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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⑤ 역대 최고의 우타자, 로저스 혼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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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로저스 혼스비 © MLB.com

 

로저스 혼스비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교타자 중 한 명입니다. 혼스비의 통산 타율 0.358은 타이 콥(0.366)과 오스카 찰스턴(0.364)에 이은 역대 3위인데요. 하지만 우타자로 한정하면 압도적인 1위입니다. 역대 타율 1위부터 13위까지 우타자는 혼스비와 8위 에드 델라한티(0.346)뿐이죠. 혼스비는 통산 7차례나 타격왕을 차지했고. 그중에서 3번은 4할 타율을 넘겼습니다. 특히 1924년에는 타율 0.424로 1900년 이후 단일 시즌 최고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혼스비는 타율만 높은 유형의 타자도 아니었는데요. 혼스비는 1922년 타율 0.401 42홈런 152타점, 1925년 타율 0.403 39홈런 143타점을 기록하면서 트리플크라운을 두 차례 달성했는데, MLB 역사상 트리플크라운을 두 번 이상 달성한 타자는 테드 윌리엄스와 혼스비뿐입니다. 하지만 4할 타율과 홈런왕을 두 번 동시에 달성한 타자는 혼스비가 유일무이하죠. 더 대단한 점은 이러한 성적을 수비 부담이 심한 2루수로 뛰면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깡마른 텍사스의 청년, 프로 야구를 꿈꾸다

로저스 혼스비 © MLB.com

로저스 혼스비(Rogers Hornsby)는 1896년 4월 27일 텍사스주의 작은 마을인 윈터스에서 에드와 매리 혼스비 부부의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혼스비가 두 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는 다섯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근처 도시인 포트워스로 이사했는데요. 혼스비의 어머니와 세 형은 육류 가공 및 포장 공장에서 일했고, 어린 혼스비는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어머니가 직접 만든 유니폼을 입고 동네 아이들과 야구를 했습니다.

 

혼스비는 매우 어린 나이에 선수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그는 10살이 되자 공장에서 배달부로 일하면서 성인 야구팀의 배트보이를 했고, 때로는 대체 선수로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5살 때부터는 포트워스 리그의 노스사이드 애슬레틱스를 비롯한 여러 준-프로 야구팀에서 뛰었죠. 혼스비는 노스사이드 고교 시절 야구와 미식축구를 병행했는데, 당시 팀 동료 중에는 훗날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보 맥밀린도 있었습니다.

 

혼스비는 2년 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교를 중퇴하고 육류 가공 공장에 정규직으로 입사해야 했지만, 야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는데요. 1914년 봄, 당시 만 17세였던 혼스비는 마이너리그 선수였던 형(에버렛 혼스비)의 추천으로 텍사스 리그의 댈러스 스티어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입단 테스트에 통과한 혼스비는 댈러스 스티어스와 계약까지 맺었으나, 시즌이 시작되고 2주 만에 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한 채 방출됩니다.

 

하지만 혼스비는 이에 굴하지 않고 텍사스-오클라호마 리그의 휴고 스카우츠 팀에 지원해 유격수로 선발되어 월급 75달러 계약을 맺으며 프로선수로서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스카우츠는 51경기만 치른 후 해체됐지만 혼스비는 같은 리그의 데니슨 챔피언스로 이적하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죠. 하지만 전반적으로 좋은 출발은 아니었는데요. 깡마른 체구(180cm 61kg)였던 혼스비는 타율 0.232에 그쳤고 113경기에서 45실책을 기록했습니다.


세인트루이스 입단 후 잠재력을 만개하다

로저스 혼스비 © MLB.com

 

그랬던 혼스비는 이듬해 인생의 은인을 만나게 됩니다. 1915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외곽에 스프링캠프를 차린 뒤 근처 마이너리그 팀과 연습 경기를 치렀는데, 그중에는 혼스비의 소속팀 데니슨과 경기도 있었습니다. 해당 경기에서 혼스비는 세인트루이스의 스카우트였던 밥 코네리의 눈길을 끌었는데요. 혼스비는 그 해 데니슨에서 타율 0.277까지 끌어올렸고, 코네리의 추천을 받아 시즌 막판 세인트루이스로 트레이드됐습니다.

 

혼스비는 1915년 9월 11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서 빅리그에 데뷔했습니다. 팀이 0-7로 뒤진 6회 말 유격수로 교체 투입된 그는 2타수 무안타로 경기를 마쳤습니다. 혼스비는 빅리그 데뷔 첫해 18경기에 출전해서 57타수 14안타 타율 0.246를 기록했는데요. 하지만 혼스비의 나이는 불과 19세로 그 해 내셔널리그에서 네 번째로 어린 선수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혼스비는 만 20세가 된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요. 빅리그 첫 시즌을 마친 혼스비는 대담하게도 감독인 밀러 허긴스에게 자신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허긴스는 "꼬마야, 너는 좀 말랐지만 자질이 있어. 너를 1년 동안 농장(Farm,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 보내줄까?"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한 혼스비는 정말로 삼촌의 농장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가능한 한 많은 고기를 먹고, 우유를 마시면서 약 30파운드 가까이 근육량을 늘렸다고 전해집니다.

