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가을 남자', 레지 잭슨 이야기

레지 잭슨 / 출처 -MLB.com
레지 잭슨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까지 메이저리그를 풍미한 좌타 거포 외야수입니다. 잭슨은 통산 21시즌 2,820경기 2,584안타 563홈런 1,702타점 228도루 타율 0.262 OPS 0.846 WAR 74.0을 기록했고 올스타 14회, 정규 시즌 MVP 1회, 실버슬러거 2회, 홈런왕 4회, 타점왕 1회, 월드시리즈 우승 5회, 월드시리즈 MVP 2회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1993년 첫 투표에서 93.6%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잭슨의 통산 삼진 2,597개는 역대 1위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철저하게 계산된 플레이 스타일에서 오는 부산물이었을 뿐입니다. 잭슨은 역사상 최고의 게스 히터(Guess Hitter)로, 상대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질지를 예측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는데요. 그는 상대 투수의 투구 패턴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투수들이 자신이 원하는 공을 던지도록 유도했습니다. 게다가 그걸 위해서 때론 일부러 헛스윙을 하기도 했죠.
이 과정에서 잭슨이 얻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홈런'이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통산 563홈런은 은퇴 시점을 기준으로 역대 6위 기록입니다. 또한, 잭슨은 가을 야구에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요. 그는 월드시리즈 통산 27경기에서 타율 0.357 10홈런 24타점 OPS 1.212를 기록했고, 특히 1977년에는 단일 월드시리즈 최다 홈런 기록(5개)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미스터 옥토버(Mr. October)'입니다.
윈코트의 신동

레지 잭슨 / 출처 -MLB.com
레지날드 마르티네스 잭슨(Reginald Martinez Jackson)은 1946년 5월 18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의 북쪽에 위치한 교외 지역인 윈코트에서 마르티네스와 클라라 잭슨 부부의 사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마르티네스는 젊은 시절 니그로리그의 뉴어크 이글스에서 2루수로 뛰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한 후 제대 후에는 양복점을 차렸습니다.
잭슨의 부모님은 그가 여섯 살 때 이혼했고, 어머니 클라라는 막내인 그를 제외한 세 자녀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두 이복형과 함께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윈코트는 부유한 지역으로 잭슨의 가족은 윈코트의 몇 안 되는 흑인 가정 중 하나였는데요. 따라서 인종차별이 심한 지역에서 성장해 어려서부터 눈에 띄지 않도록 교육을 받은 다른 흑인 메이저리거들과는 거주 환경이 달랐습니다.
이러한 성장 배경으로 인해 잭슨은 항상 자신의 감정을 결코 숨기지 않았고, 이는 훗날 동료 선수와 언론, 그리고 구단주들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잭슨이 어떠한 환경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비결이기도 했죠. 잭슨은 자서전인 <Becoming Mr. October>에서 "나는 내가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한다. 자만심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잭슨은 첼트넘 고등학교 시절 야구, 미식축구, 농구, 육상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는데요. 잭슨은 미식축구에서는 러닝 백으로 전국의 명문대에서 전액 장학금 제안을 받았고, 야구에서도 샌프란시스코, 다저스, 미네소타 등으로부터 입단 테스트 제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에 가기를 원했고, 잭슨 역시 대학에서 미식축구와 야구를 병행하길 원했죠. 잭슨이 고민 끝에 선택한 곳은 애리조나 주립대였습니다.
전체 2순위로 애슬레틱스의 지명을 받다

레지 잭슨 / 출처 -MLB.com
애리조나 주립대 미식축구 팀의 감독은 훗날 대학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프랭크 쿠시로 잭슨의 고교 시절 은사와도 인연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애리조나 주립대는 바비 윙클스 감독이 이끄는 야구팀으로도 유명했는데요. 잭슨은 평균 B 학점을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미식축구와 야구를 병행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규정상 신입생은 팀과 함께 연습할 순 있지만, 대학리그(NCAA) 경기에 뛸 순 없었습니다.
