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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빅 레드 머신의 엔진', 조 모건 이야기

이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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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6 09:00:15
'빅 레드 머신의 엔진', 조 모건 이야기

조 모건 / 출처 - MLB.com

 

조 모건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2루수 중 한 명이자, 1970년대 신시내티 레즈의 전성기를 이끈 '빅 레드 머신'의 일원입니다. 모건은 작은 체구(170cm 72kg)에도 불구하고 정확도와 파워, 빠른 발과 수비력을 모두 갖춘 완벽한 선수였는데요. 실제로 그는 최전성기였던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연평균 타율 0.301 22홈런 113득점 84타점 60도루 OPS 0.924를 기록했고 올스타 6회, 골드글러브 5회, MVP 2회를 수상했습니다.

 

세이버매트릭스(야구 통계학)로 살펴보면 그의 활약은 더욱 빛납니다. 모건은 같은 기간 베이스볼 레퍼런스 기준 WAR(승리 기여도)에서 4번이나 1위에 올랐고, 합계 53.6승(평균 8.9승)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그가 공·수·주에서 모두 뛰어날 뿐만 아니라 출루율 1위를 4번이나 차지했을 만큼 선구안이 뛰어난 타자였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모건은 세이버매트릭스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죠.

 

작은 체구와 인종 차별을 극복하다
'빅 레드 머신의 엔진', 조 모건 이야기

조 모건 / 출처 - MLB.com

 

조 레너드 모건(Joe Leonard Morgan)은 1943년 9월 19일 미국 텍사스주 보넘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레너드와 올리 모건의 여섯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모건이 다섯 살 때 그의 가족은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로 이사했는데요. 모건은 어린 시절부터 동네 친구들과 함께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종목은 야구였죠. 모건은 13살 때 베이브 루스 리그에서 처음으로 조직적인 야구를 접했습니다.

 

모건은 캐슬몬트 고교 시절 팀을 지역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작은 체격(170cm 72kg)으로 인해 메이저리그 팀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4년제 대학의 야구 장학금 제안조차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1961년 고교 졸업 후 지역의 2년제 대학인 오클랜드 시티 칼리지에 경영학 전공으로 입학해 야구 팀에서 뛰었습니다. 그런데도 2루수인 모건은 팀의 중심타자이자, 도루왕으로 대학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대학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모건은 메이저리그 팀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1962년 11월 1일 휴스턴 콜트 45s(현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계약금 3000달러, 월급 500달러에 계약을 맺었습니다. 교육 캠프를 마친 모건은 1963년 캘리포니아 리그(클래스 A)의 모데스토 콜츠에 배정되어 45경기를 뛴 후 캐롤라이나 리그(A)의 더럼 불스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메이저리그에 남아있던 인종차별을 접하게 됩니다.

 

모건은 팀의 유일한 흑인 선수였고, 첫날부터 관중석에서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9회 말 대타로 나선 그는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고 욕설은 환호로 바뀌었죠. 더럼 데뷔 직후, 모건은 또 다른 불쾌한 경험을 했는데요. 백인 동료들과 같은 숙소에 묵을 수 없었고, 식수대와 화장실조차도 따로 써야 했던 겁니다. 모건은 야구를 그만둘까 고민했지만 더럼의 감독인 빌리 굿맨의 격려 덕분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평생의 모토가 된 은사의 조언
'빅 레드 머신의 엔진', 조 모건 이야기

조 모건 / 출처 - MLB.com

 

굿맨은 모건의 적응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타격에 대해서도 귀중한 조언을 해줬는데요. 초구부터 휘두르지 말고 상대 투수를 파악하기 위해 최대한 공을 지켜보라는 조언이었죠. 이는 모건의 플레이 스타일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굿맨의 조언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모건은 훗날 메이저리그에서 8차례나 100볼넷 시즌을 보내고 4번의 출루율 1위, 4번의 볼넷 1위와 함께 통산 출루율 0.392를 기록하는 대 타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모건이 첫 시즌부터 더럼에서 타율 0.332 13홈런 43타점 OPS 1.010으로 맹활약을 펼치자, 휴스턴은  예상보다 일찍 그를 메이저리그로 승격시켰습니다. 모건은 9월 확장 로스터가 시행되기 시작할 때쯤 빅리그로 콜업됐고, 1963년 9월 21일, 만 20세 2일의 나이에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릅니다. 모건은 데뷔 첫 타석에서 내야 뜬공으로 물러나며 아쉬움을 삼켰지만, 다음날에는 9회말 우익수 방면 끝내기 안타를 때려냈습니다.

