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① 야구를 바꾼 남자, 베이브 루스
연재

© 베이브 루스(MLB.com)
* 안녕하세요. SPOTV 메이저리그 해설위원이자, 네이버스포츠에서 [오늘의 MLB]를 연재하고 있는 이현우입니다. 이번주부터 매주 월요일 한 편씩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라는 기명칼럼을 통해 이랜드뮤지엄의 컬렉션과 그것에 얽힌 스토리에 대해서 연재합니다. 기존 유저 분들이 쓰신 수준 높은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누가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서양의 역사는 기원전(BC)과 기원후(AD)로 나뉩니다. BC(Before Christ)는 '그리스도 이전'이란 의미입니다. 한편, AD(Anno Domini)는 '주님의 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햇수를 나눈 것이죠. 마찬가지로 메이저리그의 역사도 1920년을 기준으로 데드볼 시대(Dead-ball era, ~1919년)와 라이브볼 시대(Live-ball era, 1920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데드볼 시대는 야구 초창기부터 1919년까지를 가리키는데, 이 시기 메이저리그는 극심한 투고타저를 겪고 있었고 거의 홈런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단타와 도루 위주로 공격이 이루어졌습니다. 반면 라이브볼 시대는 1920년 이후를 가리키는데, 이 시기부터 메이저리그에 장타력이 뛰어난 타자들이 대거 출현해 지금처럼 홈런(장타) 위주의 야구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메이저리그의 라이브볼 시대를 연 장본인입니다. 그리고 1920년은 그가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첫 해이기도 하죠. 직전해인 1919년 29홈런으로 MLB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을 경신한 루스는 1920년 54홈런으로 30홈런, 40홈런, 50홈런 고지를 최초로 밟았는데요. 이 해 아메리칸리그 홈런 2위는 19홈런을 기록한 조지 시슬러였습니다. 2위보다 거의 3배 가까이 많은 홈런을 때려낸 겁니다.
이는 팀 홈런 2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50홈런)의 모든 타자를 합친 것보다 많은 홈런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루스의 활약 덕분에 직전해인 1919년에 일어난 최악의 승부조작 사건 <블랙삭스 스캔들>로 흥행 위기에 빠져 있었던 메이저리그는 기사회생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루스를 영입한 후 뉴욕의 3팀 중 가장 후발주자였던 뉴욕 양키스는 최고의 인기 팀이자, 명문 구단으로 발돋움하게 되죠.
메이저리그라는 거대한 강이 흐르는 동안 무수한 레전드들이 큰 획을 그리고 사라졌지만, 베이브 루스의 위치에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습니다(오타니가 은퇴하고 난 후에 평가가 궁금해지네요). 루스는 최고의 선수이기 이전에 야구라는 스포츠를 재탄생시킨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베이브 루스, 위대한 여정의 시작
© 볼티모어에 위치한 베이브 루스의 생가
베이브 루스의 본명은 조지 허먼 루스(George Herman Ruth)로 1895년 2월 6일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조지 루스 시니어와 캐서린 루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술집에서 긴 시간을 일했고,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 루스는 부모의 방임 속에서 문제아가 됐습니다. 아버지의 술집에서 돈을 훔치거나 손님이 남기고 간 맥주를 마시고, 씹는 담배까지 접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6살에 불과했죠.
결국 루스의 아버지는 7살이 된 루스를 일종의 소년원인 세인트메리 공업학교에 보냈습니다. 루스는 그곳에서 인생의 은인이 될 마티아스 신부를 만나게 되는데요. 세인트메리 공업학교는 엄격한 규율로 악명 높은 곳이었지만, 마티아스 신부는 어린 루스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오후마다 야구를 가르쳐줬죠. 훗날 루스는 "그가 야구공을 치는 것을 처음 본 순간, 나는 타자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라고 회고했습니다.
1913년 세인트메리 공업학교에서 열린 한 경기에서 당시 18세였던 루스는 투수로서 삼진 6개를 잡았고, 타자로서 홈런, 3루타, 2루타를 기록하며 팀 승리를 이끌었는데요. 해당 경기에서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은 마이너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현 볼티모어 오리올스와는 별개의 팀)의 구단주 잭 던이 이듬해 2월 그를 영입하면서 루스는 12년 만에 소년원을 떠나 프로야구 선수로서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1914년 19세의 루스는 사회적인 경험은 부족했지만 경기장에선 빠르게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그 해 스프링캠프에서 볼티모어는 여러 메이저리그 팀들과 경기를 했는데요. 루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2경기에서 29명의 타자를 상대로 6안타 무자책점을 기록했고, 애슬레틱스와 경기에선 완투승을 거뒀습니다. 대부분이 20대 중반이었던 팀 동료들은 그런 그를 '베이브(Babe)'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루스의 별명으로 굳어집니다.
