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벽했던 포수', 자니 벤치 이야기

자니 벤치 / 출처 - MLB.com
자니 벤치(Johnny Bench)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이자, 신시내티 레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입니다. 벤치는 20세의 나이에 포수란 포지션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고, 22세에는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야구계 최고의 스타가 됐는데요. 누적된 부상으로 인해 30대 초반 내야수로 전향한 뒤 35세란 이른 나이에 은퇴했지만, 벤치가 포수로서 보낸 12년간 거둔 업적은 MLB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포수로 꼽히기에 충분했습니다.
포수는 수비 시 나머지 8명을 모두 바라볼 수 있기에 '그라운드의 야전 사령관'이라 불립니다. 야구의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체력적인 부담이 가장 큰 포지션이며, 이들의 수비력이 투수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인데요. 또한, 벤치에서 낸 사인도 거의 포수를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에 포수가 팀의 리더인 경우도 많죠. 그렇다고 방망이가 약해서도 안 됩니다. 자니는 포수로서 요구되는 이 모든 역량을 갖춘 '완전체' 였습니다.
자니는 1967년부터 1983년까지 17년간 신시내티에서만 뛰면서 통산 2158경기 2048안타 389홈런 1376타점 68도루 타율 0.267 출루율 0.342 OPS 0.817 WAR 75.1승을 기록했고 올스타 14회, 신인왕, MVP 2회, 골드글러브 10회, 홈런왕 2회, 타점왕 3회를 차지했습니다. 또한, 1970년대 MLB를 지배했던 '빅 레드 머신'의 리더로서 신시내티를 6번의 지구 우승과 4번의 내셔널리그 우승, 2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메이저리그 스타를 꿈꾸던 야구 소년

고교 시절 자니 벤치 / 출처 - MLB.com
자니 리 벤치(Johnny Lee Bench)는 1947년 12월 7일 미국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시티에서 트럭 운전사인 테드와 케이티 벤치 부부의 네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테드는 고등학교와 미군 시절 야구 선수로 활약하며 프로 진출을 꿈꿨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길어지면서 제대했을 때는 이미 26세였고 아이들이 태어난 후였죠. 그래서 테드는 자신의 꿈을 좇는 대신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트럭 운전사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테드가 세 아들에게 야구 선수에 대한 꿈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테드의 세 아들은 모두 오클라호마주 빙거에서 리틀 야구를 했는데요. 장남 테디는 야구보다는 음악 쪽에 더 관심이 많았고, 차남 윌리엄은 야구를 좋아했지만 프로에 진출할 정도는 아니었죠. 하지만 삼남인 자니 리는 달랐습니다. 자니는 누구보다 야구를 사랑했고, 탁월한 재능과 성공을 향한 야망을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6살 때 유소년 야구를 시작한 자니는 처음부터 포수를 맡았습니다. 훗날 자니는 "아버지는 포수가 메이저리그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들이 가장 원하는 포지션이니까요"라고 회상했습니다. 위대한 야구 선수들이 그렇듯이 자니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메이저리그 스타가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는데요. 자니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한 번도 빠짐없이 장래희망란에 "메이저리그 선수"라고 적었습니다.
이에 대해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12살 무렵, 자니는 필체에서 'C 학점'을 받았는데요.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첫째, 그는 이전까지 어떤 과목에서도 C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둘째, 훗날 메이저리거로서 수많은 사인을 해줘야 하는 그로서는 멋들어진 필체를 가질 필요성을 느꼈죠. 따라서 그는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마침내 자신만의 사인을 완성했고, 사람들에게 '난 유명해질 거야'라며 미리 사인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메이저리그 직행을 택하다

자니 벤치의 사인볼 / 출처 - MLB.com
동네 주유소 사장이었던 포드 맥키니도 그 무렵 자니에게 사인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요 . 훗날 그는 12살의 자니가 사인해 준 야구공을 명예의 전당에 기부했고, 우리는 위 사진을 통해 언젠가 세계 최고의 포수를 꿈꾸던 소년의 꿈이 담긴 사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니는 리틀 리그와 아메리칸 리전 베이스볼(미국과 캐나다의 50개 주에서 13~19세의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아마추어 야구리그)에서 포수와 투수로 활약했습니다.
