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⑦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
연재

테드 윌리엄스 Ⓒ MLB.com
테드 윌리엄스는 단일 시즌 타율 4할을 넘긴 마지막 타자이자,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한 명입니다. 윌리엄스는 1939년부터 1960년까지 22시즌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만 뛰면서 통산 2,292경기 2,654안타 521홈런 1,839타점 타율 0.344 출루율 0.482 OPS 1.116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올스타에 19번, 아메리칸리그 MVP에 2번 선정됐으며 타격왕 6회, 홈런왕 4회, 타점왕 4회, 트리플크라운 2회를 달성했죠.
타자로서 윌리엄스의 최대 능력은 '선구안'이었는데요. 윌리엄스는 출루율에서 무려 12번이나 1위에 오르면서 통산 출루율 0.482(역대 1위)를 기록했습니다. 한편, 윌리엄스는 정확성과 파워를 동시에 갖춘 완성형 타자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윌리엄스의 타율 0.344는 라이브볼 시대 기준 1위이며, 장타율(0.634)과 OPS(1.116)에서는 모두 베이브 루스에 이어 역대 2위에 올라있습니다.
이와 같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윌리엄스가 말 그대로 '타격에 미친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윌리엄스는 엄청난 연습량과 수없는 연구를 통해 자신만의 타격 이론을 정립했는데요. 윌리엄스의 저서인 '타격의 과학(The Science of Hitting)'에는 2010년대 이후 주목받기 시작한 개념인 어퍼 스윙, 타구 속도 및 발사 각도, 핫/콜드 존 등 현대적인 타격 이론이 50년을 앞서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선구안을 중시하는 특유의 타격 접근법 역시 시대를 앞서 있었구요.
테드 윌리엄스, 위대한 여정의 시작

마이너리그 시절 테드 윌리엄스 Ⓒ MiLB.com
윌리엄스의 본명은 '테디 사무엘 윌리엄스(Teddy Samuel Williams)'로, 1918년 8월 3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전직 군인이자 사진작가인 사무엘 윌리엄스와 구세군 활동가인 메이 벤조르 윌리엄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윌리엄스는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조 고든과 함께 뛰기도 했던 전직 준-프로 야구선수 출신인 외삼촌 사울 벤조르에게 여덟 살부터 야구공을 던지는 법을 배웠는데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페퍼 마틴과 뉴욕 자이언츠의 빌 테리를 롤 모델로 삼아 야구선수의 꿈을 키우던 윌리엄스는 허퍼트 후버 고교 시절 팀의 에이스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고교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낸 윌리엄스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뉴욕 양키스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 집을 떠나기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한 어머니의 반대로 지역 마이너리그 팀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계약했습니다.
윌리엄스는 1936년 샌디에이고 소속으로 42경기에서 홈런 없이 타율 0.271 11타점이라는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38경기에서 타율 0.291 23홈런 98타점으로 샌디에이고의 퍼시픽코스트리그(PCL) 우승을 이끌며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 에디 콜린스의 눈에 띄었습니다. 콜린스는 그 해 12월 샌디에이고에 이적료 35,000달러와 4명의 선수를 주는 대가로 윌리엄스를 영입합니다.
1938년 19세의 윌리엄스는 플로리다주 사라소타에서 열린 레드삭스의 스프링 캠프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때 윌리엄스는 레드삭스의 장비 관리자인 조니 올랜도로부터 '더 키드'라는 별명을 얻는데요. 윌리엄스는 캘리포니아의 홍수로 철도가 막혀서 스프링 캠프에 열흘 늦게 참가하게 됐는데, 그가 처음으로 사라소타에 도착했을 때 올랜도가 "그 아이(The Kid)가 드디어 왔군"이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했습니다.
전국적인 관심 속에서 데뷔한 '더 키드'

