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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④ 무결점 유격수, 호너스 와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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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호너스 와그너 © MLB.com

 

호너스 와그너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야구 카드의 주인공입니다. 2022년 미국 매체 <월스트리트 저널>은 '호너스 와그너 T-206 카드'가 개인 간 거래를 통해 725만 달러(약 99억 원)에 팔렸다고 보도했는데요. 이는 당시 기준 스포츠 카드 역사상 최고가 판매 기록이었습니다. 1909년 미국의 담배 회사 ATC가 담뱃갑 안에 넣어 발매한 이 카드는 가로 5cm 세로 7.6cm 크기로 앞면에는 주황색 배경에 와그너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카드가 천문학적인 금액에 판매된 것은 희귀성 때문이었습니다. '호너스 와그너 T-206 카드'는 1911년까지 총 206장이 시중에 배포됐는데, 1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존재가 확인된 카드는 50장도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죠. 그의 카드가 206장밖에 배포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와그너가 청소년 팬이 담배를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쇄 중단을 요청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만의 특별한 서사가 완성됩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유격수

호너스 와그너 © MLB.com

 

호너스 와그너는 MLB 역사상 최고의 유격수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와그너는 1897년에 데뷔해 1917년 은퇴할 때까지 선수 생활 대부분(14년)을 체력적인 부담이 심한 유격수로 뛰면서도 통산 2794경기에 출전해 3420안타 101홈런 1739득점 1732타점 723도루 타율 .328 출루율 .391 장타율 .467 OPS .858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 131승을 기록했는데, 그의 은퇴 시점을 기준으로 이 모든 기록은 MLB 역대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

 

와그너는 1899년부터 1913년까지 15시즌 연속 3할 타율을 달성했습니다. 그는 무려 8차례나 타격왕에 올랐는데, 이는 타이 콥(11회)에 이어 토니 그윈(8회)과 함께 메이저리그 역대 타격왕 최다 수상 공동 2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또한, 와그너는 2루타에서 7번, 3루타에서 3번, 타점에서 4번, 출루율에서 4번, 장타율에서 6번, OPS에서 9번, WAR에서 11번 내셔널리그(NL) 1위에 올랐습니다. 이정도면 한 시대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지어 와그너는 긴 팔과 큰 손, 그리고 강력한 어깨를 바탕으로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당대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는데요. 그의 별명인 '플라잉 더치맨(Flying Dutchman)'은 뛰어난 스피드로 마치 날아다니는 듯한 수비 때문에 붙은 것이었습니다. 한편, 와그너는 선천적으로 심하게 휘어진 다리를 지녔음에도 도루왕에 5차례 오르고, 통산 722도루(역대 10위)를 기록할 정도로 빠른 발을 자랑했습니다. 그야말로 야구 선수로서 '완전체'였던 셈이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와그너를 더욱 특별한 선수로 만들어준 것은 그의 성품이었습니다. 와그너가 활약하던 20세기 초반, 프로야구 선수들은 거칠고 방탕한 생활을 즐긴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에 반해 와그너는 그라운드에서 신사적으로 플레이했을 뿐만 아니라, 경기장 밖에서도 인종, 나이, 경력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겸손했죠. 그렇기에 와그너는 초창기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사랑받는 선수로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호너스란 별명의 유래, 그리고 운명의 만남

호너스 와그너 © MLB.com

 

호너스 와그너의 본명은 '요하네스 피터 와그너(Johannes Peter Wagner)'로, 187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근교의 카네기 자치구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일계 이주민인 아버지 피터와 어머니 캐서린 사이에는 9남매가 있었는데 그중 4명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와그너는 남은 다섯 남매 중 한 명이었죠. 어린 시절 어머니는 그를 '한스(Hans)'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이는 훗날 '호너스'라는 별명이 됩니다.

 

와그너는 12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광산에서 아버지와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여가 시간에 와그너와 그의 형제들은 공터에서 야구를 하곤 했는데, 훗날 와그너를 포함해 형제 중 네 명이 프로 야구 선수가 됩니다. 와그너의 형인 버트 와그너는 인터스테이트 리그에서 뛰던 1895년 감독을 설득해 동생에게 트라이아웃 기회를 줬는데요. 이때 입단 테스트를 통과한 와그너는 첫해 마이너리그 5팀에서 뛰면서 경험을 쌓습니다.

 

이 시기 와그너는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을 만남을 갖게 됩니다. 훗날 양키스 왕조의 설계자(단장)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에드 베로우(Ed Barrow)를 만난 것이죠. 인터스테이트 리그 소속 윌링 네일러스의 감독이었던 베로우는 와그너를 보자마자 그가 최고 수준의 리그에서 뛰어야 할 선수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듬해 베로우는 내셔널리그 루이스빌 콜로넬스에 연락을 해서 와그너의 경기를 보도록 설득합니다.

 

와그너의 경기를 지켜본 콜로넬스의 구단주 바니 드레이퍼스와 선수 겸 감독 프레드 클라크는 그다지 강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지는데요. 하지만 콜로넬스의 단장 해리 풀리엄은 다리가 심하게 휘었지만 당당한 체격(180cm 91kg)에 엄청난 어깨와 거대한 손을 지닌 와그너에게 매료됐고, 구단주와 감독을 설득해 2,100달러의 이적료를 주고 그를 영입했습니다. 이렇게 '플라잉 더치맨'의 전설이 시작됩니다.