이에 윙클스 감독은 여름 동안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설적인 스카우트였던 월터 유스가 이끄는 아마추어 팀인 레오네스에서 뛸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윙클스는 유스에게 잭슨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전까지 레오네스는 백인 선수들로만 구성된 팀이었고, 잭슨은 유스가 처음에는 약간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잭슨이 뛰는 것을 지켜본 유스는 그에게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곧이어 잭슨과 계약할 수 없다는 사실에 깊은 좌절감을 느꼈죠. 바로 그해 메이저리그에 신인 드래프트 제도가 도입되었기 때문입니다. 1965년 첫 번째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지명된 선수는 잭슨의 애리조나 주립대 1년 선배인 릭 먼데이였습니다. 레오네스에서 여름 내내 야구를 하며 기량을 향상시킨 잭슨은 이듬해인 1966년 애리조나 주립대로 복귀해 먼데이가 맡았던 중견수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홈런과 타점에서 학교 기록을 세우며 올-아메리칸 퍼스트 팀에 선정됐습니다. 대부분의 스카우트는 잭슨이 전체 1순위 지명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뉴욕 메츠는 17세의 포수 스티브 칠콧을 지명했고, 잭슨은 애슬레틱스로부터 전체 2순위 지명을 받았습니다. 메츠가 잭슨 대신 칠콧을 지명한 것은 지금도 드래프트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선택으로 꼽힙니다.
프로 첫 해부터 두각을 드러내다
레지 잭슨 / 출처 -MLB.com
훗날 잭슨이 여러 매체를 통해 메츠가 자신을 1순위로 지명하지 않은 것은 '당시 백인 여성과 교체 중이었던 것이 원인'이라고 거듭 주장했습니다. 잭슨은 드래프트 하루 전 윙클스 감독이 이와 같은 사실을 자신에게 얘기해 줬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윙클스 감독은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했고, 메츠 또한 '당시 구단이 포수에 대한 갈망이 컸고 전설적인 감독 케이시 스텡겔이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잭슨을 지명하지 않은 것이 메츠가 창단 초기에 저지른 가장 큰 실수 중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칠콧은 마이너리그에서 두 번째 시즌에 어깨를 다친 것을 시작으로 선수 생활 내내 부상에 시달리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하면서 지금까지도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됐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한 번도 뛰지 못한 3명 중 한 명으로 남아있기 떄문입니다.
반면, 전체 2순위로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 지명된 잭슨은 프로 진출 첫해부터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1966년 6월 13일, 애슬레틱스와 95,000달러에 계약을 체결한 20세의 잭슨은 노스웨스트 리그(싱글 A-)의 루이스턴 브롱크스로 처음 배정되어 12경기를 소화한 후 곧바로 캘리포니아 리그(싱글 A)의 모데스토 레즈로 승격됐습니다. 그리고 56경기에서 타율 0.299 21홈런 60타점 OPS 0.971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남겼습니다.
잭슨은 이듬해인 1967년 서던 리그(더블 A)의 버밍엄 A's로 승격됐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당시 미국 남부에 여전히 남아있던 인종차별을 처음 접하게 되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버밍엄의 감독 존 맥나마라로부터 정서적인 지원을 받은 덕분에 빠르게 적응했고, 타율 0.293 17홈런 58타점 OPS 0.934이란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1967년 6월 9일, 클리블랜드와 더블헤더를 앞두고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어 데뷔전을 치릅니다.
전국적인 스타로 떠오르다

레지 잭슨 / 출처 -MLB.com
메이저리그 데뷔 첫해인 1967년 잭슨은 35경기에서 타율 0.178 1홈런 6타점 OPS 0.574에 그친 후 마이너리그로 강등됐는데요. 애슬레틱스는 1968시즌을 앞두고 중부의 캔자스시티에서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로 연고지를 옮겼고, 82승 80패(.506)로 16년 만에 5할 승률을 넘어섰습니다. 그 중심에는 잭슨이 있었습니다. 잭슨은 풀타임 첫해인 1968년 타율 0.250 29홈런 74타점 14도루 OPS 0.768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잭슨은 1969년에도 타율 0.275 47홈런 118타점 OPS 1.018로 올스타 선정과 함께 득점(123)·장타율(0.608) 부문 1위에 오르며 깜짝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7월 5일까지 34홈런으로 베이브 루스(1927년 60홈런)와 로저 매리스(1961년 61홈런)보다 빠른 페이스를 기록 중이었는데요. 비록 9월 한 달간 홈런 하나를 추가하는데 그치며 47홈런으로 마감했지만, 이제 23세에 불과했던 젊은 거포의 등장은 모두를 흥분시켰습니다.
하지만 잭슨은 이듬해인 1970년 타율 0.237 23홈런 66타점 OPS 0.817로 최악의 부진을 겪었고, 대학 시절 만나 2년 전에 결혼했던 첫 번째 아내와도 이혼했습니다. 그러자 시즌 종료 후 자신의 스윙을 되찾기 위해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리는 윈터 리그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는데요. 이해 겨울 그는 당대 최고의 타자이자, 훗날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되는 프랭크 로빈슨 밑에서 뛰면서 홈런과 타점 부문 1위를 차지합니다.