데뷔 초기 테드 윌리엄스 Ⓒ MLB.com
윌리엄스는 메이저리그 스프링 캠프에 약 일주일 동안 참가한 후 레드삭스의 산하 더블 A 팀인 미니애폴리스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윌리엄스에겐 행운이었는데요. 밀러스의 스프링 캠프에 있는 동안 통산 3번의 4할 타율을 기록한 로저 혼스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해 봄 밀러스의 코치였던 혼스비는 윌리엄스에게 "좋은 공만 친다"라는 훗날 평생에 걸친 철학이 될 타격 이론을 비롯해 다양한 조언을 해줍니다.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동안 윌리엄스는 빠르게 팀의 스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윌리엄스는 1938년 타율 0.366 43홈런 142타점으로 더블 A에서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습니다. 그가 이듬해 레드삭스로 콜업될 것이라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죠. 1938년 겨울 레드삭스는 윌리엄스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그 해 타율 0.340을 기록한 우익수 벤 채프먼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현 가디언스)로 트레이드합니다.
이에 대해 지역지 <보스턴 글로브>는 "조 디마지오가 1936년 뉴욕 양키스에 입단한 이후로 어떤 신인도 이번 봄에 윌리엄스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전국적인 홍보를 받은 적이 없었다"라며 전례 없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윌리엄스는 4월 20일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 양키스의 투수를 상대로 4타수 1안타를 기록하는데요. 이는 윌리엄스와 양키스의 레전드 1루수 루 게릭의 유일한 맞대결이기도 했습니다.
윌리엄스는 빅리그 데뷔 첫해인 1939년부터 타율 0.327 31홈런 145타점 OPS 1.045로 아메리칸리그 타점왕에 오르며 레드삭스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145타점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신인 신기록입니다. 아쉬운 건 이 시기는 아직 메이저리그에 신인상이 없었다는 건데요. 그러나 양키스의 전설 베이브 루스는 윌리엄스를 '올해의 신인'으로 선언했고, 윌리엄스 역시 훗날 "나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현대 야구 마지막 4할 타율을 달성하다

테드 윌리엄스 Ⓒ MLB.com
윌리엄스는 메이저리그 데뷔 2년 차인 1940년 타율 0.344 23홈런 113타점 OPS 1.036을 기록했고, 출루율(0.422)과 득점(134)에서 리그 1위에 올랐습니다. 이는 윌리엄스가 출루율 1위를 기록한 12번의 시즌 중 첫 번째 시즌이었는데요. 이후 윌리엄스는 1958년까지 규정타석을 채운 시즌에는 한 번도 빠짐없이 출루율 1위자리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해부터 선수 생활 내내 윌리엄스를 괴롭힌 매스컴 및 팬들과의 불화도 시작됐습니다.
1941년 윌리엄스는 타율 0.406 37홈런 120타점 OPS 1.287으로 현대 야구 마지막 4할 타율을 달성하며 역사적인 시즌을 보냅니다. 윌리엄스는 정규 시즌 마지막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의 더블헤더를 앞두고 타율 0.39955를 기록 중이었는데, 그대로 시즌을 마칠 경우 공식적으로 4할 타율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레드삭스의 감독 조 크로닌은 윌리엄스에게 결장할 기회를 줬습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감독의 제안을 거절하고 2경기에 모두 나서 8타수 6안타를 기록하며 타율 0.406으로 시즌을 마칩니다.
이해 윌리엄스는 타율·홈런·득점 부문 1위에 오르며 MVP 유력 후보로 거론됐는데요. 그러나 MVP는 '56경기 연속 안타'와 타점 1위를 기록한 조 디마지오에게 돌아갔고, 이때부터 윌리엄스와 MVP의 악연(?)이 시작됐습니다. 실제로 윌리엄스는 이듬해에도 타율 0.356 36홈런 137타점 OPS 1.147로 커리어 첫 타격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지만, MVP 투표에선 타율 0.322 18홈런 103타점을 기록한 양키스의 2루수 조 고든에게 밀려 2년 연속 2위에 그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그리고 복귀
테드 윌리엄스 Ⓒ MLB.com
윌리엄스는 진주만 공습 후 1942년 1월 군에 징집됐지만, 이혼한 어머니의 유일한 부양자였기 때문에 예비군으로 배치됐습니다. 하지만 1942시즌이 끝나자, 그는 "이 정도면 어머니를 부양할 수 있는 돈은 충분히 모았다"라며 참전을 선언합니다. 윌리엄스는 전투기 조종사로 훈련을 받은 후 1944년 5월 미국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고, 그와 동시에 첫 번째 부인인 도리스 소울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1946년 1월 제대할 때까지 비행 교관으로 복무했죠.
전쟁 막바지, 윌리엄스는 전장 투입을 앞두고 있었지만 진주만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이에 전쟁이 끝났는데요. 전쟁으로 인해 윌리엄스는 선수로서 최전성기였을 24세부터 26세까지 3시즌을 송두리째 날렸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돌아온 윌리엄스는 1946년 타율 0.342 38홈런 123타점 OPS 1.164으로 3시즌 동안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맹활약을 펼치면서 레드삭스의 1918시즌 이후 첫 월드시리즈 진출을 이끌고 커리어 첫 MVP에 선정됩니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월드시리즈를 앞두고 연습 경기에서 상대 투수가 던진 공에 팔꿈치를 맞아 부상을 당했고, 이로 인해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200 1타점에 그칩니다. 윌리엄스가 부진하자 소속팀 레드삭스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습니다. 이는 윌리엄스의 선수 경력에서 유일한 월드시리즈였는데요. 50년 후 인생에서 가장 바꾸고 싶은 순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1946년 월드시리즈"라고 답했습니다.
이듬해인 1947년 윌리엄스는 타율 0.343 32홈런 114타점 OPS 1.133으로 커리어 두 번째 타격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지만, 이번에도 MVP 투표에선 타율 0.315 20홈런 97타점을 기록한 디마지오에게 한 표 차이로 패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1948년 타율 0.369 25홈런 127타점 OPS 1.112로 2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했고, 1949년 타율 0.343 43홈런 159타점 OPS 1.141로 홈런 타점 부문 1위에 오르면서 커리어 두 번째 MVP에 선정됩니다.
한국 전쟁에도 참전하다