빙거 고교 시절, 자니는 농구와 야구에서 모두 올-스테이트 팀에 선정됐고 졸업생 대표를 맡을 만큼 학업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뒀습니다. 원한다면 그는 유수의 명문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도 있었죠. 하지만 그는 하루라도 빨리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길 원했고, 1965년 메이저리그 최초의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36순위로 신시내티 레즈에 지명되자 고작 6,000달러라는 적은 금액에 계약을 맺습니다.
신시내티 스카우트 토니 로벨로는 "자니, 만약 네가 성공한다면 네가 원하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야"라고 설득했다고 하는데요. 영리했던 자니는 이 말이 계약금을 낮추기 위한 사탕발림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성공 가능성을 믿었습니다. 로벨로의 말대로 메이저리거로서 성공한다면 더 많은 돈을 벌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고작 몇천 달러를 더 받아내기 위해 구단과 실랑이 할 이유가 없었죠.
자니는 1965년 플로리다 리그(A)의 탬파에 배정되어 68경기에서 타율 0.248 2홈런 35타점 OPS 0.672로 타격 성적은 평범했지만, 뛰어난 수비력으로 주목받았습니다. 그리고 1966년에는 캐롤라이나 리그(A) 페닌슐라로 보내져 98경기에서 타율 0.294 22홈런 68타점 OPS 0.886을 기록하며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후 트리플 A 버펄로에 승격됐지만, 첫 이닝에서 파울팁을 맞아 오른손 엄지가 부러지면서 시즌 아웃됐습니다.
감춰지지 않는 재능

자니 벤치와 테드 윌리엄스 / 출처 - MLB.com
이듬해인 1967년 자니는 만 19세의 나이로 30대의 메이저리거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버펄로에서 98경기 타율 0.258 23홈런 68타점 OPS 0.818을 기록하며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올해의 마이너리그 선수에 올랐고, 1967년 8월 메이저리그에 승격됐습니다. 자니는 빅리그 데뷔 첫해인 1967년 26경기에서 타율 0.163 1홈런 6타점 OPS .462에 그쳤지만, 견고한 수비와 강력한 어깨로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중 한 명은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였는데요. 윌리엄스는 1968년 스프링캠프에서 만난 자니에게 "명예의 전당 입성이 확실한 자니 벤치에게(Hall of Famer for sure!)"라고 적힌 사인볼을 건넸다. 윌리엄스의 예언은 22년 후인 1989년 자니가 쿠퍼스타운에 입성하면서 사실로 드러납니다. 신시내티도 주전 포수였던 조니 에드워즈(올스타 3회)를 세인트루이스로 트레이드하며 자니의 재능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자니는 빠르게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그는 신인 포수 신기록인 154경기에 출전해 타율 0.272 15홈런 82타점 OPS 0.743를 기록하며 올스타에 선정됐고, 포수 최초로 NL 신인왕을 수상했습니다. 무엇보다 대단한 점은 그의 수비력이었습니다. 자니는 어시스트(보살) 102개로 23년 만에 포수로서 100개 이상의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상대의 도루 시도 93번 중 44번의 도루를 저지하며 도루 저지율 47.3%라는 엄청난 수치를 남겼죠.
자니의 팔에 대해 로이 블런트 주니어는 "건강한 성인 남성의 다리 정도 크기이고, 마치 무반동총처럼 작동한다"라고 묘사했는데요. 실제로 자니는 커다란 체격(193cm 90kg)에 비해 놀라울 정도의 민첩성을 지니고 있었고, 공을 7개나 쥘 수 있을 정도로 손이 컸습니다. 그 덕분에 그는 한 손으로 공을 잡고 다른 손은 파울팁으로 보호하기 위해 등 뒤로 숨기는 '한 손 포구'를 최초로 시도하고 완성시킨 포수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습니다.
