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② 데드볼 시대의 지배자, 타이 콥
칼럼

© 타이 콥(MLB.com)
타이 콥은 베이브 루스의 등장 이전 데드볼 시대를 지배했던 타자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MLB 역사상 가장 극단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선수일 겁니다. 야구선수로서 그는 이견의 여지없이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콥은 통산 24시즌 동안 데뷔 첫해를 제외하고 23시즌 연속 3할 타율을 달성했는데요. 같은 기간 타격왕을 11번(또는 12번) 차지했고, 4할 타율도 3번이나 돌파했습니다. 콥의 통산 타율 0.366은 MLB 역대 1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심지어 콥은 타율만 높은 타자가 아니었는데요. 커리어 대부분을 공인구의 반발력이 낮은 데드볼 시대에 뛰는 바람에 홈런(117)은 적었지만, 수많은 2루타(724)와 3루타(295)를 때려내면서 8번이나 장타율 1위에 올랐습니다. 1928년 현역에서 은퇴했을 때, 콥은 통산 3034경기 4189안타 117홈런 2245득점 1944타점 897도루 타율 0.366 OPS 0.944로 무려 90개의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MLB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인물이기도 하죠.
타이 콥에 대한 오해와 진실
© 타이 콥(MLB.com)
타이 콥에 대한 악평은 그가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주장에서 기인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주로 콥이 사망한 후 스포츠 기자인 알 스텀프, 레이 로빈슨이 쓴 두 권의 전기에서 비롯됐는데요. 하지만 콥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과장되거나 허구라고 밝혀졌습니다. 실제로 타이 콥에 대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1961년 7월 17일, 콥이 만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장례식에 온 야구인이 단 3명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콥의 장례식에 야구인이 3명밖에 오지 않은 것은 그의 가족들이 가까운 친지만을 위한 행사이길 원했을 뿐만 아니라 시즌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훗날 가족들이 공개한 콥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는 야구인의 편지는 수 백통에 달했고, 그중에는 조 디마지오와 테드 윌리엄스의 편지도 있었습니다. 또한, 콥의 자서전을 쓴 찰리 리어슨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사망이 발표된 후 미국 전역에서 자발적으로 작은 추모식들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콥이 폭력적인 선수가 아니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콥은 선수 생활 동안 수많은 싸움에 연루됐는데요. 가장 유명한 일화는 하이랜더스의 팬을 폭행한 사건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팬이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장애인이었다는 것이죠. 이 사건으로 타이 콥은 무기한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건 전부터 그 팬은 콥에게 지속적으로 야유를 퍼부었고, 콥은 구단과 경찰 측에 해당 팬을 퇴장시켜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한 상황이었습니다.
콥이 출전 정지 징계를 받은 후 그의 팀 동료들은 사무국이 악질 팬들로부터 선수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의미에서 파업에 돌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콥의 출전 정지 기간은 10일로 줄었습니다. 콥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도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입니다. 사실 콥은 당대의 야구인 중 드물게도 열린 사고를 지닌 인물이었는데요. 실제로 콥은 여러 차례 유색인종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참여에 대해 공개적으로 찬성 의사를 밝힌 바 있습니다.
타이 콥의 운명을 바꾼 두 가지 사건

© 타이 콥(MLB.com)
타이러스 레이먼드 콥(Tyrus Raymond Cobb)은 1886년 12월 18일 미국 조지아주 내로우에서 주 상원의원이자 교육자인 윌리엄 허셜 콥과 명문가 출신인 아만다 칫우드 콥의 세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콥은 어린 시절 야구에 매료됐고 언젠간 프로선수가 되겠다고 결심했는데요. 14세부터 지역 팀에서 뛰면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콥의 아버지는 그가 야구선수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들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죠.
