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③ 통산 417승의 전설, 월터 존슨
연재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가장 원초적인 매력을 지닌 구종은 아마도 패스트볼(fastball)일 겁니다. 야구에서 투수와 타자의 대결에는 수많은 수 싸움이 숨겨져 있는데요. 하지만 팬들을 가장 열광시키는 것은 결국 '힘 대 힘'의 대결입니다. 투수는 온 힘을 다해 공을 던지고, 타자는 전력으로 배트를 휘두릅니다. 그렇게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타자를 압도하는 느낌을 받았을 때 우리는 전율을 느낍니다. 일명 '파이어볼러'라 불리는 강속구 투수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죠.
월터 존슨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패스트볼을 던진 투수였습니다. 존슨의 별명은 '빅 트레인(Big Train)'. 그의 공에서 마치 기차가 옆을 스쳐갈 때처럼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죠. 존슨의 패스트볼 구속이 지금 기준에서 정확하게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와 직접 맞대결을 펼쳤던 선수들의 경험담을 통해서 대략적으로나마 존슨의 패스트볼에 당대 야구인들이 가졌던 경외감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요.
패스트볼 하나로 메이저리그를 평정하다

월터 존슨 © MLB 명예의 전당
타이 콥은 존슨의 패스트볼에 대해 "단지 쉿쉿거리는 소리만 들렸다"라고 말했습니다. 더치 루더는 "처음 맞붙은 날, 존슨이 팔을 가볍게 휘두르자 총알 같은 공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내 눈이 나빠진 줄 알았다"라고 회고했구요. 전설적인 스포츠 칼럼니스트 링 라드너는 "그는 자신의 몸에 총을 숨겨놓고 있는 게 분명하다"라고 적었습니다. 심지어 조지 시슬러는 "그가 처음부터 커브를 던졌다면, 아무도 그에게 안타를 때려내진 못했을 것이다"라고 얘기했죠.
충격적이지만 사실입니다. 존슨은 커리어 말년 어깨를 다치기 전까지 패스트볼만을 던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는데요. 존슨은 1907년 데뷔해 1927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21년간 417승 279패 5914.1이닝 3509 탈삼진 ERA 2.17을 기록했고, 다승 1위를 6번, 평균자책점 1위를 5번, 탈삼진 1위를 12번, 투수 트리플크라운을 3번, MVP를 3번 차지했습니다. 417승은 사이 영(511승)에 이어 MLB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는데요. 사이 영의 511승에는 상대적으로 투수에게 유리했던 1890년대에 올린 267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존슨의 417승은 모두 아메리칸리그가 창설된 1901년 이후에 거둔 기록입니다. 특히 커리어 21년 가운데 8시즌은 1920년부터 시작된 '라이브볼 시대'에 뛰었습니다. 존슨에게 '현대 야구 최다승 투수'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이유죠. 존슨의 위대함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존슨의 통산 평균자책점(2.17)은 3,000이닝 이상 던진 투수 중 모데카이 브라운(2.06), 크리스티 매튜슨(2.13)에 이은 역대 3위입니다. 하지만 브라운과 매튜슨은 모두 라이브볼 시대 이전에 은퇴했죠. 존슨의 통산 탈삼진 3509개(역대 9위)는 명성에 비해 적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의 시대는 타자들이 삼진을 당하지 않기 위한 스윙을 하던 시기였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존슨은 통산 12차례나 탈삼진 1위에 올랐는데, 이는 놀란 라이언(11회)보다 더 많은 기록입니다.
시골뜨기 청년, 야구를 접하다

