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마무리 투수, 롤리 핑거스 이야기

롤리 핑거스 / 출처 - MLB.com
ㅡ살 반도(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선수)
롤리 핑거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마무리 투수입니다. 그의 등장은 구원 투수의 가치를 재정의하고 '마무리 투수'라는 보직이 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핑거스는 1968년부터 1985년까지 통산 17시즌 동안 944경기 114승 118패 341세이브 1,701.1이닝 1,299탈삼진 ERA 2.90으로 올스타 7회, 사이영상 1회, MVP 1회, 월드시리즈 우승 3회를 차지했고, 1992년 81.2%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는데요.
이는 호이트 윌헬름에 이어 구원 투수로선 역대 두 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기록입니다. 윌헬름은 너클볼 투수란 특성상 마무리 투수보단 '불펜 에이스'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핑거스가 마운드에 올랐다는 것은 팀의 승리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뜻했고, 팬들은 매일 밤 그가 경기를 마무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야구장을 찾았습니다. 물론 핑거스의 활용법은 오늘날의 전문 마무리 투수와는 조금 달랐는데요.
핑거스는 구원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전성기였던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연평균 66경기에 등판해 113이닝(경기당 약 2이닝)을 소화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통산 341세이브 중 2이닝 이상을 소화한 경기는 무려 135번으로, 이 부문에서 여전히 역대 1위에 올라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활약을 지켜본 구단들은 구원 투수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는 브루스 수터와 리치 고시지를 거쳐 데니스 에커슬리의 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야구 재능

롤리 핑거스 / 출처 - MLB.com
롤랜드 글렌 핑거스(Roland Glen Fingers)는 1946년 8월 25일 미국 오하이오주 스튜번빌에서 조지 핑거스와 펄 핑거스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철강 노동자였던 핑거스의 아버지 조지는 젊은 시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산하 마이너리그 구단에서 4년간 투수로 활약하며 한때 스탠 뮤지얼(명예의 전당 헌액자)과 같은 방을 썼던 야구선수였고, 자연스럽게 핑거스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공을 던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핑거스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이제 됐어. 캘리포니아로 이사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곤 서둘러 집을 팔고 차를 사서 가족들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랜초쿠카몽가로 떠났습니다. 서쪽으로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가족들은 호텔에 묵을 여유가 없어 고속도로 옆 침낭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그렇게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지만, 결국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시 근처 철공소에 취직해야 했습니다.
핑거스는 업랜드 고등학교 재학 시절 야구부에서 투수 겸 좌익수로 활약했습니다. 또한, 아메리칸리전 베이스볼(American Legion Baseball, 미국과 캐나다의 50개 주에서 13~19세의 선수들이 참여하는 아마추어 리그)에서도 활약하며 1964년 8월, 소속팀인 업랜드 포스트의 전국 대회 우승을 이끌고 올해의 선수로 선정됐습니다. 그해 핑거스는 투수로 11승 2패 ERA 0.67, 타자로 타율 0.450(40타수 18안타)를 기록했습니다.
전국 대회 우승 후 일약 스타덤에 오른 핑거스는 무려 12개의 메이저리그 팀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는데요. 그중 가장 많은 계약금을 제시한 팀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였습니다. 다저스는 그에게 2만 달러를 제안했지만, 핑거스는 최강의 원투펀치인 샌디 코팩스와 돈 드라이스데일을 포함해 이미 탄탄한 투수진을 갖춘 다저스와 계약을 맺을 경우 자신이 메이저리그에 오르려면 적잖은 시간이 걸릴 거로 판단했습니다.
애슬레틱스와 계약을 맺다

롤리 핑거스 / 출처 - MLB.com
이에 핑거스는 다저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1964년 12월 24일에 다저스보다 훨씬 적은 금액(13,000달러)을 제시한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애슬레틱스는 투·타에서 모두 재능을 드러난 핑거스를 처음에는 외야수로 뛰게 할 생각이었는데요. 하지만 1965년 스프링캠프에서 투수로 기용하기로 방침을 바꿨고, 플로리다 주립 리그(클래스A)에 배정된 핑거스는 프로 첫해 8승 15패 ERA 2.98을 기록했습니다.