투수로 시작한 커리어

© 베이브 루스의 투수 시절
루스는 투수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볼티모어는 1914년 여름 이적료 2만 5000달러를 받고 루스를 보스턴 레드삭스에 트레이드했는데요. 그러면서 루스는 세인트메리를 떠난 지 5개월도 지나지 않은 7월 11일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르게 됩니다. 루스는 데뷔전에서 7이닝 2자책으로 첫 승을 따냈지만, 다음 경기에서 부진하자 마이너리그로 강등됐고, 마지막 주에 복귀해 두 경기에 더 등판한 후 시즌을 마쳤습니다.
루스가 본격적인 활약을 펼친 것은 이듬해부터 였습니다. 루스는 풀타임 첫해였던 1915년 18승 8패 217.2이닝 112탈삼진 ERA 2.44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916년 정규 시즌 23승 12패 323.2이닝 170탈삼진 ERA 1.75로 평균자책점·선발(40)·완봉(9)·피안타율(0.201)에서 리그 1위, 다승과 탈삼진에서 리그 3위를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킵니다. 특히 루스는 전설적인 투수 월터 존슨과 5차례 맞대결에서 4승을 거두는데요.
그중 한 경기는 무려 13이닝 완봉승이었죠. 이 해 아메리칸리그 1위를 차지한 보스턴은 1916년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습니다. 월드시리즈 2차전에 등판한 루스는 브루클린 로빈스(현 다저스)를 상대로 14이닝 1실점을 기록하며 완투승을 거뒀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포스트시즌 역사상 최장 이닝 완투승 기록입니다. 루스의 활약에 힘입어 보스턴은 4승 1패로 브루클린 로빈스를 꺾고 통산 4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타자로서 활약에 가려졌지만 루스는 투수로서 통산 163경기에 등판해 94승 46패 1221.1이닝 488탈삼진 평균자책점 2.28을 기록했습니다. 풀타임 투수로 활약한 시즌이 네 시즌 남짓인 것을 고려한다면 놀라운 성적입니다. 한편, 루스는 월드시리즈에서도 3승 무패 평균자책점 0.87을 기록한 '빅게임 피처'이기도 했습니다. '세이버메트릭스의 대부' 빌 제임스가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 받는 좌완 투수로 루스를 선정한 이유입니다.
'투타겸업'의 원조
©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베이브 루스
루스는 1917년에도 24승 13패 326.1이닝 128탈삼진 ERA 2.01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다승·이닝에서 2위, 탈삼진에서 5위에 해당하는 성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속팀 보스턴은 90승 62패(.592)로 리그 2위에 그칩니다. 그러자 보스턴의 감독이었던 애드 배로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외야수 해리 후퍼에게 조언을 구했는데요. 후퍼는 배로에게 루스가 투수로 등판하지 않을 때 타자로 출전시킬 것을 권유했습니다.
사실 루스에게 투타 겸업을 시키는 것은 그의 신인 시절부터 나왔던 아이디어였는데요. 1915년 <워싱턴 스포츠>의 폴 이튼은 "루스는 역사상 최고의 타자 유망주"라며 "투수보다 타자로서 더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고, <보스턴 포스트>도 "루스는 언젠가 미국 최고의 거포가 될 수도 있다"라고 보도한 바 있었습니다. 실제로 루스는 1915-17년 투수로만 뛰면서도 3년간 타율 0.302 9홈런 50타점 OPS 0.837을 기록했죠.
또한, 투타 겸업은 루스 본인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는데요. 결국 배로 감독은 1918시즌 개막 후 약 2주가 지난 1918년 5월 6일 양키스와 경기에서 루스를 1루수 겸 6번 타자로 출전시킵니다. 루스는 이날 경기에서 홈런과 2루타 포함 3타점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3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립니다. 이 해 루스는 투수로서 13승 7패 166.1이닝 ERA 2.22, 타자로서 타율 0.300 11홈런 61타점 OPS 0.966을 기록하는 진기록을 세웁니다.
홈런 11개는 틸리 워커와 함께 공동 1위였지만 워커가 466타석에 들어선 반면, 루스는 382타석에서 11홈런을 때려냈고 장타율(.555)과 OPS(.966)에서는 단독 1위에 올랐는데요. 이러한 루스의 활약에 힘입어 보스턴은 1918년 정규 시즌 리그 1위에 올랐고, 시카고 컵스를 4승 2패로 꺾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해 루스는 월드시리즈에서 투수로 2경기에 나서 2승 무패 ERA 1.06을 기록했습니다.
