유격수를 보며 풋볼 스타로도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의 야구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고등학생이면서 모빌 블랙베어스라는 세미프로 팀에서 뛰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로 원정 경기는 못 갔지만, 홈게임이 벌어지면 고교생 스타 애런은 한 게임당 3달러를 받고 세미프로선수들 사이에서 주전으로 활약했습니다.
1951년 11월에는 만 17세의 나이에 프로팀 크라운스와 계약한 애런은 첫 시즌부터 크라운스가 니그로리그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즌이 끝나고 애런은 브룩클린 다저스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지만 뽑히지 못했습니다.
다저스는 로베르토 클레멘테와 계약하고도 룰5 드래프트로 피츠버그에 빼앗기기도 했는데, 애런을 영입할 기회도 차버린 것입니다. 만약 행크 애런과 클레멘테가 동시에 외야에 포진했었다면 다저스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겁니다. 두 선수는 18년간 브레이브스와 파이어리츠에서 같은 시즌을 뛰었습니다. 둘이 합쳐 6771안타와 995홈런을 쳤습니다.
1953년에는 트리플A에서 타격 5관왕을 차지한 애런은 1954년 3월14일 브루어스의 좌익수로 처음 MLB 시범 경기에 출전했다. 전날 주전 좌익수 보비 톰슨이 슬라이딩을 하다가 발목이 부러지자 애런이 투입됐는데, 첫 경기부터 홈런을 때리며 신고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13일 드디어 MLB 데뷔전을 치릅니다.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서 비록 5타수 무안타에 그쳤지만, 그의 길고 화려한 야구 생애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애런은 니그로리그에서 뛰다가 MLB로 옮긴 마지막 선수이기도 합니다.
니그로 리그는 스타들이 대거 MLB로 빠져나가고 인기가 폭락하고 경영난에 시달리다가 결국 역사 뒤편으로 사라집니다. MLB의 흑인 출전 금지라는 못된 규정 때문에 그들만의 리그로 생겨난 니그로리그였는데, 결국 MLB로 스타들을 모두 빼앗기면서 수명이 다하고 말았습니다.
루키 시즌 막판에 발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던 애런은 2년차인 1955년 처음 올스타에 뽑힌 이래 25번이나 올스타전에 출전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데뷔 첫 시즌과 마지막 시즌을 빼고 계속 올스타에 뽑혔는데,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매년 두 차례씩 올스타 경기가 열려, 총 25번 올스타라는 최다 기록을 세웠습니다.
윌리 메이스와 스탠 뮤지얼이 각각 24번 올스타에 뽑혀 공동 2위입니다.
애런은 1955년부터 1975년까지 21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돼. 연속 선정 기록에서도 역대 1위를 기록했습니다.
올스타는 팬투표로 선정되는 만큼 애런이 얼마큼 팬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애런은 1956년에는 3할2푼8리로 NL 타격왕에 올랐고, 1957년에는 3할2푼2리에 리그 최고인 44홈런, 132타점의 맹활약으로 NL MVP에 뽑혔습니다.
그해 애런은 양키즈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3할9푼3리에 3홈런 7타점의 맹활약을 펼치면서 밀워키 브레이브스 사상 유일한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됐습니다.
한 시즌 최다 홈런이 47개로 한 번도 50개 이상의 홈런일 친 시즌이 없던 애런은 루스 같은 폭발적인 파워 타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강하고 기복이 없는 활약으로 차근차근 대기록에 접근했습니다. 자신의 배번과 같은 44개의 홈런을 때린 시즌이 네 번 있었고, 40개 이상 8번, 30개 이상 홈런 친 시즌이 15번이었습니다.
1965년 브레이브스는 연고지를 밀워키에서 애틀랜타로 옮겼지만 애런의 활약은 변함없었습니다. 사상 8번째로 500홈런 고지를 돌파한 애런은 1969년 7월 30일 537번째 홈런을 때려 루스와 윌리 메이스에 이어 역대 3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1970년에는 3000안타를 돌파하며 최초로 3000안타와 500홈런을 같이 기록하는 선수가 됐습니다.

1974년 루스를 넘어선 대기록을 쓴 애런은 733홈런으로 시즌을 마쳤고, 41세에 밀워키 브루어스로 트레이드됐습니다. 당시 브루어스는 AL이었기 때문에 애런은 지명 타자로 2년을 더 뛰고 755홈런 기록을 남긴 채 1976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늘 조용하고 겸손한 애런이었지만 타석에의 자신감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을 빌면 “나는 야구를 하는 동안 내내 한 가지 구질만 노렸다. 내가 노린 건 변화구뿐이었다. 항상 그랬다. 강속구에 대해서는 걱정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떤 투수의 강속구도 나를 그냥 지나치지는 못했다. 단 한 명도 그런 투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는 패스트볼을 정말 잘 치는 타자였습니다.
루스의 714홈런 기록을 넘어 총 755개의 홈런을 쳤을 뿐 아니라, 통산 14번이나 3할 이상을 기록한 교타자였습니다.
또한 한 시즌 평균 삼진이 63개에 지나지 않아, 강타자들에게 따라다니는 무수한 헛스윙 대신 좋은 선구안도 가졌고, 통산 240개의 도루를 기록할 정도로 스피드도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우익수로 3번의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수비력과 빨랫줄 송구를 하는 강한 어깨를 지닌 전천후 선수였습니다.
애런은 홈런 외에도 많은 대단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통산 타점(2297) 장타(1477) 총루타수(6856) 17년 연속 150안타 등은 모두 여전히 빅리그 사상 최고의 기록입니다. 그 외에도 안타 3위(3771), 득점은 루스와 공동 4위(2174) 등 그의 이력서는 그 어느 타자보다 화려합니다.
1982년 97.8%의 득표율(당시까지는 타이 콥에 이어 역대 2위)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애런은 은퇴 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부회장을 지내는 등 소수 민족 출신으로는 최초로 빅리그 팀의 수뇌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스포팅뉴스가 뽑은 역대 100대 선수 중에 5위에 오른 애런은 20세기 올스타팀에도 당연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또한 은퇴 후 애틀랜타 인근에 현대, 혼다, BMW, GM, 토요타 등의 자동차 딜러를 여러 개 보유해 사업가로도 성공을 거뒀습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새 홈구장인 트루이스트 파크를 비롯해, 옛 구장 터너필드와 밀워키의 아메리칸 패밀리 필드, 그리고 쿠퍼스타운 명예의 전당 1층 등 미국 여러 곳에 애런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매년 월드시리즈 동안 열리는 ‘행크 애런상’ 시상식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던 애런은 지난 2021년부터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2021년 1월 초 흑인계 지역 사회에 코로나 예방주사 접종률이 현저히 떨어지자 몇몇 유명 인사와 함께 애틀랜타의 한 병원에서 공개적으로 예방접종을 했습니다. 그리고 1월 22일 취침 중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 86세였습니다.
늘 조용하고 겸손하면서도 단단하던 홈런왕 행크 애런은 그렇게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