 

혼스비는 빅리그 2년 차인 1916년 타율 0.313 6홈런 65타점 OPS 0.814로 NL 타율 4위에 올랐습니다. 또한 3루타 부문에서도 15개로 NL 2위를 기록하는 등 장타력에서도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이는 바뀐 타격폼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마른 체구에 몸 쪽에 약점이 있었던 혼스비는 이전까지 극단적으로 웅크린 채 공을 맞히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체격이 커지자 몸을 세우고 공을 강하게 때리면서 장타가 비약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이죠.


베이브 루스와 메이저리그를 양분하다

로저스 혼스비 © MLB.com

 

혼스비는 이후에도 꾸준한 활약을 펼치며 서서히 세인트루이스의 간판선수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리고 1920시즌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이해 혼스비에겐 두 가지 결정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째, 아메리칸리그에서 베이브 루스가 엄청난 수의 홈런을 쳐내면서 뉴욕 양키스가 흥행몰이에 성공하자 MLB 사무국이 1920년부터 공인구의 반발력을 높이면서 메이저리그는 데드볼 시대에서 라이브볼 시대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세인트루이스의 사장 겸 감독이었던 브랜치 리키가 유격수-2루수-3루수를 오가며 출전하던 혼스비의 포지션을 2루수로 고정시키면서 수비에 대한 부담을 줄여줬습니다. 혼스비는 1920년 149경기 218안타 9홈런 94타점 타율 0.370 출루율 0.431 장타율 0.559을 기록하며 타율·출루율·장타율·안타·2루타(44)·타점 1위로 타격 6관왕에 오릅니다. 이를 시작으로 1925년까지 6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하면서 말 그대로 내셔널리그를 지배했습니다.

 

특히 혼스비는 1924년 타율 0.424로 1900년 이후 단일 시즌 최고 타율을 기록했고, 1922년 타율 0.401 42홈런 152타점 OPS 1.181, 1925년 타율 0.403 39홈런 143타점 OPS 1.245를 기록하면서 트리플크라운을 두 차례나 달성했습니다. 현대 메이저리그(니그로리그 제외)에서 4할 타율을 3번 달성한 타자는 타이 콥과 혼스비뿐입니다. 하지만 단일 시즌 4할 타율과 홈런왕을 두 번 이상 동시에 달성한 타자는 혼스비가 유일무이합니다.

 

혼스비는 1926년 여러 부상에 시달리면서 타율 0.317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1926년은 혼스비의 긴 커리어를 통틀어서도 가장 값진 시즌이었는데, 선수 겸 감독으로 뛰면서 세인트루이스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이해 세인트루이스는 월드시리즈에서 베이브 루스가 이끄는 양키스를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꺾고 우승을 차지했는데, 7차전 마지막 아웃카운트는 도루를 시도하는 루스를 혼스비가 태그아웃하는 장면이었습니다.


ㅣ커리어 말년,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로저스 혼스비 © MLB.com

 

시즌 종료 후 혼스비는 세인트루이스 구단에 3년간 연봉 5만 달러 계약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세인트루이스의 사장 브랜치 리키는 혼스비가 경마장에 가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1년 5만 달러 계약을 역으로 제안했고, 혼스비가 끝까지 양보를 하지 않자 그를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했습니다. 사실 혼스비와 리키의 관계는 이 사건 이전부터 틀어질 대로 틀어져있었는데요. 특유의 독선적인 태도로 경영진, 코치진, 동료들과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이언츠로 이적한 혼스비는 1927년 타율 0.361 26홈런 125타점 OPS 1.035로 반등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존 맥그로 감독과의 마찰, 경마장에서 도박 문제로 구단주 찰리 스톤햄에게 찍힌 그는 단 1년 만에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됩니다. 브레이브스로 이적한 혼스비는 1928년 타율 0.387 21홈런 94타점 OPS 1.130으로 타격왕을 차지하는데요. 그러나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브레이브스도 그를 1년 만에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합니다.

 

혼스비는 컵스 이적 첫해인 1929년 타율 0.380 39홈런 149타점 OPS 1.139으로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238 0홈런 1타점으로 부진했고, 소속팀 컵스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게 1승 4패로 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1930년 만 34세가 된 혼스비는 시즌 초반부터 발꿈치 쪽에 지속적인 통증을 느끼며 어려움을 겪었고, 5월 말엔 주루 중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면서 42경기 출전에 그쳤습니다.

