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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샌프란시스코의 에이스, 후안 마리샬 이야기

이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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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4 01:41:36
샌프란시스코의 에이스, 후안 마리샬 이야기

후안 마리샬 / 출처 - MLB.com

야구 역사상 모든 투수를 투명한 커튼 뒤에 실루엣만 보이도록 배치한다면, 마리샬의 움직임을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마운드에 아름다움, 개성, 그리고 품격을 가져왔습니다.
If you placed all the pitchers in the history of the game behind a transparent curtain, where only a silhouette was visible, Juan’s motion would be the easiest to identify. He brought to the mound beauty, individuality and class.
밥 스티븐스 『야구 최고의 명언들(1982년)』

후안 마리샬은 1960년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 중 한 명이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입니다.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으로 '더 도미니칸 댄디(the Dominican Dandy)'라는 멋들어진 별명을 지녔던 그는 높은 레그킥과 세 가지 팔 각도에서 나오는 다채로운 변화구, 정확한 제구력 그리고 뛰어난 내구성으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또한,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으로서 최초이자, 미국 외 국적자로서도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입니다.

 

​마리샬은 1960년부터 1975년까지 16시즌 중 대부분을 샌프란시스코에서 뛰면서 통산 243승 142패 3507이닝 2303탈삼진 ERA 2.89를 기록했고 올스타 10회, 다승왕 2회, 방어율왕 1회, 올스타 MVP 1회, 노히터 1회를 달성했습니다. 특히 1960년대에만 191승을 거두며 2위 밥 깁슨(164승)과 큰 차이로 다승 1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동시대의 샌디 코팩스와 밥 깁슨의 임팩트에 가려져 한 번도 사이영 상을 수상하지 못한 비운의 에이스이기도 했습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야구 소년
샌프란시스코의 에이스, 후안 마리샬 이야기

도미니카 공화국의 해변 / 출처 - MLB.com

 

후안 안토니오 마리샬 산체스(Juan Antonio Marichal Sánchez)는 1937년 10월 20일, 도미니카 공화국의 작은 농촌 마을인 라구나 베르데에서 프린시스코와 나티비다드 마리샬 부부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농촌 마을 사람들에게 삶은 고달팠고, 마리샬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죠. 마리샬의 가족은 전기도 없이 야자나무껍질로 만든 오두막에서 살았습니다. 게다가 마리샬이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들은 더욱 곤경에 처했습니다.

 

어린 시절 마리샬은 매일 농장에서 일하며 가족의 말, 염소, 당나귀를 돌보는 일을 맡았습니다. 또한, 여가 시간에는 야케 델 노르테 강에서 낚시와 수영을 했습니다. 마리샬은 열 살 무렵, 소화 불량으로 의식을 잃고 9일간 혼수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요. 지역 의사들은 마리샬에게 희망이 없다고 했지만, 가족들이 민간요법에 따라 증기 목욕을 시킨 후 그는 서서히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마리샬에게 야구를 처음 가르친 사람은 큰 형인 곤살로였습니다.

 

마리샬은 주말마다 친구들과 함께 야구를 했습니다. 그들은 골프공을 찾아 신발 수선공에게 1페소를 주고 공 주위에 두꺼운 천을 꿰매어 야구공 크기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지역에서 나는 단단한 나무의 가지로 배트를 만들었고, 캔버스 방수포로 글러브를 만들었죠. 어린 시절 야구를 함께 한 친구 중에는 알루 삼 형제(펠리페, 헤수스, 매티)도 있었습니다. 훗날 이들은 모두 훌륭한 메이저리거로 성장해 마리샬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뛰었습니다.

 

마리샬은 여섯 살 무렵부터 프로야구 선수를 꿈꿨지만,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메이저리그에는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선수가 한 명도 없었기에 그의 목표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마리샬이 교육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1953년 15세의 마리샬은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큰 형(곤살로)이 사는 산토도밍고에서 1년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마리샬은 형에게 트럭 운전을 배웠고, 그의 추천으로 석유회사(Esso Company)에서 일했습니다.