뛰어난 수비력과 리더십

자니 벤치 / 출처 - MLB.com
자니의 등장 이전까지 포수들은 베개 형태의 커다란 미트를 사용해 양손으로 포구하는 것을 정석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자니는 현재와 같은 형태의 '힌지가 달린 포수 미트'를 사용했는데, 이는 도루 저지나 번트 수비를 더 용이하게 만들어줬죠. 자니에 따르면 '한 손 포구'를 최초로 시도한 포수는 동시대에 활약한 랜디 헌들리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완성해 현대 야구 포수 수비의 정석으로 만든 자니의 업적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자니는 뛰어난 리더십으로도 두각을 드러냈는데요. 특히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1968년 스프링캠프에서 자니는 한때 강속구 투수였던 짐 말로니의 공을 잡고 있었는데, 당시 말로니는 부상으로 구속이 크게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말로니는 자니가 요구한 변화구 대신 패스트볼을 던지기를 고집했습니다. 그러자 자니는 말로니가 던진 공을 미트가 아닌 맨손으로 잡은 후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공을 돌려줬죠.
그제야 자신의 패스트볼이 과거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말로니는 이후 철저히 벤치의 사인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4월 30일 휴스턴전에서 벤치와 함께 노히터를 합작합니다. 이런 자니가 신인 포수로서는 최초로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죠. 이후 자니는 1968년부터 1977년까지 10년 연속 NL 포수 부문 골드글러브를 석권하며 역대 최고의 수비력을 지닌 포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한편, 풀타임 2년 차인 1969년 타율 0.293 26홈런 90타점 OPS 0.840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자니는 당대 최고의 공격력을 지닌 포수로 거듭났는데요. 1970년 만 22세가 된 그는 타율 0.293 45홈런 148타점 OPS 0.932로 홈런, 타점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하며 최연소 MVP에 선정됐죠. 45홈런은 당시 포수 홈런 신기록이었습니다. 자니의 활약에 힘입어 신시내티도 102승(NL 서부 지구 1위)을 올리는 등 가을야구 무대를 밟습니다.
야구계 최고의 스타로 올라서다
자니 벤치 / 출처 - MLB.com
비록 월드시리즈에서 볼티모어를 상대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자니는 이 해를 기점으로 야구계 최고의 스타로 올라섰습니다. 그는 그라운드에서는 최고의 활약을 펼치는 완성형 포수였고, 경기장 밖에서는 잘생기고 언변이 뛰어난 22세의 젊은 스타였죠. 오프시즌 자니는 아놀드 파머와 골프를 치고, 수많은 토크쇼에서 강연했으며, 드라마 '미션 임파서블'에 출연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TV 쇼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듬해인 1971년 자니는 타율 0.238 27홈런 61타점 OPS 0.722에 그치는 부진을 겪습니다. 하지만 절치부심한 자니는 1972년 타율 0.270 40홈런 125타점 OPS 0.920으로 다시 한번 홈런, 타점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하며 커리어 두 번째 MVP를 수상했습니다. 신시내티도 95승으로 NL 서부지구 1위를 차지한 후 NLCS에서 피츠버그를 꺾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애슬레틱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1972시즌 종료 후 자니는 폐에서 발견된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습니다. 다행히도 종양은 암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으나, 이를 제거하기 위해 오른팔 아래 30cm를 절개하고 갈비뼈를 자르는 수술을 받은 여파가 없을 순 없었죠. 훗날 자니는 "갈비뼈를 부수고, 신경을 잘랐기 때문에 그 후로 저는 더 이상 같은 선수가 아니었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전히 생산적이었지만, 더는 40홈런을 치진 못했습니다.