 

이듬해인 1964년 텍사스 리그(더블 A)의 샌안토니오 불리츠에서 시즌을 시작한 모건은 타율 0.323 12홈런 90타점 47도루 OPS 0.952를 기록하며 텍사스 리그 MVP에 선정됐고, 시즌 막판 메이저리그로 콜업되어 10경기에서 타율 0.189(37타수 7안타)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965년부터 1971년까지 7년간 휴스턴의 주전 2루수로 활약했는데요. 휴스턴 시절에도 모건은 준수한 2루수였지만, 역대 최고의 2루수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모건은 풀타임 첫해인 1965년 타율 0.271 14홈런 100득점 20도루 97볼넷(1위) OPS 0.791으로 NL 신인왕 투표 2위에 올랐고, 2년 차인 1966년에는 타율 0.285 5홈런 60득점 11도루 OPS 0.801으로 생애 첫 올스타에도 선정됐습니다. 하지만 1967년 타율 0.275 6홈런 73득점 29도루 OPS 0.789을 기록한 후 1968년 왼쪽 무릎의 내측 인대가 파열되면서 10경기 출전에 그쳤고, 그 여파로 1969년에도 타율 0.236에 머물렀습니다.


신시내티로 트레이드되다
'빅 레드 머신의 엔진', 조 모건 이야기

조 모건 / 출처 - MLB.com

 

다행히도 무릎 수술 여파에서 회복한 모건은 1970년 타율 0.268 8홈런 102득점 42도루 OPS 0.779으로 통산 두 번째 올스타에 선정됐고, 1971년에도 타율 0.256 13홈런 87득점 40도루 OPS 0.757으로 준수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타선 강화를 위해 거포 영입을 원했던 휴스턴은 1971시즌 종료 후 모건을 신시내티로 트레이드합니다. 이 트레이드는 당시 휴스턴 감독인 해리 워커와 모건의 불화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이 트레이드에 대한 평가는 신시내티의 압도적인 승리로 여겨지지만, 당시 많은 전문가는 휴스턴이 트레이드에서 더 많은 이득을 얻었다고 여겼습니다. 휴스턴은 모건과 함께 주전 외야수 세자르 제로니모, 투수 잭 윌링햄, 내야수 데니스 멘키, 유망주 외야수 에드 암브리스터를 넘기는 대가로 신시내티로부터 거포 1루수 리 메이, 올스타 2루수 토미 헬름스, 유틸리티 플레이어인 지미 스튜어트를 영입했습니다.

 

트레이드의 핵심은 1루수 리 메이였는데요. 메이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 연속 30홈런 이상을 때려낸 신시내티 출신 타자로 당시 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수 중 한 명이었죠. 당연하게도 신시내티 팬들은 이 트레이드에 강한 불만을 표했습니다. 하지만 트레이드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모건이 이적 첫 해부터 타율 0.292 16홈런 73타점 58도루 OPS 0.851을 기록했기 때문이죠.

 

모건은 특히 득점(122)·볼넷(115)·출루율(.417) 부문 1위에 오르면서 1번 타자 피트 로즈와 함께 '빅 레드 머신'의 촉매제 역할을 맡았습니다. 모건의 활약에 힘입어 직전 해 79승 83패(.488)로 NL 서부지구 4위에 그쳤던 신시내티는 1972년 95승 59패(.617)로 지구 1위를 탈환했고, NLCS에서 피츠버그를 3승 2패로 꺾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기에 이릅니다(다만 월드시리즈에서 오클랜드에게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습니다).