핑거스는 프로 2년 차인 1966년 캘리포니아 리그(클래스A)에서 11승 6패 ERA 2.77을 기록했는데요. 해당 시즌 그의 팀 동료 중에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레지 잭슨과 토니 라 루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7년 봄, 핑거스는 업랜드 고교의 야구부 매니저이자 고교 시절부터 연인이었던 질 커틀러와 결혼했고, 서던 리그(AA)의 버밍엄 애슬레틱스로 승격됐습니다. 하지만 결혼한 지 9일 만에 사고가 터졌습니다.
개막전에서 프레드 코브너가 친 타구에 얼굴을 맞아, 광대뼈와 턱뼈가 부러지고 이가 몇 개나 빠지는 큰 부상을 당한 것이죠. 핑거스의 턱은 5주 동안 와이어로 고정되었고, 두 달 후 다시 경기에 복귀하고 나서도 타구를 허용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는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결국 트라우마를 극복한 그는 6승 5패 ERA 2.21으로 시즌을 마감했고, 시즌 종료 후엔 애리조나 가을리그(AFL)에 참가했습니다.
애슬레틱스는 1967시즌 종료 후 캔자스시티에서 오클랜드로 연고지를 옮겼습니다. 핑거스도 1968년 버밍엄에서 10승 4패 ERA 3.00을 기록하며 그해 9월 오클랜드로 승격했고, 9월 15일 디트로이트전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습니다. 핑거스는 데뷔전에서 1.1이닝 동안 홈런 포함 4안타 4실점으로 무너졌고, 시즌 종료 후에는 베네수엘라 윈터리그로 보내져 패스트볼을 보완할 구종(슬라이더)을 익히는 데 주력했습니다.
성공적이지 못했던 선발 투수

롤리 핑거스 / 출처 - MLB.com
핑거스는 마이너리그 시절 대부분의 경기(83경기 중 76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나섰는데요. 풀타임 첫해인 1969년 그가 맡은 첫 번째 보직 역시 스팟 스타터(Spot starter, 주전 선발 투수들의 휴식을 위해 이따금씩 선발로 등판하는 투수)였습니다. 실제로 1969년 애슬레틱스의 신임 감독 행크 바우어는 "주축 선발 투수 4명에게 4일 휴식을 보장해 주기 위해 핑거스가 틈틈이 선발로 등판할 것"이란 기용 방침을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1969년 4월 22일, 첫 선발 등판에 나선 핑거스는 미네소타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둡니다. 하지만 두 번째 선발 등판에서 8.1이닝 5실점, 세 번째 선발 등판에서 6이닝 6실점, 네 번째 선발 등판에선 0.1이닝 6실점에 그쳤죠. 3경기 연속 선발 등판에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자 애슬레틱스는 9월 중순까지 그를 구원 투수로만 기용했고, 핑거스는 60경기(8선발) 6승 7패 ERA 3.71으로 풀타임 첫해를 마쳤습니다.
1970년 행크 바우어 감독이 해고되고 버밍엄 시절 그의 감독이었던 존 맥나마라가 부임하면서 핑거스는 다시 선발 투수로 기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핑거스는 이 해 45경기 중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19경기에 선발 등판했으나 7승 9패 148이닝 79탈삼진 ERA 3.65이란 평범한 성적을 거두는데 그쳤죠. 그리고 1971년 맥나마라마저 경질되고 딕 윌리엄스가 감독을 맡으면서, 핑거스의 커리어에도 변곡점이 찾아왔습니다.