테드 윌리엄스 Ⓒ MLB.com
윌리엄스는 1950년 전반기까지 타율 0.321 25홈런 83타점 OPS 1.157으로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코미스키 파크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랄프 카이너의 타구를 잡다가 펜스에 부딪혀 왼쪽 팔꿈치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합니다. 윌리엄스를 검사한 의사는 완치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는데요. 2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은 윌리엄스는 깁스를 푼 후 오른팔에서 4인치(약 10cm) 이내로만 팔을 뻗을 수 있었습니다.
두 달 후인 9월 7일 복귀한 윌리엄스는 타율 0.317 28홈런 97타점 OPS 1.099로 시즌을 마칩니다. 시즌이 끝난 후 윌리엄스는 팔꿈치 통증으로 인해 다시는 타격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은퇴를 고려했는데요. 하지만 레드삭스의 구단주 톰 요키는 트레이너인 잭 패든을 윌리엄스의 집으로 보내 그를 설득해 줄 것을 요청했고, 패든의 간곡한 설득으로 은퇴를 번복합니다. 훗날 윌리엄스는 "패든이 나의 커리어를 구해줬다"라면서 감사를 전했습니다.
1951년 윌리엄스는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타율 0.318 30홈런 126타점 OPS 1.019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1952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여러 조종사를 현역으로 복귀시켰고, 그중에는 곧 34세가 되는 윌리엄스도 있었습니다. 윌리엄스는 처음엔 자신의 소집에 분노했지만,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합니다. 레드삭스는 다시 군복을 입게 되는 그를 위해 4월 30일 '테드 윌리엄스 데이'를 가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전투기 조종사로 전장에 투입된 윌리엄스는 세 번째 비행에서 대공포에 맞아 동체 착륙을 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기도 하는 등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39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1953년 8월 제대한 윌리엄스는 복귀 전까지 연습 기간이 열흘에 불과했음에도 해당 시즌 37경기에서 타율 0.407 13홈런 34타점 OPS 1.410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알립니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테드 윌리엄스 Ⓒ MLB.com
윌리엄스는 복귀 후 풀타임 첫해인 1954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면서 단 117경기 출전에 그쳤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율 0.345 29홈런 89타점 OPS 1.148을 기록했지만, 리그 1위인 볼넷 136개를 얻어내면서 규정 타수에 14타수가 모자라 타율 0.341을 기록한 바비 아빌라에게 타격왕 타이틀을 내줬습니다. 이는 큰 논란을 몰고 와 결국 규정 타수는 '규정 타석'으로 바뀌게 됩니다.
윌리엄스는 1955년 첫 아내인 도리스와 이혼 문제로 시즌 첫 달을 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5월 28일 복귀한 윌리엄스는 타율 0.356 28홈런 83타점 OPS 1.200으로 시즌을 마치며 '올해의 컴백 플레이어'로 선정됩니다. 1956년에는 복귀 후 가장 많은 136경기에 출전해 타율 0.345 24홈런 82타점 OPS 1.084를 기록했지만,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한 양키스의 미키 맨틀(타율 0.353)에게 밀려 타율 2위에 그쳤습니다.
1957년은 윌리엄스가 마지막 불꽃을 태운 한 해였는데요. 만 39세의 윌리엄스는 타율 0.388 38홈런 87타점 OPS 1.257으로 4할 타율 달성에는 아쉽게 실패했지만, 9년 만에 타격왕 타이틀을 탈환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타율 0.328 26홈런 85타점 OPS 1.042로 2년 연속이자 통산 6번째 타격왕에 오릅니다. 하지만 그런 윌리엄스도 1959년 타율 0.254 10홈런 43타점 OPS 0.791에 그치며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에 실패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윌리엄스가 은퇴할 것으로 예상했죠. 그러나 1959년과 같은 성적으로 커리어를 마감하고 싶지 않았던 윌리엄스는 은퇴를 거부했고, 1960년 타율 0.316 29홈런 72타점 OPS 1.096을 기록한 후에야 비로소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특히 윌리엄스는 마지막 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통산 521번째 홈런을 때려냈는데요. 이에 펜웨이파크 관중은 기립박수를 보냈지만, 윌리엄스는 마지막까지 팬들에게 답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미디어 친화적이지 않은 선수