 

사이드암에서 오버핸드로
샌프란시스코의 에이스, 후안 마리샬 이야기

마이너리그 시절 후안 마리샬 / 출처 - MLB.com

 

1954년 마리샬은 고향으로 돌아와 몬테 크리스티에서 열린 서머 리그에 참가하여 '라스 플로레스'라는 팀에서 뛰었습니다. 그는 유격수로 야구를 시작했지만, 도미니카 국가대표팀의 에이스였던 봄보 라모스에게 영향을 받아 투수로 포지션을 옮겼습니다. 이후 1956년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산하 야구팀에 입단합니다. 이 시기 마리샬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공군 산하 야구팀과의 경기에서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거두면서 람피스 트루히요의 눈에 띄었습니다.

 

람피스 트루히요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였던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의 아들입니다. 람피스의 명령으로 마리샬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공군에 입대했는데요. 말은 입대지만 사실상 징집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공군에 입대한 후에도 마리샬은 항공기를 조정하거나 정비한 적이 없었고, 공군 산하 야구팀에서 뛰면서 투구 실력을 다졌습니다. 빠르게 성장한 그는 1958년 계약금 500달러를 받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을 맺습니다.

 

마리샬은 마이너리그를 가뿐하게 통과했습니다. 그는 1958년 미드 웨스트 리그(클래스 D)의 미시간 시티에서 21승 8패 245이닝 246탈삼진 ERA 1.87으로 다승·이닝·평균자책·완투(24) 부문 리그 1위에 올랐고, 1959년에는 이스턴 리그(클래스 A)의 스프링필드에서 18승 13패 271이닝 208탈삼진 ERA 2.39으로 다승·이닝·탈삼진·완봉(8) 부문 리그 1위에 올랐습니다. 이 시기까지 마리샬은 자신의 우상인 봄보 라모스를 따라서 사이드암으로만 공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감독인 앤디 길버트가 "오버핸드로 던지면 더 빠른 구속으로 더 다양한 구종을 던질 수 있다"라고 설득하면서 마리샬은 오버핸드로도 공을 던지기 시작했는데요. 그 결과 마리샬 특유의 레그킥을 높이 차고, 공을 숨기는 동작이 탄생했습니다. 마리샬은 1960년 퍼시픽코스트 리그(트리플 A)의 타코마 자이언츠에서 11승 5패 139이닝 121탈삼진 ERA 3.11을 기록한 후 같은 해 7월에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투수로선 두 번째로 메이저리그에 콜업됐습니다.

 

데뷔전부터 강한 인상을 남기다
샌프란시스코의 에이스, 후안 마리샬 이야기

후안 마리샬의 투구폼 / 출처 - MLB.com

 

마리샬은 1960년 7월 19일,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 9이닝 1피안타 1볼넷 12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요. 이후 10경기에 더 등판해 6승 2패 81.1이닝 58탈삼진 ERA 2.66으로 데뷔 시즌을 마쳤습니다. 이듬해인 1961년에는 13승 10패 185이닝 124탈삼진 ERA 3.89으로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었지만, 1962년 18승 11패 262.2이닝 153탈삼진 ERA 3.36으로 반등에 성공하면서 첫 올스타에 선정됐고 샌프란시스코의 리그 1위를 이끌었습니다.

 

월드시리즈 4차전에 선발 등판한 마리샬은 4회 말까지 4이닝 2피안타 2볼넷 4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지만, 5회 초 양키스의 에이스 화이티 포드를 상대로 번트를 시도하다가 오른손 엄지를 다치면서 교체됐고, 결국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해당 경기에서 7-3으로 이겼지만,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양키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는 마리샬의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시리즈 등판이기도 했습니다.