신시내티의 월드시리즈 2연패를 이끌다
'빅 레드 머신의 엔진', 조 모건 이야기

1975년 월드시리즈 조 모건 / 출처 - MLB.com

 

모건은 1973년 타율 0.290 26홈런 116득점 67도루 OPS 0.899의 성적과 함께 생애 첫 골드글러브를 받았고, 1974년에도 타율 0.293 22홈런 107득점 58도루 OPS 0.921으로 출루율(.427) 1위에 올랐습니다. 이후 그는 1977년까지 5년 연속 골드글러브, 1979년까지 8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며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절정은 1975-76년이었는데요. 모건은 1975년 타율 0.327 17홈런 107득점 67도루 OPS 0.974를 기록했습니다.

 

이해 모건은 볼넷(132)·출루율(.466)·OPS(.974) 부문에서 1위에 올랐고, 수비 기여도에서도 +14점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모건은 WAR(승리 기여도)에서 11.0승으로 MLB 전체 1위에 올랐습니다. 이는 2위 로드 커류(7.9승)보다 3.1승이나 높은 수치였죠. 물론 이 시기 메이저리그에는 WAR이란 개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수치로 보지 않더라도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타자가 누구인지는 명백했습니다.

 

신시내티는 108승 54패(.667)로 NL 서부 지구 1위에 올랐고, NLCS에서 피츠버그를 상대로 3연승을 거두며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월드시리즈에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보스턴을 4승 3패로 꺾고 1940년 이후 35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모건은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259(27타수 7안타)에 그쳤지만, 3차전과 7차전에서 결승타를 기록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해 내셔널리그 MVP는 모건의 몫이었습니다.

 

모건은 1976년에도 타율 0.320 27홈런 113득점 60도루 OPS 1.020을 기록했고, 출루율(.444)·장타율(.576)·OPS·WAR(9.6) 부문 1위에 올랐습니다. 소속팀 신시내티 역시 102승 60패(.630)로 2년 연속 NL 서부 지구 1위를 기록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이어 NLCS에서 필라델피아에 3연승,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에 4연승을 거두며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죠. 시즌 종료 후 모건은 2년 연속 내셔널리그 MVP에 선정됐습니다.


빅 레드 머신의 해체
'빅 레드 머신의 엔진', 조 모건 이야기

조 모건, 켄 그리피 시니어, 피트 로즈 / 출처 - MLB.com

 

이 시기 모건이 보여준 활약은 현대 야구 2루수로서 최고의 퍼포먼스로 꼽힙니다. 실제로 2루수가 2년 연속 MVP에 선정된 것은 NL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요. 또한, NL 팀이 월드시리즈 2연패를 달성한 것도 뉴욕 자이언츠(1921~1922년) 이후 처음이었고, 특히 1976년에는 챔피언십시리즈 도입 후 유일한 포스트시즌 무패 기록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빅 레드 머신의 전성기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메이저리그는 1976년부터 선수들이 일정 기간 팀에서 활약한 후 다른 팀과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는 '자유계약 선수(FA)' 제도를 도입했고, 이는 선수들의 연봉 상승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FA 제도 도입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구단은 신시내티였는데요. 스몰마켓인 신시내티는 늘어난 연봉을 감당할 재정적인 여력이 없었고, 1976시즌 종료 직후 주전 1루수 토니 페레즈를 시작으로 주축 선수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물론 모건은 1977년에도 타율 0.288 22홈런 113득점 49도루 OPS 0.895로 훌륭한 한 해를 보냈지만, 그가 직전 두 시즌 동안 기록한 성적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신시내티 역시 88승 74패(.543)로 NL 서부지구 2위에 그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이듬해인 1978년에는 상황이 더 악화돼서 모건은 타율 0.236 13홈런 68득점 19도루 OPS 0.733에 머물렀고, 신시내티도 두 시즌 연속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78시즌 종료 후 피트 로즈가 FA 자격을 얻어 팀을 떠났고, 스파키 앤더슨 감독은 해고됐습니다. 신시내티는 1979년 90승 71패(.559)로 NL 서부 지구 1위를 탈환했지만, '빅 레드 머신'의 주역들 중 상당수가 팀을 떠난 뒤였습니다. 이해 신시내티는 NLCS에서 피츠버그에 3연패를 당하며 탈락했고, 모건은 1979년 타율 0.250 9홈런 70득점 28도루 OPS 0.756을 기록한 후 FA를 선언하고, 친정팀인 휴스턴으로 복귀했습니다.