이후에도 자니와 신시내티는 훌륭한 시즌을 보냈지만, 가을야구에 약하다는 인식이 박히기 시작했는데요. 자니는 1973년 타율 0.253 25홈런 104타점 OPS 0.774를 기록했고, 1974년 타율 0.280 33홈런 129타점 OPS 0.870을 기록하며 통산 세 번째 타점왕을 차지했습니다. 신시내티는 1973년 99승으로 지구 1위를 차지했으나 NLCS에서 뉴욕 메츠에게 패했고, 1974년 98승을 거뒀으나 다저스에게 밀려 지구 2위에 머물렀습니다.
빅 레드 머신의 WS 2연패를 이끌다
자니 벤치 / 출처 - MLB.com
하지만 마침내 포스트시즌에서 돌파구를 찾는데요. 자니는 1975년 타율 0.283 28홈런 110타점 OPS 0.878을 기록했고, 신시내티도 108승을 거두며 월드시리즈에서 7차전 접전 끝에 보스턴을 꺾고 35년 만에 WS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자니는 1976년 어깨 통증으로 타율 0.234 16홈런 74타점 OPS 0.741에 그쳤지만, 포스트시즌 7경기에서 타율 0.444 3홈런 7타점 OPS 1.390을 기록하며 신시내티의 월드시리즈 2연패를 이끌었죠.
자니는 1977년 타율 0.275 31홈런 109타점 OPS 0.889으로 10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수상했고 이후에도 1978년 타율 0.260 23홈런 73타점 OPS 0.823, 1979년 타율 0.276 22홈런 80타점 OPS 0.824, 1980년 타율 0.250 24홈런 68타점 OPS 0.810으로 여전히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13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됐습니다. 그러나 '빅 레드 머신'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고, 자니도 부상으로 라인업에서 빠지는 빈도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1980시즌이 끝날 무렵, 많은 전문가는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그를 꼽았습니다. 32세의 벤치는 13년의 선수 생활 동안 파울팁에 맞아서 양발이 여섯 번 골절됐고, 엄지가 두 번 부러졌으며, 홈 플레이트에서 충돌로 인해 허리와 어깨에도 문제가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수를 하지 않았으면 더 오래 뛰었을까요? 물론이죠. 하지만 그랬더라면 저는 '자니 벤치'가 아니었을 겁니다"라며 자신의 포지션에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자니는 커리어 마지막 3시즌 동안 포수에서 벗어나 주로 코너 내야수(1루 또는 3루)로 뛰었습니다. 파업으로 단축된 1981시즌에는 1루수로 뛰며 타율 0.309 8홈런 25타점 OPS 0.858을 기록했고, 이후 3루수로 변신해 1982년 타율 0.258 13홈런 38타점 OPS 0.716을, 1983년 타율 0.255 12홈런 54타점 OPS 0.741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983시즌 종료 후 35세의 나이로 은퇴하면서 그의 화려한 선수 생활은 막을 내렸습니다.
은퇴 후의 삶

자니 벤치 / 출처 - MLB.com
은퇴 후 자니는 신시내티의 라디오와 TV 해설 위원으로 활동했고, 1980년대에는 청소년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인 <베이스볼 번치>를 진행하기도 했는데요. 또한, 열정적이고 뛰어난 골퍼였던 그는 수많은 골프 행사에 참여했고 50대부터는 시니어 투어에도 참가했습니다. 신시내티는 1986년 자니의 등번호 5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고, 3년 후인 1989년 자니는 첫해에 96.4%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자니는 1999년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메이저리그 레전드 랭킹에서 16위로 포수 중 가장 높은 순위에 올랐습니다. 또한, 메이저리그 올-센추리 팀에 포수 부문 1위로 선정되는 등 대부분의 매체로부터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혔죠. 신시내티는 2011년 홈구장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 앞에 그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지금도 신시내티의 홈구장에 가면 강력한 어깨로 주자를 아웃시키는 자니의 완벽한 자세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