 

마리샬에게 1962년은 선수 경력뿐만 아니라 개인 생활에서도 특별한 해였는데요. 마리샬은 알루 형제의 소개로 만난 알마 카르바할과 약혼을 했는데, 1961년 트루히요가 암살된 후 도미니카 공화국은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스프링 캠프에 참가 중이던 마리샬은 약혼자를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앨빈 다크 감독에게 며칠간 휴가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다크는 휴가를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마리샬에게 비행기표 두 장을 직접 건넸습니다.

 

약혼자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온 마리샬은 1962년 3월 28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마리샬 부부는 슬하에 여섯 자녀를 두었고, 2026년에 결혼 64주년을 맞았습니다. 이듬해인 1963년 마리샬은 25승 8패 321.1이닝 248탈삼진 ERA 2.41으로 다승·이닝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하며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특히 1963년 6월 15일 휴스턴전에서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노히터를 달성했는데요. 흥미롭게도 해당 경기에서 그는 특유의 하이킥을 하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인 전성기의 시작
샌프란시스코의 에이스, 후안 마리샬 이야기

후안 마리샬 / 출처 - MLB.com

 

그리고 약 2주 후인 1963년 7월 2일, 마리샬은 좌완 역대 최다승(363승) 투수 워렌 스판과 MLB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펼칩니다. 두 투수는 16회말 윌리 메이스(통산 660홈런)가 스판을 상대로 끝내기 솔로 홈런을 때려내면서 1-0으로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나란히 무실점 행진을 이어갔는데요. 이미 통산 338승을 거둔 42세 베테랑 좌완 투수(스판)와 새롭게 떠오르는 25세 젊은 우완 투수(마리샬)의 맞대결은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투수전으로 꼽힙니다.

 

마리샬에 따르면, 경기가 12회 말에 접어들자 다크 감독은 그에게 두 번이나 교체를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샬은 감독에게 "마운드 위에 있는 저 남자가 보이시나요? 그는 42살이고, 저는 25살입니다. 저는 아직 교체할 준비가 안 됐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연장 16회말까지 가는 승부에도 불구하고 이 경기는 단 4시간 10분 만에 끝났는데요. 흥미롭게도 이날 경기장에는 훗날 메이저리그 9대 커미셔너가 되는 버드 셀릭이 팬 자격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해 내셔널리그 사이 영 상의 주인공은 마리샬이 아니었습니다. 다저스의 에이스 샌디 코팩스가 25승 5패 311이닝 306탈삼진 ERA 1.88로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기 때문이죠. 코팩스는 1963년 월드시리즈에서도 1, 4차전에 등판해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두 번의 완투승을 거두면서 다저스의 우승을 이끌었고, 사이영 상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습니다. 이후에도 코팩스의 존재는 마리샬의 사이영 상 수상을 번번이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했습니다.

 

이후에도 마리샬은 1963년부터 1969년까지 7시즌 중 6번이나 20승+250이닝+200탈삼진 이상을 기록했고, ERA 2.50 이하를 유지했는데요. 특히 1963년과 1966년 25승, 1968년에는 26승을 기록하면서 밥 펠러 이후 25승을 세 차례 달성한 최초의 우완 투수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부셨던 해는 1965년이었죠. 이 해 마리샬은 22승 13패 295.1이닝 240탈삼진 ERA 2.13을 기록했고, 완봉승(10)과 WAR(10.3)에서 리그 1위에 올랐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난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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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투극을 벌이는 후안 마리샬 / 출처 - MLB.com

 

그러나 1965년 8월 22일,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홈구장인 캔들스틱 파크에서 열린 샌프란시스코와 다저스의 경기. 이날의 이벤트는 시작 전부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8년 전 뉴욕을 떠나 서부로 이동한 두 라이벌 구단은 서로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고 있었고, 마침 일요일에 열리는 경기일 뿐만 아니라 선발 매치업도 양 팀의 에이스이자 최고의 투수들인 마리샬과 코팩스였기 때문입니다.

