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프 리, 필리스의 34번이 되다
2002년 6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단장 마크 샤파이로)와 몬트리올 엑스포스(단장 오마 미나야) 간에 대형 트레이드가 성사됐다.
클리블랜드는 에이스인 바톨로 콜론을 내주는 대가로 몬트리올에서 1위 유망주 브랜든 필립스와 3위 유망주 그래디 사이즈모어, 11위 유망주 클리프 리를 받았다. 리에게 이 트레이드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리는 당시 아들 제이슨이 소아 백혈병과 싸우고 있었다. 리는 트레이드 직전 몬트리올로부터 트리플A로 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문제는 몬트리올의 트리플A 팀이 캐나다 오타와에 있다는 것으로, 의료비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가족이 모두 캐나다로 이주해야 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된 덕분에 고향(아칸소주 벤튼)에서 계속 지내면서 의료비 지원을 받는 것이 가능해졌다.
리는 클리블랜드에서 무럭무럭 성장했고, 2008년 아메리칸리그의 사이영 투수가 됐다. 2007년 CC 사바시아에 이어, 클리블랜드 투수의 2년 연속 수상이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수상 바로 다음 해에 사바시아를 트레이드한 것과 마찬가지로, 리도 수상 다음 시즌에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았다. 2009년 7월의 일이었다.
많은 팀들이 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두 팀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LA 다저스였다.
필리스는 투수 카를로스 카라스코, 포수 루 마슨, 내야수 제이슨 도널드, 투수 제이슨 냅 네 명을 주고 리를 데려왔다. 클리블랜드가 에이스 포텐셜을 가진 유망주를 원한 반면, 다저스가 제시한 에단 마틴과 조시 린드블럼은 카라스코에 미치지 못했다.
리를 영입한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진 않았다. 밀워키는 1년 전인 2008년 7월에 마이클 브랜틀리가 포함한 네 명을 주고 사바시아를 데려갔는데, 사바시아는 17경기에서 11승2패 1.65의 엄청난 활약을 통해 밀워키의 PS 진출을 이끌었다. 반면 리가 필리스 합류 후 12경기에서 거둔 성적은 7승3패 3.39로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8년 사바시아가 디비전시리즈 2차전에서 3.2이닝 5실점에 그쳐 밀워키의 탈락을 막지 못한 반면, 리는 가을이 되자 미친 폭주를 시작했다.
리는 1차전 9이닝 1실점 완투승과 5차전 7.1이닝 1자책 호투로 디비전시리즈 승리를 이끌더니, NLCS 3차전에서도 8이닝 10K 무실점 승리를 따냈다. 상대가 영입 경쟁을 한 다저스였기 때문에 필리스로서는 더 짜릿했다. 당시 다저스는 매니 라미레스가 2002년의 본즈처럼 활약했지만, 결국 필리스를 넘지 못했다.
1883년에 창단해 1980년에 처음으로 우승한 것이, 창단 후 첫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팀이었던 필리스는 2008년에 두 번째 우승을 했고, 월드시리즈 2연패를 노리고 있었다.
2008년 필리스는 PS 5경기에서 4승 1.80을 기록하고 NLCS와 월드시리즈에서 모두 MVP를 차지한 콜 해멀스가 있었다. 그러나 해멀스는 그 여파로 2009년에는 좋지 못했다. 하지만 리가 등장해 대활약을 하면서 해멀스를 대신할 에이스가 됐다. 월드시리즈 상대는 26번의 우승에 빛나는 양키스. 역사상 가장 성공한 팀과 가장 많이 패한 팀의 대결이었다.
운명의 월드시리즈 1차전. 리는 9이닝 10K 무자책(1실점)의 완벽한 피칭으로 양키스 타선을 잠재웠다. 양키스의 선발 투수는 공교롭게도 클리블랜드에서 함께 뛰었던 사바시아였다. 사바시아도 역투했지만, 체이스 어틀리에게 솔로홈런 두 방을 맞고 7이닝 2실점 패전을 안았다.
하지만 양키스는 A J 버넷 대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2차전과 앤디 페팃 대 콜 해멀스의 3차전, 사바시아 대 조 블랜튼의 4차전을 모두 승리해 3승1패를 만들었다. 5차전에서 리는 5실점을 했지만 7이닝을 버텼고, 필리스는 버넷이 2이닝 만에 교체된 양키스를 꺾었다(2승3패).
필리스는 6차전을 넘기기만 하면, 전년도 월드시리즈 MVP인 해멀스가 선발로 나서며 리가 불펜으로 등장할 수 있는 7차전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6차전에서 페드로는 마츠이에게만 4타점을 내주고 무너졌고, 7차전은 탄생하지 않았다. 6차전에서 6타점을 올린 마츠이 히데키는 일본 선수 최초로 월드시리즈 MVP가 됐다(2호는 2025년 야마모토 요시노부).
시즌 중 리를 데려온 건 루벤 아마로 단장의 대단한 성과였다. 하지만 그 해 겨울 아마로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아마로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당시 최고의 에이스인 로이 할러데이를 데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리를 시애틀로 트레이드했다. 아마로는 할러데이와 리를 같이 쓰는 대신, 리를 시애틀의 유망주들과 바꿨다. 그리고 리가 빠져나가면서 생긴 연봉으로 블랜튼과 연장 계약을 했다. 할러데이는 리의 등번호였던 34번을 가져갔다.
결과는 어땠을까. 아마로는 할러데이 트레이드에서 생긴 유망주 손실을 리를 팔아서 채움으로써 미래를 대비했다고 했지만, 리로 얻은 세 명(필립 오몽, JC 라미레스, 타이슨 질리스)은 하나도 터지지 않았다. 블랜튼은 재계약 이후 크게 부진했고, 리는 텍사스로 가서 또 한 번 가을의 지배자가 됐다.
리를 할러데이로 교체하고 시작한 2010년에 필리스는 NLCS에서 샌프란시스코에게 패했다. 만약 리가 같이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지도 모른다. 리는 그 해 마감시한 때 시애틀에서 텍사스로 트레이드됐고, PS 첫 세 경기에서 3승 0.75를 기록함으로써 PS 통산 성적이 8경기 7승 1.26이 됐다. 하지만 리도 월드시리즈에서 샌프란시스코를 만나 2패를 당했기 때문에 결과는 같았을 수도 있다.
아마로는 FA가 된 리와 5년 1억2000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 리를 시애틀로 트레이드하면서 "어차피 잡을 수 없는 선수"라고 한지 1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리는 트레이드 전 필라델피아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스의 재계약 논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가 33번을 달고 입단하면서, 리와 할러데이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을 함께 뛰었다. 2011년 233.2이닝 19승6패 2.35를 기록한 할러데이와 232.2이닝 17승8패 2.40을 기록한 리는, 지금으로서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최강의 원투펀치였다. 한국 팬들은 스트라이크 존을 폭격하면서 시원시원한 피칭을 하는 둘에게 '할교수와 리선생'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그러나 필리스는 리와 할러데이가 함께 할 수 있었던 2010년을 놓친 후, 더 이상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적기를 놓친 롤린스 어틀리 하워드의 중심 타선은 점점 늙어가고 있었다. 33번과 34번을 달고 서로 경쟁하듯 타자들을 압도했던 리와 할러데이 또한 우승 없이 은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