테드 윌리엄스 Ⓒ MLB.com
뛰어난 성적만큼이나 윌리엄스를 따라다닌 수식어가 있었으니, 바로 '미디어 친화적이지 않은 선수'라는 꼬리표입니다. 윌리엄스와 매스컴의 불화는 보스턴 지역지 기자와의 인터뷰를 거절하면서부터 촉발됐는데요. 윌리엄스는 매스컴이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부모님이 자주 집을 비우면서 스스로와 동생을 건사해야 했던 과거는 드러내기 싫은 사생활의 영역이었죠.
하지만 보스턴 지역지는 윌리엄스의 어머니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를 불우한 사람으로 묘사했고, 자존심이 강한 윌리엄스는 이러한 매스컴에 행태에 강한 불만을 품었습니다. 윌리엄스는 기자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키보드의 기사단(knight of keyboard)'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기자들의 클럽하우스 출입을 막는 한편, 기자석을 향해 침을 뱉기도 했을 정도로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매스컴과의 관계는 그의 수상 경력에도 악영향을 끼쳤는데요. 실제로 윌리엄스는 1947년 타격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음에도 한 표 차이로 MVP를 조 디마지오에게 내줬는데, 이는 그와 사이가 나쁜 기자 한 명이 그를 투표에서 배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윌리엄스는 레드삭스의 팬들과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죠. 일례로 그는 신인 시절 이후 팬들의 환호에 모자를 벗어 화답하는 것을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속으론 팬들의 열정과 경기 지식에 대해 많은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실제로 윌리엄스는 현역 시절부터 백혈병 치료를 받는 어린이들을 조용히 찾아가서 병원비를 대신 납부해주고는 했는데요. 1940년대 후반 백혈병 연구와 치료를 지원하는 재단을 만든 후 2010년까지 약 7억 50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하는 등 사회봉사에 적극적이었죠.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모두와 화해의 악수를 나눴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화해의 악수를 나누다

은퇴 후 윌리엄스는 1961년부터 1966년까지 보스턴의 스프링 캠프에 정기적으로 방문해 타격 인스트럭터로 일했습니다. 이 시기 윌리엄스는 자신의 뒤를 이어 보스턴의 좌익수를 맡은 칼 야스트렘스키의 성장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1966년 첫 번째 투표에서 93.4%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합니다. 헌액식에서 윌리엄스는 니그로리그 선수들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윌리엄스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워싱턴 새너터스의 감독을 맡았고, 1972년 텍사스 레인저스로 팀명을 바꾼 후에도 팀에 남았는데요. 윌리엄스의 감독으로서 최고의 시즌은 1969년으로 워싱턴을 리그 꼴찌에서 4위로 끌어올리며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위대한 선수와 마찬가지로 윌리엄스는 평범한 선수들의 능력과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972시즌 후 해임된 그는 다시는 감독을 맡지 않습니다.
1991년 펜웨이파크에서 열린 '테드 윌리엄스 데이'에 참석한 윌리엄스는 절대로 모자를 벗지 않겠다는 평생의 고집을 꺾고 재킷에서 레드삭스의 모자를 꺼내 흔들며 팬들에게 답례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팬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표한하는 방법을 몰랐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모두와 화해한 윌리엄스는 2002년 7월 5일 향년 83세의 나이에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Ted Williams 선수가 1941년 서명한 라이프 매거진
테드 윌리엄스는 1941년 타율 0.406으로 현대 야구 마지막 4할 타율을 달성합니다. 이 해 미국의 저명한 시사 잡지 『라이프 LIFE』는 9월호 표지 모델로 테드 윌리엄스를 선정하며 그가 이룬 업적을 기렸는데요. 이 소장품은 자신이 표지 모델로 나온 『라이프 LIFE』의 1941년 9월호 표지에 테드 윌리엄스가 직접 서명한 것입니다. 이후 지금까지도 4할 타율이 나오지 않고 있기에 더 특별한 가치를 지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