밤비노의 저주

© 밤비노의 저주
루스는 1919년 투수(17경기)로서 비중을 줄이고 타자(117경기)로서 비중을 높였는데요. 그 결과 타율 0.322 29홈런 113타점 OPS 1.114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홈런 29개는 1884년 네드 윌리엄슨(27개)를 넘어 MLB 역대 홈런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고, 득점(103)·타점(113)·출루율(.456)·장타율(.657)에서도 리그 1위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보스턴은 66승 71패(.482)로 리그 6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던 1920년 1월 4일, 보스턴 팬들을 경악에 빠뜨리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루스를 10만 달러에 양키스로 현금 트레이드했다는 소식이었죠. 비난이 거세지자 보스턴의 구단주 해리 프레지는 "루스가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동시에 그는 야구 유니폼을 입은 사람 중에서 가장 이기적이고 분별력 없는 사람이다. 양키스가 그를 데려가는 것은 도박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사실 프레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는데요. 경기장 밖에서 루스는 폭식과 폭음을 즐기며 매춘굴을 드나들었고 여러 차례 교통사고를 내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끊임없이 연봉 인상을 요구하는 등 구단과 마찰을 빚어왔었죠. 실제로 1919년을 앞두고 루스는 연봉을 2배 인상하지 않으면 은퇴 후 권투 선수가 되겠다고 구단 측에 으름장을 놓기도 했구요. 무엇보다도 10만 달러는 야구 역사상 가장 큰 이적료였습니다.
따라서 루스의 영입은 당시로서는 큰 도박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양키스의 도박이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 드러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는데요. 한 번도 리그 1위를 차지한 적이 없었던 양키스는 루스의 영입 후 최고의 명문 구단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반면, 보스턴은 1918년 이후 86년 동안 월드시리즈에서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한다. 이를 가리켜 '밤비노의 저주(Curse of the Bambino)'라고 하죠.
양키스 이적 후 전설이 되다
© 양키스 시절 베이브 루스
양키스로 이적한 첫해인 1920년 루스는 외야수로 포지션을 옮기며 타격에만 전념했고, 타율 0.376 54홈런 135타점 OPS 1.379을 기록합니다. 이는 직전 해 자신이 세운 홈런 신기록(29)보다 2배 가까이 많은 수치이자, 팀 홈런 2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50홈런)의 모든 타자를 합친 것보다 많는데요. 이러한 루스의 활약으로 양키스는 120만 명의 관중을 동원하며 MLB 역사상 첫 100만 관중을 돌파하게 됩니다.
루스는 1921년 타율 0.378 59홈런 168타점 OPS 1.359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홈런 기록을 갈아치웠고, 만 26세의 나이로 로저 코너스의 137홈런을 넘어 통산 홈런 1위에 올랐습니다. 이후 은퇴할 때까지 루스가 치는 모든 홈런은 신기록이었죠. 이해 양키스는 창단 후 첫 정규 시즌 리그 1위를 차지하는데요. 하지만 처음으로 진출한 월드시리즈에선 뉴욕 자이언츠에 3승 5패로 패하면서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루스는 1922년 직전 해 월드시리즈 이후 친선경기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5월 20일까지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고, 복귀 후에도 심판 얼굴에 먼지를 뿌리고 관중석에 난입하면서 한 번 더 출전 정지 징계를 받습니다. 이해 루스는 타율 0.315 35홈런 96타점 OPS 1.106으로 직전 2년에 비해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뒀고, 월드시리즈에서도 17타수 2안타(타율 0.118)에 그치며 2년 연속 자이언츠에 무릎을 꿇었죠.
하지만 절치부심한 루스는 1923년 타율 0.393 41홈런 130타점 OPS 1.309으로 홈런왕을 탈환했고, 월드시리즈에서도 자이언츠를 상대로 타율 0.368 3홈런 3타점 OPS 1.556을 기록하며 소속팀 양키스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고 설욕에 성공했습니다. 이후에는 잘 알려진 대로인데요. 루스는 1918년부터 1931년까지 14년 동안 12번의 홈런왕과 5번의 타점왕, 11번의 장타율+OPS 1위를 차지하며 리그를 지배합니다.

특히 1924년 타율 0.378로 개인 통산 처음이자 마지막 타격왕에 올랐고, 1927년 타율 0.356 60홈런 165타점 OPS 1.258을 기록하며 MLB 역사상 최초로 60홈런 고지를 밟았습니다. 루스는 1935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2503경기 2873안타 714홈런 2214타점 타율 0.342 OPS 1.164를 기록했는데요. 같은 기간 양키스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4차례(1923, 1927-28, 1932년) 차지하며 명문팀으로서 초석을 다졌습니다.