핑거스는 1971시즌을 선발 투수로 시작해 첫 9경기에서 1승 4패 ERA 3.76을 기록했습니다. 그러자 윌리엄스 감독은 핑거스에게 '경기 후반 등판해 나머지 이닝을 책임지는 보직'을 맡겼는데요. 이 보직은 훗날 마무리 투수(Closer)라 불리게 됩니다. 실제로 1971년 5월 15일 이후 핑거스는 가끔씩은 6회 이전에도 마운드에 올랐지만, 대부분은 팀이 이기는 경기에서 6회 이후 등판해 경기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성공적이었던 불펜 전향
롤리 핑거스 / 출처 - MLB.com
핑거스는 불펜으로 보직을 옮긴 후 1971년을 48경기 4승 6패 17세이브 129.1이닝 98탈삼진 ERA 2.99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마쳤습니다. 이어 1972년에는 불펜으로만 65경기에 등판해 11승 9패 21세이브 111.1이닝 113탈삼진 ERA 2.51을 기록했고, 소속팀 애슬레틱스도 지구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해 핑거스는 포스트시즌에서도 2승 1패 2세이브 ERA 1.72를 기록하며 애슬레틱스를 42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끕니다.
애슬레틱스는 1972년을 시작으로 1973년과 1974년에도 월드시리즈를 제패하며 양키스(1949-1953년)에 이어 MLB 역사상 두 번째로 '3연패'를 달성한 구단이 됐습니다. 그 중심에는 레지 잭슨, 조 루디, 살 반도, 캣피시 헌터, 비다 블루, 핑거스를 비롯해 팜 시스템에서 직접 길러낸 선수들이 있었는데요. 같은 기간, 핑거스는 평균 9승 7패 20세이브 119이닝 106탈삼진 ERA 2.34로 애슬레틱스의 뒷문을 든든히 지켰습니다.
특히 1974년 월드시리즈에선 4경기에 등판해 1승 2세이브 ERA 1.93을 기록하며 구원 투수로선 이례적으로 월드시리즈 MVP에 선정됐죠. 한편, 이 시기부터 핑거스는 훗날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핑거스는 원래 수염을 기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레지 잭슨이 1972년 스프링캠프에 콧수염을 기르고 나타나자, 잭슨이 수염을 밀도록 만들기 위해 팀 동료들과 함께 고의로 수염을 길렀는데요.
그렇게 하면 구단주 찰스 핀리가 모든 선수에게 면도를 하라고 지시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괴짜 구단주였던 찰스 핀리는 개막전까지 가장 멋진 수염을 기르는 선수에게 300달러의 상금을 걸었는데요. 핑거스는 300달러를 받기 위해 19세기 후반 야구 선수들의 사진에서 모티브를 얻어 콧수염을 열심히 가꿔 우승을 차지했고, 이때부터 특유의 '프링글스 콧수염'은 그의 상징이 됐습니다.
애슬레틱스를 떠나 샌디에이고로

롤리 핑거스 / 출처 - MLB.com
월드시리즈 3연패 달성 후에도 핑거스는 1975년 10승 6패 24세이브 126.2이닝 115탈삼진 ERA 2.98, 1976년 13승 11패 20세이브 134.2이닝 113탈삼진 ERA 2.47을 기록하는 꾸준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찰스 핀리 구단주가 세운 '애슬레틱스 왕조'는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죠. 찰스 핀리는 단장 업무까지 도맡아 하며 스몰 마켓이자, 40년 넘게 우승을 하지 못한 애슬레틱스를 강팀으로 만든 명석한 사업가였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인색했는데요. 일례로 그는 시즌 시작 전, 선수 1명당 모자 2개와 배트 4개를 지급하고 시즌 내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만약 추가적인 지출이 필요할 경우 그 비용은 선수에게 부담시켰습니다. 심지어 부상 방지를 위해 감는 테이프의 사용량도 일일이 체크할 정도였고, 따라서 연봉 협상 때마다 선수들과 마찰을 빚기 일쑤였죠. 설상가상 메이저리그는 1976년부터 자유계약(FA) 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FA 제도의 도입으로 핵심 선수 대부분을 잃을 위기에 놓인 찰스 핀리는 1976년 핑거스와 조 루디를 넘기는 대가로 보스턴으로부터 200만 달러를, 비다 블루를 넘기는 대가로 양키스로부터 150만 달러를 받는 '현금 트레이드'를 추진했는데요. 하지만 당시 커미셔너 보위 쿤은 "야구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라며 3일 만에 이를 무효화했고,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은 핑거스는 샌디에이고와 연봉 25만 달러에 계약을 맺습니다.