콥은 1904년 사우스 애틀랜틱리그의 신생팀인 어거스타 투어리스트로부터 무급을 조건으로 스프링캠프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입단 테스트에서 통과할 경우 월 50달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는데요. 콥에게 이 제안은 프로야구 선수라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네가 선택한 대로 해라, 아들아. 다만, 실패한 채로 집에 돌아오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콥의 삶과 야구에 대한 가치관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듬해인 1905년 콥은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시즌 초반 출발은 좋지 못했지만, 시즌 중반 베테랑 감독인 조지 레이디가 부임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레이디 감독은 젊고 재능이 있음에도 무모한 플레이를 일삼던 콥에게 섬세한 요령을 가르쳤는데요. 이러한 지도는 콥의 커리어에서 전환점이 됐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콥은 리그 최고의 타자로 성장했고, 이적료 750달러에 MLB 구단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됐습니다.
그때 콥의 인생을 바꿔놓을 비극적인 사건이 터집니다. 1905년 8월 8일,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죠. 법원 기록에 따르면 콥의 아버지는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의심했고, 그래서 아내에게 출장을 갈 것이라고 말한 후 그날 밤 침실 창문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그 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콥의 어머니는 남편을 총으로 쏴서 죽였습니다. 그는 남편을 강도로 오인했다고 주장했고 결국 이듬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굴욕을 딛고 최고의 선수로 우뚝서다
© 타이 콥(MLB.com)
1905년 8월 30일 콥은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습니다. 어린 시절 꿈을 이루는 순간이었지만,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콥에겐 감격에 겨워할 틈이 없었죠. 심지어 콥은 젊은 신인을 질투한 팀 동료들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했는데요. 선배들은 당시 18세로 리그에서 가장 어린 선수였던 콥의 배트를 부수고, 유니폼을 망가뜨리고, 언어적으로 학대했습니다. 훗날 콥은 "내가 겪어본 가장 비참하고 굴욕적인 경험"이라 회고합니다.
콥은 데뷔 첫해인 1905년 41경기에 출전해 타율 0.240에 그쳤습니다. 이듬해인 1906년에는 시즌 초반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주전 중견수 자리를 차지했지만 시즌 중반 스트레스로 인해 지쳐버린 그는 7월부터 8월까지 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고, 9월에 복귀해 98경기에서 타율 0.316으로 시즌을 마쳤는데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가뜩이나 투쟁심이 강했던 콥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야구로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1907년은 슈퍼스타로서 콥의 등장을 알린 순간이었습니다. 콥은 150경기 212안타 5홈런 119타점 53도루 타율 0.350 OPS 0.848로 타율·안타·타점·도루·OPS 부문 1위를 차지하면서 소속팀 디트로이트의 첫 리그 우승을 이끌었는데요. 콥은 1908, 1909년에도 타율·안타·타점·OPS 부문 1위에 올랐고 디트로이트는 3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1909년에는 그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홈런왕까지 차지하면서 타자 트리플크라운을 작성하기도 했죠.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3번의 월드시리즈에서 모두 준우승에 그쳤습니다(1907-08년엔 당대 최강팀 시카고 컵스에 패했고, 1909년엔 호너스 와그너가 이끄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습니다). 콥 역시 3번의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262 0홈런 9타점 4도루 OPS 0.668로 명성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남겼습니다. 이 3번의 월드시리즈 이후 콥은 1928년 은퇴할 때까지 19년간 한 번도 가을야구 무대를 밟지 못합니다.
데드볼 시대의 지배자

© 타이 콥(MLB.com)
팀 성적과는 별개로 콥은 이후에도 최고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콥은 1915년까지 9년 연속 타격왕에 올랐고, 1916년 타율 0.370(2위)를 기록한 후 1917년부터 1919년까지 다시 3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1911년 타율 0.419 8홈런 127타점 83도루 OPS 1.086으로 타율·안타·2루타·3루타·득점·타점·도루·장타율·OPS 1위를 차지하면서 MVP에 올랐습니다. 콥의 플레이 스타일은 순수한 신체 능력보단 전략과 대담함, 재치에 더 의존했는데요.