 

혼스비는 1931년 타율 0.331 16홈런 90타점 OPS 0.996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는데요. 하지만 1932년 발과 다리의 부상이 악화되면서 19경기에 출전해 타율 0.224 1홈런 7타점 OPS 0.667에 그친 후 8월 3일 방출됐습니다. 시즌 종료 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을 맺으며 친정팀에 복귀한 혼스비는 1933년 46경기에서 타율 0.325 2홈런 21타점 OPS 0.893을 기록했으나, 우승 경쟁에서 멀어진 카디널스는 시즌 중반 그를 웨이버 공시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가 영입하면서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혼스비는 브라운스에서 1933년부터 1937년까지 5시즌 동안 선수 겸 감독으로 뛰면서 선수로서 67경기 타율 0.299 3홈런 29타점 OPS 0.859를, 감독으로서는 255승 381패(0.401)을 기록한 후 방출되면서 만 41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MLB 커리어를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브라운스에서 방출된 후에도 수년간 도박으로 많은 빚을 진 혼스비는 은퇴할 수 없었습니다.

 

메이저리그 은퇴 후 혼스비의 삶

로저스 혼스비 © MLB 명예의 전당

 

혼스비는 1938년부터 인터내셔널리그(AAA 레벨)의 볼티모어 오리올스(현 볼티모어와는 다른 팀)를 비롯해 여러 마이너리그 팀의 감독을 맡았습니다. 특히 1944년에는 멕시코리그의 아술레스 데 베라크루즈와 선수 겸 감독 계약을 맺기도 했지만, 구단주와 마찰을 빚으면서 9경기 만에 해고됩니다. 1945년 미국으로 돌아온 혼스비는 30년 만에 현역 생활을 마감했는데요. 이후 혼스비는 메이저리그에서 다시 일할 기회를 얻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혼스비의 선수로서 놀라울 만큼 자기 관리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눈에 피로를 주지 않기 위해 영화도 보러 가지 않았고, 스포츠 기사 외에는 아무것도 읽지 않았는데요. 또한, 운동선수는 먹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현역 생활 동안 단백질 섭취량을 철저하게 조절하고, 수면 시간을 12시간으로 유지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관심사와 대화 주제는 오로지 야구와 경마에 국한되어 있었죠.

 

단, 야구 실력과는 별개로 좋은 팀 동료나 리더는 아니었습니다. 혼스비는 현역 시절부터 구단주, 프런트, 감독, 동료들, 매스컴과 마찰을 빚었고 감독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직설적인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이언츠 시절 팀의 젊은 유격수 닥 패럴과 저녁을 먹고 있었을 때, 한 스포츠 기자가 혼스비에게 팀이 우승을 차지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요.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패럴이 유격수를 맡는 한 어렵다"였습니다.

 

이후 패럴은 곧 트레이드됐습니다. 하지만 혼스비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요. 오히려 자신의 태도가 '정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많은 레전드 출신 감독들이 그렇듯이 그는 현역 시절 자신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던 것을 선수들이 왜 못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죠. 훗날 한 기자는 "혼스비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야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지만, 사교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덜 알고 있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역대 최고 우타자의 씁쓸했던 말년

로저스 혼스비의 통산 기록 © MLB 명예의 전당

 

혼스비는 1952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와 3년 계약을 맺으며 17년 만에 MLB 팀의 감독으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선수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요. 선수들을 비판하기 위해서만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계약 첫해 51경기 만에 혼스비가 해고됐을 때, 브라운스의 선수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구단주인 빌 비크에게 감사의 표시로 트로피를 제작해 전달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혼스비는 시즌 도중 신시내티 레즈의 감독으로 부임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53년 64승 82패(0.438)에 그치자 신시내티는 그에게 재계약 불가를 통보했고, 혼스비는 시즌 종료를 8경기 남겨두고 감독에서 물러났습니다. 신시내티에서 해고된 후 혼스비는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컵스의 코치로 일했고, 1962년에는 뉴욕 메츠의 스카우트 겸 3루 코치를 맡았습니다. 그러던 1963년 1월 5일, 혼스비는 향년 6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이후 텍사스 오스틴의 혼스비 벤드 묘지에 안장됐습니다.


Rogers Hornsby 선수가 1917-21년 사이에 사용한 게임 배트

이 배트는 1917년부터 1921년 사이에 로저스 혼스비가 사용한 Hillerich & Bradsby사의 배트로 그의 커리어 초창기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시절을 대표합니다. 이 배트를 사용하던 1917년부터 1921년까지 혼스비는 5년 연속 내셔널리그 WAR(승리기여도) 1위에 올랐습니다. 특히 1921년에는 타율 0.397 21홈런 126타점 OPS 1.097으로 안타(235), 득점(131), 2루타(44), 3루타(18), 타점(126), 타율(0.397), 출루율(0.458), 장타율(0.639), 총루타(278)에서 1위에 오르며 타격 9관왕을 차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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