핑거스는 샌디에이고 이적 첫 해인 1977년 78경기 8승 9패 35세이브 132.1이닝 113탈삼진 ERA 2.99를, 1978년 67경기 6승 13패 107.1이닝 72탈삼진 ERA 2.52를 기록하며 2년 연속 NL 세이브 1위에 오릅니다. 1979년에는 잔부상에 시달리며 54경기 9승 9패 13세이브 83.2이닝 65탈삼진 ERA 4.52로 커리어 최악의 성적을 거뒀지만, 1980년 66경기 11승 9패 23세이브 103이닝 69탈삼진 ERA 2.80으로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밀워키의 전성기를 이끌다
롤리 핑거스 / 출처 - MLB.com
하지만 재정적으로 넉넉한 팀이 아니었던 샌디에이고는 1980시즌 종료 후 핑거스를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밀워키로 보냅니다. 당시 밀워키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로빈 욘트와 폴 몰리터를 앞세워 강호로 도약하고 있었는데요. 핑거스는 이적 첫해인 1981년 6승 3패 28세이브 ERA 1.04로 세이브 1위를 차지하고, 팀을 창단 첫 가을야구 진출로 이끌면서 NL 사이영상과 MVP를 동시에 석권하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1982년 50경기 5승 29세이브 79.2이닝 71탈삼진 ERA 2.60을 기록하며 밀워키의 2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을 이끌었죠. 하지만 시즌 내내 통증을 참고 공을 던졌던 핑거스는 9월 2일 클리블랜드와 더블헤더 1차전에서 오른팔 부상을 당하며 시즌 아웃되고 맙니다. 밀워키는 핑거스가 빠진 상태에서도 창단 후 첫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으나, 끝내 핑거스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세인트루이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합니다.
이 부상으로 핑거스는 1983시즌 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지만, 1984시즌 복귀해 33경기 1승 2패 23세이브 46이닝 40탈삼진 ERA 1.96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1984년 8월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으며 시즌 아웃됐고, 수술에서 돌아온 후에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1985년 38세의 핑거스는 47경기에서 1승 6패 17세이브 55.1이닝 24탈삼진 ERA 5.04에 그쳤고, 시즌 종료 후 밀워키에서 방출됐습니다.
밀워키에서 방출된 후 핑거스는 신시내티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는데요. 그러나 신시내티에 입단할 경우 수염을 기르지 못하게 하는 규정 때문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을 깎아야 했기에 제안을 거절하고 은퇴했습니다. 은퇴 시점에서 핑거스의 341세이브는 역대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활약으로 마무리 투수란 보직이 대중화되면서 이후 핑거스의 기록은 지금도 꾸준히 경신되고 있죠.
은퇴 이후의 삶
롤리 핑거스 / 출처 - MLB.com
핑거스는 "모든 구단이 이제 구원 투수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습니다. 제가 그 일에 관여했는지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핑거스는 1992년 두 번째 투표에서 81.2%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이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헌액은 데니스 에커슬리, 브루스 수터, 구스 고시지, 트레버 호프먼, 마리아노 리베라, 빌리 와그너 등 후배 마무리 투수들의 명전 입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명예의 전당 헌액 후 애슬레틱스와 밀워키에서 그의 등번호 3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면서 핑거스는 여러 팀으로부터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10명의 선수 중 한 명이 됐습니다. 또한 1999년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메이저리그 레전드 랭킹에서 96위를 차지했고, MLB 올센추리 팀의 최종 후보로 선정됐습니다. 핑거스는 현재 라스베이거스에 거주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여전히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을 기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