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명의 성난 사람들’에서 떠오른 브룩스 로빈슨 이야기
최근 한 유튜브 방송에서 배심원 제도를 다룬 드라마를 소개하다 고전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을 언급했습니다. 법정 영화의 대명사로 불리는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1957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명작으로, 역대 가장 위대한 영화를 꼽을 때도 자주 거론됩니다.
이 작품은 어떤 시각으로도 ‘야구 영화’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 관대한 시각으로 보면 야구팬의 관점에서 나름의 흥미 요소가 있습니다. 한 살인 사건을 두고 12명의 배심원단이 최종 결론을 내리기 위해 토론하는 과정이 영화의 주요 줄거리입니다. 애초 이 토론은 1시간만 진행하기로 약속돼 있었습니다. 토론을 마치고 바로 뉴욕 양키스의 경기를 보러 가려는 배심원 때문이었습니다.
12명 가운데 7번 배심원이 양키스 얘기를 늘어놓자, 5번 배심원이 자신은 볼티모어 팬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곧바로 7번 배심원의 조롱이 이어집니다. “볼티모어 팬이라고? 그건 하루에 한 번씩 쇠막대로 머리를 맞는 것과 비슷한 일 같은데.”
노골적인 폄하에도 5번 배심원은 큰 반응 없이 웃어넘깁니다. 그럴 만합니다. 영화가 개봉한 1957년까지 볼티모어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팀이었습니다. 1901년 창단해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거쳐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름을 바꿔 이어오기까지 딱 한 번 월드시리즈에 진출했고, 그마저 우승을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반면 뉴욕 양키스는 1920년 베이브 루스가 가세한 이후 역사를 만들기 시작해, 1957년에는 메이저리그를 상징하는 구단으로 군림한 상태였습니다.
비교조차 불가능할 것 같던 두 팀은 1960년대에 엇갈린 희비를 맞습니다. 볼티모어가 처음으로 리그의 지배자로 올라서면서 양키스는 한동안 침체기를 겪게 됩니다. 야구단의 흥망성쇠를 한두 명의 업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패러다임을 바꾼 가장 상징적인 인물을 꼽는다면 바로 브룩스 로빈슨일 것입니다.
세계 스포츠 역사에서 ‘진공청소기’라는 별명으로 불린 선수는 여럿입니다. 그중 가장 먼저, 가장 오랫동안 '진공청소기'로 불린 선수가 브룩스 로빈슨이라 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로빈슨은 이전까지 존재했던 3루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비를 보여주면서, 3루 수비의 표준을 새롭게 세웠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전까지 수비에 큰 비중을 두지 않던 3루 포지션이 로빈슨의 등장 이후 재정립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브룩스 로빈슨은 신체 조건이 월등히 뛰어난 것도 아니고 엄청난 운동 능력을 지닌 선수도 아니었습니다. 고교 시절부터 타격은 장래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고, 아예 장점이 없는 선수라고 말한 전문가도 여럿입니다. 하지만 로빈슨은 경기 도중 기막힌 야구 센스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면이 있었습니다. 경기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침착한 플레이를 하는 모습을 주목한 일부 스카우트도 있었습니다. 볼티모어 스카우트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훗날 볼티모어의 전성기를 함께 한 명투수 짐 파머가 로빈슨을 설명한 말도 맥락은 비슷합니다. “허리부터 발끝까지만 보면 내가 본 최악의 운동 선수. 하지만 허리부터 머리 위로는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선수”. 겉으로 드러난 운동 능력은 뛰어나 보이지 않지만, 그만큼 야구 지능과 반사신경, 손놀림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얘기였습니다.
어쨌거나 당시 볼티모어 구단은 연고지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팀이었고 팀의 전력도 미미했습니다. 로빈슨도 대단한 주목을 받는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볼티모어 스카우트는 로빈슨에게 출전 기회를 확보하려면 자신들과 계약하는 게 나을 것이라 설득했고,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로빈슨은 볼티모어에 입단하게 됩니다.
특유의 차분함에 센스를 겸비해 꾸준히 성장한 로빈슨은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선수로 발돋움해 역사를 썼습니다. 1960년부터 15년 연속 올스타에 선발됐고 골드글러브는 무려 16년 연속 수상했습니다. 1964년 타격에서도 큰 발전을 이뤄 리그 MVP에 올랐고, 1966년 만년 하위 팀이던 볼티모어를 첫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 신시내티와의 월드시리즈에서는 지금도 회자되는 명수비를 여러 차례 선보인 끝에 시리즈 MVP를 차지하며 두 번째 우승도 이뤘습니다.
로빈슨은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배출한 첫 번째 슈퍼스타지만, 그것이 단순한 경기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경기장 밖의 행실과 지역 사회에 대한 기여를 더 주목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로빈슨은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프랭크 로빈슨이 영입됐을 때, 주도권을 쥐기 위해 경쟁하기보다 하나의 팀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프랭크 로빈슨을 둘러싼 인종 차별적인 사회 분위기를 극복하려 애썼고, 광고 촬영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백인 리더와 흑인 강타자가 같은 팀에서 화합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됐습니다. 그래서 60년대 볼티모어 지역의 사회적 분열을 해소했다는 평가마저 받았습니다. 훗날 피츠버그에서 벌어진 앤디 반 슬라이크와 배리 본즈의 갈등을 보면 브룩스 로빈슨의 처신은 더욱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로빈슨의 인품도 지금까지 회자되는 부분입니다. 팬들에게 사인해 줄 때마다 자녀는 있는지, 어디에 사는지, 개를 키우는지 물어보며 진심으로 소통하려 애쓴 일화가 숱하게 전해집니다. 아이들에게 사인해 주는 시간을 아끼지 않은 것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특히 어린이 팬이 바라보는 시야를 유지하면서 사인하기 위해 일부러 왼손으로 사인하던 장면은 로빈슨의 온화한 이미지를 상징하는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로빈슨의 모습을 본 디트로이트 뉴스의 조 폴스 기자는 “저 선수는 지금 자신이 브룩스 로빈슨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며 그의 겸손함과 소탈함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실력으로 구단의 역사를 바꾸고, 성품으로 지역 사회의 흐름을 바꾼 브룩스 로빈슨. 정확한 통계가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브룩스라는 이름이 가장 많은 도시는 볼티모어로 통합니다. 자녀는 물론 애완 동물에게도 브룩스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는 겁니다. 브룩스 로빈슨 시대 이후였다면 ‘12명의 성난 사람들’의 대사 내용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