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톰 글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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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를 대표했던 좌완 투수 중에 ‘톰 글래빈’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언급돼야 합니다. 오늘날처럼 150km/h를 가뿐히 던지는 시대와는 거리가 좀 있었죠. 글래빈은 빠른 공도, 화려한 커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년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하고, 통산 300승을 넘긴 투수가 바로 그였죠.

그의 직구 구속은 시속 88마일, 요즘 기준으로는 거의 체인지업에 가까운 수준입니다. 그런데 그 공들로 타자들을 속이고, 유도하고, 잡아냈습니다. 경기 운영 하나만큼은 정말 기가 막혔던 선수였죠. 특히 오른손 타자의 바깥쪽 스트라이크존 끝자락을 집요하게 찌르는 볼배합은 글래빈의 트레이드마크였습니다. 삼진을 잡으려 하기보다는, 타자에게 '스스로 헛스윙하게 만드는' 방식이었어요.
글래빈이 야구만 잘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1984년 NHL 드래프트에서 LA 킹스에 지명될 정도로 하키 실력도 수준급이었습니다. 결국 야구를 선택했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삼두마차’—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의 한 축이 됩니다. 그리고 1995년,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8이닝 1피안타 무실점 투구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고 MVP를 차지하죠. 느린 공으로도 충분히 가장 높은 무대에서 빛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던 경기였습니다.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국내 선수가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유희관 선수죠. 130km 초반대 직구로도 KBO 리그에서 101승을 기록한 흔치 않은 유형의 투수입니다. 특히 2013년부터 2019년까지 7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한 건 정말 대단했어요. 팬들 사이에선 '모닥불러'라는 별명과 함께 ‘이 속도로 프로에서 살아남는다고?’ 하는 의심과 정교한 제구력에 대한 감탄이 공존했던 투수였습니다.
글래빈이 스트라이크존 바깥쪽을 공략했다면, 유희관은 좌타자 바깥쪽과 우타자 몸쪽 승부가 인상적이었죠. 무엇보다 두 선수 모두 공이 빠르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 한계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끌어냈습니다. 느렸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았던 투수들이었어요.
요즘 투수들은 다들 150km/h를 던지고, 삼진이 곧 상품 가치인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 이 두 투수는 속도가 아닌 ‘설득’으로 아웃카운트를 만들었던 선수들입니다. 빠른 공은 언젠가 잊혀질 수 있어도, 그들처럼 느림으로 이겨낸 투수는 오래도록 우리들에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