존슨은 1887년 미국 캔자스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프랭크 존슨과 미니 페리의 여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부모님의 농장 일을 돕는 한편 여가 시간에는 사냥과 낚시를 했는데요. 하지만 캔자스 지역의 지속적인 가뭄으로 인해 그의 가족은 농장을 포기해야 했고, 존슨이 14세였던 1902년 남부 캘리포니아의 작은 유전 마을인 올린다에 정착했습니다. 농장과 유전에서 일하면서 존슨은 당시로선 엄청난 체격(186cm 91kg)을 갖추게 되죠.
존슨은 16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야구를 접했는데요. 존슨은 늘 투구에 대한 자신의 재능이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훗날 그는 "처음으로 공을 잡은 순간, 마치 원래부터 거기에 속해 있던 것처럼 오른손 손바닥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공을 던졌을 때 손과 손목, 팔과 어깨 등이 모두 함께 움직이는 것 같았다"라고 회고했죠. 야구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역 석유 회사가 후원하는 준프로 팀에 스카우트 됩니다.
존슨의 투구폼은 독특했습니다. 그는 풍차처럼 오른팔을 뒤로 한번 돌린 후 긴 팔을 활용해 마치 채찍을 휘두르듯이 사이드암으로 공을 뿌렸죠. 그렇게 그의 손을 떠난 공은 눈으로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고 전해지는데요. 그가 준프로 팀에서 두 번째 시즌을 보낼 무렵,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워싱턴 세네터스(현 미네소타 트윈스)의 감독 조 캉티용은 마침 부상 중이었던 포수 클리프 블랑켄십을 스카우트로 파견해 존슨을 관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블랑켄십은 훗날 존슨과의 만남을 회고하면서 "제가 도착했을 때 마침 존슨이 마운드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팔이 길었고 마치 그곳에 있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세상에, 고작 19살인데 제가 평생 본 적이 없는 빠른 공을 던지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계약금 500달러를 제안했습니다. 그때 그 촌뜨기가 뭐라고 했는지 아시나요? 왕복 티켓을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아니, 편도 티켓이면 충분해"라고 말했습니다.
빅 트레인(Big Train), 달리기 시작한 열차

월터 존슨 © MLB.com
존슨은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자마자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1907년 5승 9패 ERA 1.88을, 1908년 14승 14패 ERA 1.65를, 1909년 13승 25패 ERA 2.22를 기록했는데요. 존슨의 패가 많았던 것은 소속팀 워싱턴의 타격과 수비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워싱턴은 존슨의 데뷔 첫 14년간 7번이나 리그 꼴찌 또는 두 번째로 낮은 순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존슨이 1-0 완봉승 38번, 0-1 완투패 26번에서 모두 MLB 역대 1위에 올라있다는 점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는데요. 존슨은 1910년 25승 313탈삼진 ERA 1.36으로 커리어 첫 탈삼진왕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10시즌 동안 연평균 26승 14패 343이닝 222탈삼진 ERA 1.59을 기록합니다. 같은 기간 그는 5번의 다승 1위, 4번의 평균자책점 1위, 9번의 탈삼진 1위에 오르면서 그야말로 메이저리그를 지배했죠. 특히 1913년에는 36승 243탈삼진 ERA 1.14로 투수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하면서 MVP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존슨의 활약에 힘입어 소속팀 워싱턴도 리그 3위 이상을 4번이나 차지하는 등 만년 꼴찌에서 벗어났습니다. 존슨의 10년 연속 20승 행진은 1920년 심한 감기와 팔 통증으로 21경기 8승 10패 ERA 3.13에 그치면서 막을 내렸는데요. 이듬해인 1921년에는 7월 아버지 프랭크 존슨이 뇌졸중으로, 12월 두 살배기 딸 엘리노어가 독감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겹치면서 17승 14패 ERA 3.51로 부진했습니다. 이는 존슨이 현역 은퇴를 결심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는 원래 1924시즌 종료 후 선수에서 은퇴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존슨은 23승 7패 277.2이닝 158탈삼진 ERA 2.72로 트리플크라운과 함께 MVP를 차지하면서 워싱턴의 창단 첫 월드시리즈 진출을 이끌었죠. 이후 WS 1차전에서 12이닝 4실점, 5차전에서 8이닝 4자책으로 2연속 완투패를 당했으나, 7차전에서 3-3으로 맞선 8회 말 등판해 4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뒤 팀도 연장 12회 말 얼 맥닐의 끝내기 안타로 승리하면서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백기사(White Knight), 현역에서 은퇴하다

