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윌스, 도루를 살려내다
최강 마무리 요안 두란을 상징하는 등번호는 59번이다. 2025년 7월에 미네소타에서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된 두란은 새로운 팀인 필라델피아에서는 59번을 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59번의 주인이 롭 톰슨 감독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톰슨은 양보 요청이 없었는데도 "100마일 투수에게 더 어울리는 번호"라며 자신이 오랫동안 달아온 59번을 두란에게 양보했다. 두란으로서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카일 터커는 LA 다저스 입단이 확정되자, 데이브 로버츠 감독에게 등번호 30번을 양보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로버츠 감독은 거절했다.
선수의 등번호 양보 요청을 감독이 거절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하지만 로버츠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스승인 모리 윌스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2002년 30세의 나이로 LA 다저스에 입단했을 당시 로버츠는 입지가 매우 불안한 선수였다. 발은 빨랐지만 도루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고, 체구가 작다 보니 홈런은 기대할 수 없었다(통산 169타석 2홈런). 하지만 일생의 은인이 로버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저스의 캠프에는 통산 586도루로 은퇴한 모리 윌스가 특별 인스트럭터로 참가하고 있었다. 로버츠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윌스는 자신의 도루 기술을 모두 전수했다. 윌스가 로버츠에게 가르친 건 투수의 습관을 읽는 법, 투구 리듬을 파악하는 법, 투수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법 등 돈을 주고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윌스는 로버츠에게 "내 등번호인 30번을 너에게 줄테니, 네가 다저스에 있는 한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 모두가 네가 뛴다는 걸 알고 있을 때 도루를 성공시켜야 할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로버츠는 다저스에서 30번을 달고 최고의 스틸러 중 한 명이 됐다. 2004년 7월 보스턴으로 트레이드된 로버츠는 ALCS 4차전에서 역사적인 'The Steal'을 성공시켰다. 윌스가 언젠가 올 것이라고 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2008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로버츠는 2016년 감독으로 다저스에 돌아왔다. 윌스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다저스를 떠난 후 13명의 선수가 거쳐간 30번을 돌려 받았다. 그리고 윌스가 2022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매년 다저스의 캠프에 참가해 선수들을 지도한 그를 각별하게 모셨다.
1932년 워싱턴 DC에서 13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윌스는 야구 농구 미식축구에서 뛰어난 재능을 선보였다. 윌스는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했지만 메이저리그 데뷔 없이 8년이 지나갔다. 디트로이트는 1959년 시즌에 앞서 윌스를 3만5000달러에 샀다. 하지만 스프링 캠프가 끝나자 가치가 없다며 다저스로 돌려보냈다. 그 해 윌스는 돈 짐머의 부상으로 메이저리그 데뷔에 성공했고 월드시리즈 우승도 함께 했다.
당시 메이저리그는 홈런 지상주의에 도루를 경시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다저스의 입장은 달랐다. 다저스는 브루클린에 있었을 때 아담한 에베츠필드에서 홈런 야구를 했다. 하지만 LA 콜리세움과 새로 지은 다저스타디움은 광활했기 때문에 홈런 야구를 할 수 없었다. 바로 그 때 윌스가 도루라는 새로운 해법을 가지고 등장했다.
로저 매리스가 61홈런을 친 1961년, 윌스는 35개의 도루로 내셔널리그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듬해에는 104개의 도루를 성공시켜 타이 콥이 1915년에 세운 96개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100도루였다. 매리스가 61홈런을 쳤을 때 162경기를 했기 때문에 기록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던 포드 프릭 커미셔너는 윌스에게도 같은 어깃장을 놨다.
윌스의 도루에 가장 골머리를 앓았던 팀은 다저스의 최대 라이벌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였다. 샌프란시스코 앨빈 다크 감독은 중요한 시리즈를 앞두고 구장 관리인에게 1루 근처에 물을 엄청나게 뿌리라는 비밀 지시를 내렸다. 구장 관리인은 특명에 따라 1루를 진흙탕으로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윌스의 도루를 막을 수 없었다.
윌스가 나가면 다저스 팬들은 다함께 "Go! Go! Maury, Go"를 외쳤다. 한 번은 뉴욕 메츠 로저 크레익으로 하여금 12구 연속 견제구를 던지게 하고 성공한 적도 있었다.
윌스가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니자 나머지 팀들도 잊었던 도루의 가치를 다시 떠올렸다. 모두가 윌스의 특별한 슬라이딩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멈췄던 도루의 시대가 다시 시작됐다.
도루는 투수의 마음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발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것이라고 한 윌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야구는 실패의 게임이다. 오직 실패 속에서 성공의 단서를 찾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윌스가 로버츠에게 알려준 인생의 비밀은 '실패는 부끄러운 게 아니며, 도루 실패 또한 언제든 뛸 수 있다는 공포심을 투수에게 심어주는 투자'라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