 

선수 생활 말년
'빅 레드 머신의 엔진', 조 모건 이야기

조 모건 / 출처 - MLB.com

 

신시내티를 떠난 후 모건은 메이저리그에서 5시즌을 더 뛰었는데 휴스턴에서 한 시즌,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시즌, 필라델피아와 애슬레틱스에서 각각 한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슈퍼스타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준수한 실력을 지닌 선수였는데요. 모건은 휴스턴 시절이었던 1980년 타율 0.243 11홈런 66득점 24도루 OPS 0.740으로 볼넷(93) 부문 1위를 기록하며 최고참으로서 팀의 NL 서부 지구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이듬해 샌프란시스코로 이적한 모건은 1981년 90경기에서 타율 0.240 8홈런 47득점 14도루 OPS 0.748에 그쳤지만, 뛰어난 리더십을 바탕으로 '윌리 맥 상'을 수상했고, 1982년 타율 0.289 14홈런 68득점 24도루 OPS 0.838로 NL 2루수 부문 실버슬러거에 선정되며 NL '올해의 컴백 플레이어'로 선정됐습니다. 이후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된 모건은 '빅 레드 머신'의 일원이었던 피트 로즈, 토니 페레즈와 재결합했습니다.

 

모건은 1983년 타율 0.230 16홈런 59타점 18도루 OPS 0.773을 기록했고, 베테랑들이 중심이 된 필라델피아는 NL 동부 지구 1위를 차지한 후 NLCS에서 다저스를 3승 1패로 꺾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월드시리즈에서 볼티모어에 1승 4패로 패하며 우승까지 차지하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1984년 애슬레틱스에서 타율 0.244 6홈런 50득점 8도루 OPS 0.707을 기록한 후 모건은 만 41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모건은 현역 22시즌 동안 통산 2,649경기에서 2,517안타 268홈런 1,650득점 1,133타점 689도루 타율 0.271 출루율 0.392 OPS 0.819 WAR 100.6을 기록했고, 올스타 10회, 골드글러브 5회, 실버슬러거 1회, MVP 2회, 월드시리즈 우승 2회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신시내티 구단은 모건의 등번호 8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고, 모건은 1990년 첫 번째 투표에서 81.8%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은퇴 후의 삶
'빅 레드 머신의 엔진', 조 모건 이야기
조 모건 / 출처 - MLB.com
 

현역 은퇴 후 모건은 1985년 신시내티의 TV 해설 위원으로 방송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9년)와 오클랜드(1년)의 TV 해설 위원을 맡았습니다. 또한, ABC 스포츠(1988-89년)와 NBC 스포츠(1994-2000년) 등 전국 단위 방송국에서도 활약하며 여러 번의 올스타전, 포스트시즌, 월드시리즈를 중계했는데요. 하지만 그의 가장 유명한 방송 경력은 ESPN에서 21년간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 중계를 맡았던 것입니다.

 

그는 풍부한 경험과 예리한 분석을 바탕으로 해설 위원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2010년 신시내티의 야구 운영 특별 고문을 맡으면서, ESPN의 해설직에서 물러났습니다. 한편 메이저리그, 마이너리그, 니그로리그 출신 선수들의 재정적, 의료적 어려움을 돕는 야구 지원팀(Baseball Assistance Team) 이사회 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고, 2000년부터 2020년까지 명예의 전당 이사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모건은 그 밖에도 여러 자선 단체와 시민 단체에도 참여했는데요. 그의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음악을 통해 장애 아동들이 즐거운 방식으로 움직임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단체인 '어드벤처스 인 무브먼트(Adventures in Movement)'의 이사로 오랫동안 재직한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은퇴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했던 모건은 2020년 10월 1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댄빌에 있는 자택에서 향년 7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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