미워할 수 없는 의외의 면모

© 1935년 어린이들과 함께 한 베이브 루스
루스는 분명히 어린이들을 위한 위인전에 실릴만한 뛰어난 인품을 지닌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경기장 밖에서 방탕한 사생활로 악명이 높았고, 관중석에 난입하고 기자를 폭행하는 등 여러 차례 물의를 일으켰죠. 한편 더그아웃에서도 감독과 파워 게임을 벌이고, 뛰어난 실력을 지닌 후배(루 게릭)를 견제하는 등 팀 동료로서도 좋은 평가를 내리긴 힘듭니다. 하지만 루스에겐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의외의 면모도 많았는데요.
게으른 천재로 알려졌지만 루스가 오랫동안 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30세 이후 철저한 자기 관리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25년 만 30세였던 루스는 몸무게가 120kg까지 늘었고 잦은 배탈에 시달리면서 26홈런에 그쳤는데요. 하지만 절치부심한 루스는 그 해 겨울 트레이너의 지도하에 엄격한 식단과 운동으로 몸무게 감량에 성공한 후 반등에 성공했고 그때부터 자기 관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습니다.
또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루스는 아이들 만큼은 진심으로 사랑했는데요. 그는 현역 시절에도 은퇴한 후에도 수많은 병원과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려고 애썼고 금전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루스의 아이들 사랑은 전날 병원에 방문해 11세의 조니 실베스터에게 홈런을 치겠다고 약속한 후 1926년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홈런 3방을 때려낸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죠.
루스는 MLB 역사상 최고의 슈퍼스타였습니다. <블랙삭스 스캔들>로 흥행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호쾌한 스윙으로 홈런을 터뜨리는 루스의 등장은 야구를 미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MLB 선수들의 연봉 인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죠. 또한, 루스는 약팀이었던 양키스를 최고의 인기팀이 자 명문 구단으로 만들었는데요. 단적으로 양키스의 홈구장 양키스타디움의 별명은 <루스가 지은 집>입니다.
씁쓸했던 말년

© 보스턴 브레이브스와 계약한 이후 루 게릭(좌)과 사진을 촬영한 베이브 루스(우)
1934시즌을 마친 후 양키스의 구단주 제이콥 루퍼트는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구단주 에밀 훅스와 비밀리에 루스의 트레이드를 합의했습니다. 훅스는 루스에게 '부사장'과 '부감독'이라는 직함을 포함한 계약을 제시해 환심을 샀다고 전해지는데요. 그러나 언론의 주목 속에서 브레이브스로 이적한 루스는 1935년 28경기에서 타율 0.181 6홈런 12타점 OPS 0.789에 그친 후 은퇴를 선택합니다.
루스는 은퇴 후 감독이 되기를 원했지만 어떤 팀의 부름도 받지 못했는데요. 코칭스태프로선 1938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1루 코치를 잠시 맡은 것이 전부였죠. 1939년 7월 4일, 루스는 현역 시절 최고의 파트너였으나 사이가 좋지 못했던 루 게릭의 은퇴식에 참가해 연설을 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명예의 전당 개장식에 참가했는데, 루스는 3년 전 명예의 전당 첫 번째 투표에서 헌액된 '최초의 5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루스는 1948년 8월 16일 향년 5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은 후두암이었습니다.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무려 15만 명에 달하는 추모객이 몰려들었습니다. 1949년 양키스는 양키스타디움 가운데 담장 쪽에 루스를 기리는 화강암 기념비를 세웠는데요. 훗날 루 게릭, 미키 맨틀, 조 디마지오, 조지 스타인브레너, 밀러 허긴스의 기념비가 나란히 세워진 이곳에는 모뉴먼트 파크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 베이브 루스의 명예의 전당 동판
1922년, Babe Ruth의 뉴욕 양키스 팀 스웨터
베이브 루스에게 1922년은 아마도 그의 커리어에서 지우고 싶은 한 해였을 겁니다. 루스는 1918년부터 1931년까지 14년간 12번의 홈런왕을 차지했는데요. 그 가운데 홈런왕을 차지하지 못한 두 해가 1922년과 1925년이었습니다. 루스는 1922년 직전해 월드시리즈 이후 친선경기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5월 20일까지 출전정지 처분을 받았고, 복귀 후 심판 얼굴에 흙을 뿌리고 관중석에 난입하면서 한 번 더 출전정지 징계를 받습니다.
결국 루스는 1922년 타율 0.315 35홈런 96타점 OPS 1.106으로 직전해(59홈런) 대비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뒀고, 월드시리즈에서도 17타수 2안타(타율 0.118)에 그치며 2년 연속 준우승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절치부심한 루스는 이듬해인 1923년 타율 0.393 41홈런 130타점 OPS 1.309를 기록하며 타율(.393)·출루율(.545)·볼넷(170) 부문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게 되죠. 이 스웨터가 더 가치있는 소장품인 이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