 

이날 양 팀은 시작부터 치열한 신경전을 펼쳤는데요. 1회초 다저스의 리드오프인 모리 윌스는 마리샬을 상대로 번트 안타를 기록한 후 론 페얼리의 2루타에 홈을 밟으며 선취점을 만들었습니다. 마리샬은 번트를 비겁한 방법이라 여겼고, 2회 초에 윌스가 타석에 들어서자 위협구를 던졌습니다. 그러자 다저스 투수 코팩스도 2회 말 타석에 들어선 윌리 메이스의 머리 위로 보복성 위협구를 던졌고, 이날 구심인 크로포드는 두 팀 모두에게 경고했습니다.

 

3회초 타석에 들어선 마리샬은 코팩스가 자신에게 위협구를 던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투구 후 상대 포수인 존 로즈보로가 마운드를 향해 던진 공이 귀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깜짝 놀란 마리샬은 로즈보로에게 "왜 그랬어?"라고 소리쳤고, 로즈보로는 주먹을 꽉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마리샬은 배트를 들어 로즈보로의 머리를 내리쳤고, 이로 인해 로즈보로의 이마에는 5cm 정도의 상처가 생겨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MLB 역사상 최악의 난투극이 펼쳐졌죠. 마리샬은 퇴장당했고, 8경기 출전 정지와 함께 당시 최고액인 1750달러의 벌금을 부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리샬에 대한 처벌이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했고, 그가 원정 경기에 나설 때마다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한편, 그의 이탈은 이해 샌프란시스코가 리그 1위를 차지하지 못한 원인이기도 했는데요. 이 사건의 여파로 훗날 마리샬은 투표 자격을 얻은 후 첫 2년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지 못했습니다.

 
무관의 에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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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마리샬과 로즈보로 / 출처 - MLB.com

 

하지만 마리샬은 로즈보로에게 용서를 구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 둘은 절친한 친구가 됐습니다. 로즈보로는 은퇴 후 한 인터뷰에서 사건의 발단이 된 자신의 송구는 마리샬이 윌스에게 위협구를 던진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밝혔는데요. 그는 "다저스가 치열한 순위 싸움을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에이스인 코팩스가 보복구로 퇴장당하고 출전 정지 징계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송구로 위협을 했지만, 마리샬을 다치게 할 의도는 없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훗날 마리샬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도 로즈보로의 호소 덕분이었죠. 마리샬이 1982년 두 번째 투표에서 7표가 모자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지 못하자, 로즈보로는 기자들에게 자신의 친구에게 투표해 줄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했습니다. 마리샬은 2002년 로즈보로가 세상을 떠나자 친구의 장례식에서 운구자로 참석해 "로즈보로가 저를 용서해 준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제 포수였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샬은 1966년 25승 6패 307.1이닝 222탈삼진 ERA 2.23으로 승률(.806)·WHIP(.859)·9이닝당 볼넷(1.1개)에서 리그 1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해에도 NL 사이영 상의 주인공은 27승 9패 323이닝 317탈삼진 ERA 1.73으로 커리어 세 번째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한 코팩스였습니다. 이해를 끝으로 코팩스는 30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1967년 마리샬은 14승 10패 202.1이닝 166탈삼진 ERA 2.76에 그쳤습니다.

 

마리샬은 이듬해인 1968년 26승 9패 325.2이닝 218탈삼진 ERA 2.43으로 다승·이닝·완투(30)·삼진/볼넷(4.74)에서 1위에 오르면서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대부분의 시즌이라면 사이영 상을 수상했을 성적이지만, '투수의 해'라 불리는 1968년은 예외였습니다. 이해 내셔널리그에는 22승 9패 304.2이닝 268탈삼진 ERA 1.12로 라이브볼 시대 최저 ERA을 기록한 세인트루이스의 밥 깁슨이 있었기 때문이죠. 당연하게도 내셔널리그의 사이영 상과 MVP는 깁슨의 몫이었습니다.