윈터리그에서 복귀한 잭슨은 1971년 타율 0.277 32홈런 80타점 OPS 0.860을 기록하며 반등에 성공했고, 애슬레틱스도 101승으로 아메리칸리그 서부 지구 1위를 차지했습니다. 잭슨은 볼티모어와의 AL 챔피언십시리즈에서도 타율 0.333 2홈런 2타점 OPS 1.250으로 맹타를 휘둘렀지만, 애슬레틱스는 3연패로 탈락했는데요. 하지만 이후 잭슨과 애슬레틱스는 3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MLB 역사에 남을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애슬레틱스의 월드시리즈 3연패를 이끌다
레지 잭슨 / 출처 -MLB.com
사실 애슬레틱스의 첫 번째 우승에 잭슨의 지분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잭슨은 1972년 타율 0.265 25홈런 75타점 OPS 0.823으로 1루수 마이크 엡스타인과 함께 타선을 이끌었지만, 디트로이트와 챔피언십시리즈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면서 월드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이해 애슬레틱스 우승의 주역은 에이스 캣피시 헌터(21승 7패 ERA 2.04)와 마무리 롤리 핑거스(21세이브 ERA 2.51)가 이끄는 투수진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우승부터는 달랐는데요. 잭슨은 1973년 타율 0.293 32홈런 117타점 22도루 OPS 0.914으로 홈런왕과 타점왕을 동시에 석권하며 아메리칸리그 MVP에 선정됐습니다. 또한, 월드시리즈에서도 타율 0.310 1홈런 6타점 OPS 0.941으로 활약하며 월드시리즈 MVP에 오릅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정규 시즌 서부지구 1위를 차지한 애슬레틱스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메츠를 꺾고 월드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잭슨은 1974년에도 타율 0.289 29홈런 93타점 25도루 OPS 0.905로 활약했습니다. 월드시리즈에선 볼넷을 5개나 얻어낼 정도로 집중 견제에 시달리며 타율 0.286 1홈런 1타점 OPS 1.045로 전년도 대비 부진했지만, 최종전인 5차전에서 다저스의 추격 의지를 끊는 호수비를 펼치며 애슬레틱스의 3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죠. 하지만 이를 마지막으로 찰리 핀리 구단주가 구축한 '애슬레틱스 왕조'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핀리 구단주는 단장 업무까지 도맡아하며 '스몰 마켓'이자, 40년 넘게 우승을 하지 못한 애슬레틱스를 강팀으로 만든 명석한 사업가였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인색했는데요. 예를 들어 그는 시즌 시작 전, 선수 1명당 모자 2개와 배트 24개를 지급하고 시즌 내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만약 추가적인 지출이 필요할 경우 그 비용은 선수에게 부담시켰죠. 심지어 부상 방지를 위해 감는 테이프의 사용량도 일일이 체크할 정도였습니다.
애슬레틱스를 떠나 양키스로

레지 잭슨 / 출처 -MLB.com
또한 핀리는 오프시즌 연봉 협상 때마다 선수들과 마찰을 일으키기 일쑤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1971년 24승 8패 301탈삼진 ERA 1.82란 역사에 남을 성적을 기록하며 사이 영 상과 MVP를 동시에 석권한 바이다 블루에게 연봉 협상에서 5만 달러를 고집해 그를 은퇴 직전까지 몰아붙였습니다. 1973년에는 정규시즌 MVP와 월드시리즈 MVP를 동시에 수상한 잭슨에게도 연봉 10만 달러를 고집하며 결국 조정 위원회에 회부됐습니다.
그러다 결국 캣피시 헌터에게 연봉 10만 달러 중 5만 달러는 연금보험으로 입금한다는 약속을 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적발되면서 헌터는 1974시즌 종료 후 역사상 최초로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습니다. 애슬레틱스는 타선의 힘으로 5년 연속 서부지구 1위를 차지했지만, 에이스를 잃어버린 여파로 챔피언십시리즈에서 3연패로 탈락합니다. 이후 핀리는 고액 연봉자들을 트레이드하며 전면 리빌딩에 돌입했습니다.