클리블랜드 감독 시절 월터 존슨 © MLB.com
존슨은 WS 우승 후 현역 생활 연장을 선택했고, 1925년 20승 7패 229이닝 108탈삼진 ERA 3.07으로 마지막 20승을 달성했습니다. 또한, 타격에서도 투수 역대 최고 타율인 0.433을 기록하면서 팀의 2년 연속 WS 진출에 기여했죠. 하지만 1925년 WS는 1924년과는 정반대였는데요. 그는 WS 1차전에서 9이닝 1실점, 4차전에서 9이닝 무실점으로 2연속 완투승을 거뒀지만, 7차전에서 8이닝 5자책점으로 무너지며 준우승에 그치고 맙니다.
그리고 1927년 5승 6패 107.2이닝 48탈삼진 ERA 5.10을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합니다. 존슨은 친절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명성이 자자했는데요. 20세기 초반 메이저리그에는 난폭하고 방탕한 선수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고 음주를 즐기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스핏볼'을 비롯한 부정 투구가 유행하던 시대였음에도 반칙을 저지르지 않앗고, 위협 투구가 당연시되는 시대였음에도 고의로 빈볼을 던지지도 않았습니다.
한편, 존슨은 아이들을 사랑했고 사인 요청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의 성격이 어땠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데뷔 초반 기자들은 그를 종종 '빅 스웨이드(스웨덴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영국계 이주민의 후손이었던 존슨은 당혹스러웠지만, 이를 내색하거나 항의하지 않았죠. 나중에 그 이유에 대해서 물었을 때 존슨은 "누구도 불쾌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는 스웨덴 사람들 중에는 좋은 사람이 많으니까"라고 답했습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붙은 별명이 '월터 경(Sir Walter)' 또는 '백기사(White Knight)'입니다. 은퇴 후 존슨은 인터내셔널리그의 뉴어크에서 1년간 감독을 맡았고, 워싱턴으로 돌아와 1929년부터 1932년까지 4년간 감독을 역임했습니다. 또한, 1933년부터 1935년까지 3년간 클리블랜드의 감독으로 일했습니다. 감독 시절 존슨은 너무 선수들을 풀어준다는 비판을 받았는데요. 하지만 감독으로서도 7시즌 동안 5번이나 위닝 시즌을 보내며 준수한 성적을 거뒀습니다.
최초의 5인으로 선정되다

존슨은 1914년 네바다주 국회의원의 딸인 헤이즐과 결혼했고, 금슬이 좋은 것으로 유명했는데요. 부부는 여섯 자녀를 두었지만, 1921년 장녀인 엘리노어가 2살 때 독감으로, 1930년 사랑하는 아내도 36살이란 젊은 나이에 열사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1936년 처음으로 열린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그는 83.63%의 득표율로 타이 콥, 베이브 루스, 호너스 와그너, 크리스티 매튜슨과 함께 최초로 쿠퍼스타운에 헌액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존슨은 뇌종양으로 몇 달 동안 투병 생활을 한 후 1946년 12월 10일 워싱턴에서 만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메릴랜드주 로크빌에 있는 아내 헤이즐 옆에 안장됐습니다. 1999년 <스포팅 뉴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100인을 뽑으면서 존슨을 4위로 선정했습니다. 이는 투수로서는 가장 높은 순위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 12월, 200만 명이 넘는 야구 팬이 참여한 투표를 통해 <메이저리그 올 센추리 팀>에 선정됐습니다.

Walter Johnson을 위한 1927년 프레젠테이션 스털링 실버 티 세트
이 스털링 실버 티 세트는 1927년 은퇴하는 월터 존슨에게 그의 21년간 뛰어난 활약에 대해 감사하는 의미로 소속팀 워싱턴 새너터스가 준 선물입니다. 존슨은 1907년 데뷔해 1927년 은퇴할 때까지 워싱턴에서만 뛰었습니다. 세트의 트레이에는 "Presented to Walter Johnson, By His Many Friends, In Recognition of Twenty Years Meritorious Service as Pitcher of the Washington Baseball Team, August 2, 1927."라는 아름다운 각인이 새겨져 있는데요.
"1927년 8월 2일, 워싱턴 야구 팀의 투수로서 20년간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의 많은 친구들이 월터 존슨에게 수여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문구를 통해 친절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던 존슨의 대인관계에 대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이 세트는 커다란 트레이와 함께 다양한 차 주전자, 크리머, 설탕 또는 레몬을 담기 위한 홀더, 그리고 스탠드에 장착된 난방 장치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