커리어 말년
샌프란시스코의 에이스, 후안 마리샬 이야기

후안 마리샬 / 출처 - MLB.com

 

마리샬은 1969년 21승 11패 299.2이닝 205탈삼진 ERA 2.10으로 평균자책점·완봉(8)·WHIP(.994)·9이닝당 볼넷(1.6)에서 1960년대의 마지막 시즌을 화려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코팩스는 은퇴했고, 깁슨보다 앞선 기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해 내셔널리그에는 25승 7패 273.1이닝 208탈삼진 ERA 2.21을 기록하고, 신생 구단인 뉴욕 메츠의 우승을 이끈 '신성' 톰 시버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리샬은 사이영 상을 차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습니다.

 

1970년 스프링캠프 중 마리샬은 페니실린에 대한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 때문에 단기적으로 체중이 급격하게 감소했고, 장기적으론 만성 관절염과 허리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1970시즌 12승 10패 242.2이닝 123탈삼진 ERA 4.12에 그쳤는데요. 그나마 다행인 점은 1970년 8월 28일 홈구장 캔들스틱 파크에서 피츠버그를 상대로 완투승을 거두며 통산 200승 고지를 밟았다는 겁니다. 마리샬은 이듬해인 1971년 멋지게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마리샬은 1971년 18승 11패 279이닝 159탈삼진 ERA 2.94로 개인 10번째이자, 마지막 올스타에 선정됐습니다. 마리샬의 활약에 힘입어 소속팀 샌프란시스코도 NL 서부 지구 1위를 차지하며 1962시즌 이후 9년 만에 가을야구 무대를 밟았습니다. 마리샬은 NLCS 3차전에서 피츠버그를 상대로 8이닝 2실점으로 호투를 펼쳤지만, 팀 타선이 1득점에 그치면서 완투패를 당했는데요. 이는 마리샬의 통산 두 번째이자, 마지막 포스트시즌 등판이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투수들이 흔히 그렇듯, 마리샬의 성적 하락도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마리샬은 1972년 6승 16패 165이닝 72탈삼진 ERA 3.71으로 커리어 첫 5할 승률 미만을 기록했고, 시즌 종료 후에는 허리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73년에도 11승 15패 207.1이닝 87탈삼진 ERA 3.82에 그쳤습니다. 그러자 샌프란시스코는 마리샬을 보스턴으로 트레이드합니다. 마리샬은 1974년 5승 1패 57.1이닝 21탈삼진 ERA 4.87에 그친 후 보스턴에서 방출됐습니다.


은퇴 후의 삶
샌프란시스코의 에이스, 후안 마리샬 이야기

후안 마리샬의 동상 / 출처 - MLB.com

 

흥미롭게도 마리샬의 현역 마지막 팀은 다저스였는데요. 다저스는 1975시즌을 앞두고 37세의 베테랑 마리샬을 자유계약으로 영입했습니다. 다저스 팬들은 10년 전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지만, 로즈보로의 호소로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샬의 다저스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마리샬은 1975시즌 첫 두 번의 등판에서 1패 ERA 13.50을 기록한 후 은퇴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마리샬의 은퇴 직후 그의 등번호 27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리샬은 투표 자격이 주어진 첫 2년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지 못했으나, 로즈보로가 자신의 친구에게 투표해 줄 것을 촉구하면서 1983년 세 번째 투표에서 83.7%의 득표율로 헌액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마리샬은 고국인 도미니카 공화국에 거주하며 농장을 운영했고,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진 도미니카 공화국에 있는 애슬레틱스 산하 육성 프로그램을 감독하면서 미겔 테하다를 비롯한 여러 메이저리거를 배출했습니다.

 

한편, 1996년부터 2000년까지는 도미니카 공화국 대통령 리오넬 페르난데스의 내각에서 체육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마리샬은 지금도 도미니카 공화국에 거주하고 있지만, 미국에도 자주 방문하며 활발하게 활동 중입니다. 또한, 야구계의 원로로서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홈구장 오라클 파크 앞에는 마리샬의 동상이 세워져있습니다. 다리를 하늘 끝까지 치켜드는 듯한 그의 투구폼은 영원히 샌프란시스코 팬들에게 기억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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