잭슨도 예외는 아니었죠. 잭슨은 1975년 타율 0.253 36홈런 104타점 OPS 0.840으로 커리어 두 번째 홈런왕을 차지했지만, 이듬해인 1976년 4월 2일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트레이드됐습니다. 그리고 볼티모어와 연봉 협상이 길어지면서 5월 2일에서야 팀에 합류한 잭슨은 6월 중순까지 타율 0.208 4홈런 19타점에 그쳤지만, 후반기부터 반등에 성공하며 타율 0.277 27홈런 91타점 28도루 OPS 0.853으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1976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은 잭슨은 뉴욕 양키스로 이적했는데요. 양키스는 1976년 지구 1위를 차지했지만, 월드시리즈에서 신시내티에 4연패를 당하며 자존심을 구겼습니다. 이에 양키스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월드시리즈에 강했던 잭슨을 영입하기 위해 당시로선 파격적인 5년 296만 달러 계약을 안겼습니다. 이런 구단주의 결정에 빌리 마틴 감독과 주장 서먼 먼슨을 비롯한 기존 선수들은 강한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양키스의 2연패를 이끈 '미스터 옥토버'

레지 잭슨 / 출처 -MLB.com
잭슨이 양키스에서 보낸 첫 시즌은 쉽지 않았습니다. 1977년 6월 18일, 양키스는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보스턴 레드삭스와 경기에서 10-4로 패했는데요.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경기에서 잭슨이 타구 판단 실수로 짐 라이스의 얕은 우익수 방면 뜬공을 처리하지 못하면서 2루타로 연결됐습니다. 잭슨이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한 마틴 감독은 이닝 중간에 그를 교체했고, 잭슨이 더그아웃에 들어오자 욕설을 마구 퍼부었습니다.
잭슨은 자신이 게으름을 피운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마틴 감독은 자신이 제대로 본 게 맞다고 소리쳤고, 이내 말다툼이 격해지면서 둘은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는데요. 하지만 요기 베라와 엘스턴 하워드 코치가 두 사람을 떼어놓으면서 간신히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잭슨은 1977년 타율 0.286 32홈런 110타점 OPS 0.925를 기록했고, 양키스도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1위를 차지했습니다.
캔자스시티와의 챔피언십시리즈 5경기에서 잭슨은 타율 0.125(16타수 2안타)에 그쳤습니다. 그러자 월드시리즈를 앞두고 인터뷰를 요청받은 양키스의 주장 먼슨은 잭슨의 과거 포스트시즌 성적을 고려했을 때, 그가 더 인터뷰 대상에 적합할 것이라며 "미스터 옥토버(잭슨)에게 물어보시죠"라고 말했는데요. 사실 이 말에는 비꼬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잭슨은 거짓말처럼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잭슨은 월드시리즈 6경기에서 타율 0.450 5홈런 8타점 OPS 1.792를 기록하며 양키스를 15년 만에 우승으로 이끌고 월드시리즈 MVP에 선정됐습니다. 특히 6차전에선 팀이 2-3로 뒤진 4회말 역전 투런포를 터뜨린 것을 시작으로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죠. 잭슨은 1978년에도 타율 0.274 27홈런 97타점 OPS 0.834를 기록했고,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391 2홈런 8타점 OPS 1.196을 기록하며 팀의 WS 2연패를 견인했습니다.
마지막 불꽃 그리고 은퇴
레지 잭슨 / 출처 -MLB.com
이후에도 잭슨은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특히 1980년에는 타율 0.300 41홈런 111타점 OPS 0.995로 커리어 유일한 3할 타율과 함께 3번째 홈런왕을 차지하며 조지 브렛에 이어 MVP 투표 2위에 오르기도 했죠. 하지만 1979년 8월 2일 팀의 주장 먼슨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양키스는 더이상 예전 같은 강팀이 아니었고, 1977년의 갈등 이후 먼슨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잭슨에게도 그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구단주 스타인브레너와 갈등이 겹치며 뉴욕을 떠나고 싶었던 잭슨은 1981시즌 종료 후 FA 자격으로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와 5년 계약을 맺고, 고향 캘리포니아로 돌아갔습니다. 잭슨은 에인절스에서 첫 해인 1982년 타율 0.275 39홈런 101타점 OPS 0.907을 기록하며 통산 4번째이자 마지막 홈런왕을 차지하고, 팀을 가을야구 무대로 이끈 것을 시작으로 5년간 꾸준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1987년 41세의 잭슨은 애슬레틱스와 1년 계약을 맺으며 친정팀에 복귀했고, 타율 0.220 15홈런 43타점 OPS 0.699를 기록한 후 현역에서 은퇴했습니다. 그는 1993년 93.6%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양키스(44번)와 애슬레틱스(9번)는 그의 등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은퇴 후 양키스와 휴스턴의 특별 고문으로 활동하던 잭슨은 2024년 11월 10일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사임 의사를 밝혔습니다.