팀 후배 찰리 게링어는 "콥은 야구를 전쟁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그는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마치 십자군 원정에 나서는 것처럼 보였다"라고 말했습니다. 데드볼 시대에는 득점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콥은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고, 출루에 성공한 후에는 공격적인 주루로 빈틈을 만들었죠. 훗날 콥은 "상대를 다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주저할 때 실수가 발생하는 것을 노리고 거친 태클을 했다"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로 인해 콥은 선수들의 미움을 받았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1910년에 있었습니다. 1910년 타격왕 경쟁은 베테랑 냅 라조이(35세)와 신예 콥(23세)의 대결 구도로 흘러갔고, 마지막 더블헤더를 앞두고 콥은 타율 0.385로 라조이(0.376)에 앞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콥을 싫어했던 브라운스의 감독 잭 오코너는 라조이의 소속팀 클리블랜드와 경기에서 신인 3루수에게 경기 내내 3루 베이스 뒤에서 수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날 라조이는 7연속 번트 안타를 포함해 8타수 8안타로 타율을 0.383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이때 많은 선수들이 라조이에게 축하 전보를 보냈다고 전해지는데요. 조사 끝에 당시 커미셔너인 벤 존슨은 콥을 타격왕으로 발표했지만, 이 일화를 통해 우리는 당시 선수들에게 콥이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야구 통계사이트 <베이스볼 레퍼런스>는 냅 라조이(0.383)와 타이 콥(0.382)을 1910년 공동 타격왕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다
© 베이브 루스(왼쪽)와 타이 콥(오른쪽) (MLB.com)
베이브 루스의 등장 이후 1920년부터 본격적인 라이브볼 시대가 시작됐지만, 콥은 3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에도 여전히 정상급 기량을 과시했습니다. 콥은 1920년대에도 연평균 타율 0.357 6홈런 81타점 14도루 OPS 0.937을 기록했는데요. 비록 타격왕 타이틀을 따내진 못했지만 콥은 1921년부터 디트로이트의 선수 겸 감독으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1922년에는 타율 0.401으로 4할 타율을 돌파했고, 1925년에는 OPS 1.066으로 해당 부문 1위에 오릅니다.
콥은 1926년 승부조작 논란에 휘말리면서 디트로이트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애슬레틱스의 구단주 겸 감독인 코니 맥의 설득으로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로 이적해 두 시즌을 더 뛰었는데요. 현역 마지막 시즌이었던 1928년에도 콥은 41세의 나이로 타율 0.323을 기록하면서 23년 연속 3할 타율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우고 파란만장한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1936년 메이저리그에 명예의 전당이 만들어진 후 첫 투표에서 콥은 98.2%의 득표율로 호너스 와그너(95.1%), 베이브 루스(95.1%), 크리스티 매튜슨(90.7%), 월터 존슨(83.6%)과 함께 '최초의 5인' 중 한 명이 됐습니다. 한편, 현역 시절부터 투자에 관심이 많았던 콥은 은퇴 후 재정적으로 매우 부유했다고 알려졌는데요. 콥은 코카콜라의 주요 주주였고, 부동산 투자로도 떼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가정생활은 이상적이지 못했죠.
콥은 두 번의 결혼이 모두 이혼으로 끝났고, 다섯 자녀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콥의 건강은 1950년대 후반부터 악화됐는데요. 이때부터 콥은 병원을 짓고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재단을 설립하는 등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61년에 이르러 당뇨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진 콥은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그리고 첫 아내와 다섯 자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타이 콥의 명예의 전당 동판
1922년 Ty Cobb의 게임 착용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유니폼
1922년은 타이 콥이 커리어 마지막으로 4할 타율을 기록한 해입니다. 디트로이트의 선수 겸 감독이었던 그는 1922년 137경기 211안타 4홈런 99타점 9도루 타율 0.401 출루율 0.462 OPS 1.026을 기록합니다. 비록 조지 시슬러(타율 0.407)에게 밀려 타격왕을 차지하진 못했지만, 만 35세의 콥은 아메리칸리그 타율 2위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이 유니폼은 타이 콥이 1922시즌 동안 착용한 것으로 그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품 중 하나입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콥의 실착 유니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유니폼이기 때문이죠. 유니폼은 원래 상태로 복원되었으며 하의에는 콥의 이름이 자수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상/하의 뿐만 아니라 벨트와 스타킹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유니폼은 미국 MEARS(Memorabilia Evaluation and Research Services, 기념품 평가 및 연구 서비스)에서 A7* 등급으로 최고에 가까운 등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