 

플라잉 더치맨, 날아오르다

호너스 와그너 © MLB.com

 

1897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와그너는 61경기에서 타율 0.335를 기록하며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듬해인 1898년에는 타율 0.299으로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었지만, 1899년 타율 0.341 7홈런 114타점 37도루 OPS 0.895를 기록하면서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떠올랐죠. 1899시즌 종료 후 내셔널리그가 12팀에서 8팀으로 축소되면서 와그너의 첫 소속팀 루이스빌 콜로넬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이때 콜로넬스의 구단주 드레이퍼스가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지분 절반을 인수하면서 와그너를 비롯한 주요 선수들을 함께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피츠버그로 이적한 첫해였던 1900년, 와그너는 타율 0.381 4홈런 100타점 OPS 1.007으로 타격왕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2루타(45개), 3루타(22개), 토털 베이스(302루타), 장타율(0.573), OPS(1.007)에서도 1위를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죠.

 

1901년 MLB 편입으로 위상이 높아진 아메리칸리그는 내셔널리그에서 스타들을 빼내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와그너도 시카고 화이트삭스로부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2만 달러 계약을 제안받았죠. 하지만 이를 거절하고 피츠버그에 남은 와그너는 1901-1902년 2시즌 연속 타점왕과 도루왕을 동시에 석권하고, 1903년엔 타격왕(0.355)을 차지하면서 피츠버그를 3년 연속 내셔널리그 1위로 이끕니다.

 

피츠버그는 1903년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하면서 제1회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보스턴 아메리칸스(현 레드삭스)에 5승 3패로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습니다. 피츠버그의 간판타자였던 와그너도 월드 시리즈에서 타율 0.222에 머물렀는데요. 그 후 한동안 와그너는 큰 경기에서 약하다는 편견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1909년까지 7시즌 중 6번이나 타격왕을 차지하며 와신상담하던 와그너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옵니다.

 

맞대결에서 타이 콥을 압도하다

호너스 와그너(가운데) © MLB.com

 

1909년 와그너가 이끄는 피츠버그는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하고 월드 시리즈에 진출합니다. 맞대결 상대는 타이 콥이 이끄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였는데요. 그 해 와그너는 35세로 전성기에서 내려오는 시점이었던 반면, 콥은 22세로 무서울 것이 없는 영건이었죠. 하지만 와그너는 타율 0.333 6타점 6도루를 기록하며 타율 0.231 5타점 2도루에 그친 콥을 압도했고, 피츠버그도 4승 3패로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후에도 와그너는 1911년 타율 0.334를 기록하면서 37세의 나이로 통산 8번째 타격왕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1913년을 타율 0.300을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3할 타율을 기록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1914년 와그너는 40세의 나이로 캡 앤슨에 이어 역대 2번째로 3000안타를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1917년 74경기에서 타율 0.265를 기록한 와그너는 통산 3418안타로 NL 역대 최다안타 기록을 세우고 은퇴합니다.

 

와그너는 현역 마지막 해 잠시 선수 겸 감독을 맡으며 1승 4패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은퇴 후 피츠버그 구단의 정식 감독 취임 제안을 고사했습니다. 그리고 35년간 피츠버그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타격코치 또는 인스트럭터로 일하면서 랄프 카이너, 워너 브라더스, 파이 트레이너, 행크 그린버그 등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제자들을 길러냈죠. 선수 생활을 포함하면 무려 53년을 피츠버그에 바친 셈입니다.

 

와그너는 유격수를 떠나 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5툴 플레이어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세이버매트릭스의 대부> 빌 제임스는 '역대 최고의 선수 랭킹'에서 와그너를 베이브 루스에 이은 2위로 선정하면서 "단점이 하나도 없었던 유일한 선수"라고 평했는데요. 실제로 와그너는 9개 포지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선수였습니다. 심지어 투수로도 두 차례 마운드에 올라 8.1이닝 무실점을 기록하기도 했죠.


최초의 5인으로 선정되다

PNC 파크를 지키는 호너스 와그너의 동상 © MLB.com

 

1936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이 만들어진 후 첫 투표에서 와그너는 95.1%의 득표율로 타이 콥(98.2%), 베이브 루스(95.1%), 크리스티 매튜슨(90.7%), 월터 존슨(83.6%)과 함께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5명(일명 최초의 5인) 중 한 명이 됐습니다. 또한 타이 콥, 로저스 혼스비, 월터 존슨 등 그와 같은 시대에 뛰었던 많은 위대한 선수들은 올 타임 팀을 뽑으면서 유격수에 모두 와그너의 이름을 적어 넣었습니다.

 

1951년 코치에서도 은퇴한 와그너는 피츠버그에서 남은 생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4년 후인 1955년 5월, 피츠버그는 포브스 필드 앞에 실물 크기의 와그너 동상을 세웠습니다. 행사에 참가한 와그너는 7개월 후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와그너의 동상은 스리리버스 스타디움을 거쳐 현재는 PNC 파크 앞에 놓여있는데요. 피츠버그에서 야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와그너는 언제나 그 앞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Honus Wagner 선수가 1928-1930년경 사용한 프로 모델 배트

이 배트는 호너스 와그너가 1928-30년경 사용한 것입니다. 와그너는 1917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그가 피츠버그 산하 마이너리그 타격 코치 또는 인스트럭터로 일하는 기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죠. 이 시기 와그너는 랄프 카이너, 워너 브라더스, 파이 트레이너, 행크 그린버그 등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제자들을 길러났습니다. 이 배트는 공 자국과 클리트 자국 등 사용 흔적이 존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치가 더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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